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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질문에 ‘숨은 권력’



※ 춘천에서 인문학카페36.5º를 운영하는 홍승은 씨가 기존의 관념과 사소한 것들에 의문을 던지는 ‘질문교차로’ 칼럼을 연재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고등학교를 그만둘 때 받은 질문 세례

 

고등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엄청난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주위 친구들부터 가족, 선생님까지 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해?” 나는 학교에 다니는 의미를 모르겠고, 성적도 안 좋고, 학교는 너무 억압적이고, 학교에 안 다니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를 대며 사람들에게 내 선택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그냥’ 가기 싫었던 것뿐이었는데도,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아무리 잘 대답해도 어떤 사람들은 전혀 듣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역시나 내 대답을 듣기나 한 건지 “너 그러다가 인생 망친다” 라며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찍부터 내 삶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자퇴서를 제출하고 났을 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꾸역꾸역 잠수하다가 물 위로 올라왔을 때의 느낌처럼 오랜만에 숨이 크게 쉬어지는 해방감을 느꼈을 뿐이다.

 

그 뒤로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대답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아니, 주로 ‘해명’을 요구받았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질문은 아주 교묘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맞닥뜨리기도 한다. 스물둘,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친구의 아버지는 “넌 왜 굳이 대학원에 가려고 하니?”라고 물었다. “얼른 돈 모아서 시집가야지.”라는 말도 함께.

 

학교를 그만둘 때 주위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을 겪어보았기에, 학교를 더 다닌다고 할 때에도 이런 질문을 들어야 한다는 게 의아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말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여자는 어차피 공부 더 해봤자 시집가면 끝이니 빨리 취직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라는 말. 구시대 이야기일 것 같지만 철 지난 유행가처럼 여전히 나와 친구들의 삶을 맴도는 인식이다.

 

▶ 그림자 같이 쫓아다니는 질문 세례   ⓒ출처: 20대의 소란한 공존 <고함20> goham20.com

 

질문할 수 있는 사람, 질문될 수 있는 무엇

 

삶의 마디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 폭격에 일일이 답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질문에 ‘숨은 권력’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대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대개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일상적인 질문에도 사회의 주류 담론이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

 

선생님과의 위계 관계가 뚜렷했던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고 평등한 사제지간을 꿈꾸며 들어갔던 대학원 면접 날, 나는 처음 보는 한 남자교수로부터 “넌 왜 고등학교 안 갔어? 사고 쳤구나?”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이게 질문인지 농담인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교수가 나에게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내가 학교를 사고 쳐서 그만둔 게 아니었다는 걸 몇 분 동안 줄줄이 ‘해명’했다. 그때 무척 부당함을 느꼈지만, 그 교수에게 역으로 질문하거나 따질 수는 없었다.

 

학교를 그만둘 때 해명해야 했던 상황을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벗어날 수 없다니, 아니 성인이 된 지금은 오히려 더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길 요구받는다. 많은 경우 나의 자퇴 경력은 제도권 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교육의 미래로 연결되길 은근히 강요받는다. 그래야만 소위 내 ‘일탈’ 경력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난 일순간 ‘사고 쳐서 학교를 그만 둔 생각 없는 애’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반복되는 질문이더라도 압박감의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열일곱 당시보다, 지금이 더 압박감이 느껴진다.

 

위계 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관계에서의 일상적인 질문은 다를까. 함께 활동하는 ‘검은새’는 고등학교를 거부하고, 대학도 거부한 스무 살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번 그녀에게 “학교는 어디 다니세요? 몇 학번?”과 같은 질문을 한다. 또 다른 친구 ‘조재’는 머리가 숏컷이다. 그녀는 “머리 기르면 예쁠 거 같은데, 왜 안 길러요? 화장 좀 하면 더 예쁠 텐데요?”와 같은 질문을 일상적으로 듣는다.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들 역시 결코 사소하지 않은 사회적 편견을 담고 있다. 스무 살은 무조건 대학생이거나 재수생이어야 한다는, 여자는 무조건 머리가 일정 정도 이상 길어야 하고 꾸미길 좋아해야 한다는, 더 나아가 예뻐지길 욕망해야 한다는 견고한 편견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너무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사실은 별 관심 없으면서, 타인의 경계를 손쉽게 침범하는 질문은 곧잘 그 사람에 대한 왜곡된 평가로 이어진다. 한 개인에 대한 아주 단편적이고 무리한 접근이 만연하다.

