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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가진 나와 너,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세요. -편집자 주
체육시간. 피구 시합이 시작되기 전 운동장에 둥그렇게 둘러 선 아이들은 자기편에 들일 친구를 한 명씩 호명한다. 선(최수인)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며 상기된 얼굴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서가 될 때까지 선의 이름은 불리지 않고, 그의 얼굴은 점차 시들어간다.
누구에게나 내 이름이 마지막까지 불리지 않을까봐 초조했던 기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릴 적 기억일 수도 있고, 어른이 된 이후 에둘러감으로써 해결하곤 했던 익숙한 감정일 수도 있다. 영화 <우리들>(윤가은 감독, 2016)은 아이들의 일상과 관계를 세밀한 풍경으로 그려내며 어른들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상기시킨다.
▶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스틸컷.
서로의 차이를 자각하는 일
어떤 이유에서인지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는 선은 교실에서 항상 혼자 지낸다. 그러던 중 교실 복도에서 막 전학을 온 지아(설혜인)와 마주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방학 내내 함께 지내며 ‘우리’가 되어간다.
선은 공장 노동자인 아빠와 분식집을 운영하는 엄마, 그리고 남동생 윤과 함께 산다. 엄마는 아침마다 김밥을 말고, 아빠는 퇴근길마다 소주를 한 병씩 사들고 집에 들어온다. 선은 부모에게 일방적인 돌봄을 받는 위치는 아니다. 어린이집에 간 동생을 데리고 오거나 간단한 식사를 만드는 등 자기 몫의 가사 일을 해내는 의젓한 모습이다.
지아는 선의 집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조건에서 할머니와 함께 산다. 지아네 집을 방문한 선은 좁고 정신없는 자신의 집과 달리 널찍하고 잘 정리된 공간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집’은 두 사람이 놓인 계급적 조건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지아는 선이 갖지 못한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며, 군것질을 하거나 놀기 위해 지갑을 여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선의 이슈가 돈이라면, 지아의 이슈는 부모다. 지아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지아는 엄마와 통화만 할뿐 얼굴을 본 지는 오래되었다. 게다가 아빠는 젊은 여자친구를 만난다. 안정적인 가족 기반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아에게 큰 결핍이다. 선의 집에서 일주일간 지내는 동안 지아는 선이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고 사랑 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게 하는 선의 세계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고자 한다.
▶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스틸컷.
선과 지아가 만나 우정을 싹틔워가는 초반에는 서로 간의 차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이는 오히려 매력이 되고, 관계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차이를 자각하는 일이 결국 자신의 결핍과 마주해야 일임을 깨닫게 된다. 점점 가시화되던 차이는 지아가 선 부모의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싼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큰 간극으로 벌어진다.
뜨겁고, 냉정한 아이들의 세계
다사다난했던 여름방학이 지나고 개학 날, 담임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 전학생 지아를 소개한다. 선은 교실 앞에 선 지아에게 눈인사를 건네지만 지아는 선의 눈을 피하고 학원에서 만난 보라(이서연)의 무리들과 어울린다. 보라의 무리들은 선에 대해 나쁜 말을 수군거리고, 선은 다시 외톨이가 된다. 선이 지아를 위로하기 위해 직접 봉숭아 잎을 따서 물들여주었던 손톱에는 봉숭아물대신 색색의 네일 컬러가 칠해진다.
선과 멀어지고자 하는 지아와, 지아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선은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길 위를 걷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새로운 계기로 인해 지독한 양상을 맞이하게 된다.
하루 종일 시무룩해있는 선을 걱정하는 부인에게 선의 아빠는 “애들이 일 있을 게 뭐 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세계에서 온갖 일들을 마주하면서 살아 나간다. 그 세계는 아이들만이 겪으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행해나갈 미성숙한 세계처럼도 보이지만, 가만히 지켜볼수록 때론 뜨겁고 때론 한없이 냉정한 것이 어른들의 세계와 꼭 닮았다.
<우리들>은 큰 사건들의 나열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는 아니다. 방학과 개학이라는 시간적 계기가 영화의 흐름을 구분하고, 동생 윤이 잠시 사라지거나 소풍을 가는 등 소소한 에피소드가 이어질 뿐이다. 윤가은 감독은 거대한 사건으로 이야기를 부풀리는 대신, 일상의 흐름 속에서 친구들 간의 관계 양상이 뒤틀리고 변화하는 과정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지켜본다.
▶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들> 스틸컷.
상처를 더이상 투사하지 않을 때 성장하는 관계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 제작기에서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세계에서, 같은 마음으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솔직히 직면’하게 되었다고 쓴 바 있다.
<우리들>은 감독의 진심과 배우들의 순도 100% 연기로 결핍, 인정투쟁, 질투와 자존심 등 빨갛게 오가는 감정과 관계의 화학작용을 가시화한다.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다 저마다의 상처가 있는 법이다. 내 상처가 덧났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그대로 돌려주기만 반복한다면 웅덩이에 피만 가득 고일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선은 비로소 한 뼘 더 자란다.
다시 체육시간.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항상 선의 차지였던 마지막 자리에 지아가 놓인다. 선은 금을 밟지도 않은 지아를 게임에서 끌어내려는 아이들에 맞서 지아를 감싸준다.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있지만 둘 사이에는 선한 눈빛이 오고 간다. 그렇게 관계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꽃이 다 떨어진 봉숭아 나무에 새 잎이 달리게 될 것처럼 말이다. ▣ 케이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 윤가은, <우리들> 제작기(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영화칼럼) http://me2.do/F0bSm5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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