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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여성운동사,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고



삶을 운동과 맞바꾸는 순간, 그 지점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 <서프러제트>

 

사라 가브론 연출의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배경은 20세기 초 영국,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다. 실제로 있었던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여성운동의 한 모습을 포착한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운동을 전개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 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낸다.

 

▶ 20세기 초 여성참정권 운동을 다루고 있는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 사라 가브론 연출. 영국.  

 

가정-공장-미디어-국가의 가부장성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특히 자기 손으로는 아이 옷조차 갈아입히지 못하며 자식을 양자로 보내버리는 아버지의 모습과, 아내의 삶에 대해 ‘넌 엄마야’라고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인상적이다. 지나친 성역할 양분화와 ‘남편은/아내는 이래야 한다’는 규범을 보면, 가정이라는 곳이 실은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 알 수 있다.

 

아주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에서마저 계급과 역할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으면, 무언가 균열이 일어나거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잘 대처하지 못한다. 이는 비단 영화 속 주인공의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여성참정권 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가정은 어떤 식으로든 무너질 수 있다. 수많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매일 아침 지상파 방송에서 나가는 자극적인 가정 위기 포착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방송이 알려주는 해결책은 주로 문제의 봉합과 가정으로의 복귀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 영화 <서프러제트> 스틸 중.  헬레나 본햄 카터, 메릴 스트립, 캐리 멀리건 등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을 받는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는 물론 가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세탁공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포함하여, 당시 여성참정권 운동을 탄압하던 국가 권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세탁공장에서는 폭력적인 공장장의 모습 외에도 남성 직원과 여성 직원이 어떻게 다른 대우를 받고 다른 일을 하며, 여성 직원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거기에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가정-공장-미디어-국가의 가부장성을 통해 당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폭력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12세 이상 관람가). 다리미로 손을 누르는 장면도, 그 유명한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의 죽음도, 결코 자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운동가들이 탄압당하고 고통 받는 모습은 아프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자극적인 묘사는 피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이 페미니즘을 만났을 때

 

<서프러제트>는 1912년에서 1913년 영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시대극(Period Film)이다. 실존했던 인물들도 다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인공을 역사가 기억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 분)나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 아닌 평범한 여성노동자로 둔다. 그러면서 이 운동이 가지는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한다. 노동 계급에 초점을 두며 여성들의 삶에 더 주목하여 양육권, 임금 차별 문제를 피부에 닿을 수 있게 풀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역사는 아직도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에서 주인공은 세탁공장 직원인 모드(좌측, 캐리 멀리건)다.

 

영화는 집회를 피해 다녔던 주인공 모드(캐리 멀리건 분)가 여성참정권 운동에 점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극의 전개와 몰입도를 더해가며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는다. 운동가로 사는 삶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야 하는 힘든 일이지만, ‘나’가 운동과 만났을 때 당대 운동가들이 느끼게 된 것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더 컸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나의 경우, 페미니즘을 만났을 때 여러 감정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그럴지 모르겠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는 다른 무언가를 접하게 되면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혹은 불편하다고 느꼈던 그 무언가가 언어화되고 해소되면서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뚜렷하게 전달해낸다. 이것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실재했던 모임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을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영화가 싫다는 사람들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서프러제트>는 과거 한 사건을 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 질문과 답을 던져주고 있다. 영화를 통해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가 더욱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또 여성운동과 관련된 좋은 작품이 함께 주목을 받았으면 좋겠다.   블럭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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