 

‘관심’의 얼굴을 한 ‘침범’

 

▶ 2013년부터 꾸준히 써온 인문학카페36.5º 입간판  ⓒ홍승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질문이 예외적인 몇몇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명절만 되면 ‘꼰대주의보’라며, 친척들의 고나리질을 경계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올 만큼 무례한 질문은 이 사회의 한 문화이다. 성적은? 대학은? 연애는? 취직은? 연봉은? 결혼은? 자식은? 등을 기본으로 다이어트는? 피부 관리는? 요리는? 등과 같은 ‘여성전용’ 질문이 추가되기도 한다. 마땅히 학교를 다니고 취직해서 꼬박꼬박 돈 모아서 노후준비를 하고, 결혼해서 안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어떤 ‘기본 값’을 전제한 질문들은 너무 쉽게 개개인을 침범하고 통제한다.

 

질문이 무서운 건 ‘관심’의 얼굴을 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학교에 안 가는 이유를 묻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미 기울어진 질문에 해명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언어적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누군가에게 의심받고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을 때 느껴지는 박탈감은, 사람을 불안과 의심 속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질문이 가진 폭력성을 알고부터 대답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거나, 질문을 받더라도 기본 전제를 비틀어 묻는다. 가령 “왜 학교를 그만뒀어?”라고 묻는 사람에게는 “왜 학교에 다녔던 거야? 학교에 왜 가고 싶었어?”라고 묻거나, “왜 취미와 일이 분리되어야 하지? 왜 굳이 연애관계에서만 사랑할 수 있어? 왜 결혼한 관계만이 끈끈한 공동체라고 믿어?”와 같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최근에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해명해주세요.”라고 요구한 어느 사람에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셨나요? 마르크스에 대해서 공부해보지도 않고 마르크스에 대해서 해명해 달라는 사람이 있나요? 페미니즘도 단일한 사상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페미니즘을 해명할 수 있지요? 애초에 왜 내가 주장도 아닌 해명을 해야 하는 거지요?”라고 물었다. 상대방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사실 페미니즘을 잘 알지 못하면서 무례했다고 사과했다.

 

당신이 계속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이렇게 나를 향하던 질문의 화살을 돌려 자신에게 ‘난 왜 굳이 학교에 다녔을까. 난 왜 불금만 바라며 사는 거지. 난 왜 페미니즘이 불편하지?’ 하며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물론, 말이 막혀서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됐건 불편해하는 반응들을 접하며,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내 방식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례한 질문을 만날 게 분명한데, 이제는 그 불편함을 내가 감내할 게 아니라 ‘불편’ 그 자체를 퍼뜨리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무언가를 의심하는 건 자신과 세계가 일치된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불편해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한다.

 

이런 고민의 연장에서 2013년부터 ‘질문하는 공간’ 인문학카페36.5º를 열었다. 그리고 카페의 입간판으로, 모임과 행사로, 독립출판으로, 기존의 것들에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기본 값’의 세계에서 불편함을 느껴왔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공식에 맞춰 해명해야 했던 내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묻게 된 것이다. 으레 젊은 여자이기에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신조어로,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를 풍자한 용어)의 대상이 되는 이 사회에서, 어린 여자들이 ‘감히’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그 자체로 작은 혁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카페에서 ‘페미니즘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가 “이곳에 있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에요”라고 말했다.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깥세상과 너무 달라서 참 신기하다는 의미였다. 항상 예민하다거나 특이하다고 여겨졌던 그녀가 평범해질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언제 어디서든 그녀가 그녀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불편함을 전파하고 싶다. 사소한 것들 속에 숨은 권력을 발견하고, 그 질문을 교차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불편함 속에 자유가 있다. 질문교차로의 첫 목소리는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홍승은 /감성노리협동조합)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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