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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병의 추억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술 마실 때 하던 게임



처음 캘리포니아에서 막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일이다. 산 설고 물 설어 신기하고 황당한 일이 계속 벌어졌다. 저녁이면 동네 한국학생 친구들과 모여 맥주를 마시며 각자 그날 겪은 신기하고 황당한 일을 나누었다. 대개 12온즈(355ml)들이 병맥주 6개나 12개짜리를 사다 마셨는데, 병 라벨에 적혀있는 맥주병 재활용에 관한 정보를 들여다보고 시시한 게임을 벌이곤 했다.

 

병에는 으레 이렇게 적혀있다:

CA CRV

ME, VT, CT, NY, MA, IA, OR, HI 5¢ MI 10¢ DEP

 

써있는 내용은, 빈 병 재활용할 때 캘리포니아는 현금상환가(cash redemption value)를 쳐주고 다른 곳은 5센트나 10센트 예치금을 돌려준다는 거다. 미국에 주가 50개인데 왜 가까이 있지도 않은 주가 나열되어있으며, 나열되어있지 않은 나머지 주에선 어쩐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각 주의 이니셜이 낯설어 5센트 돌려주는 주는 어느 주인지, 10센트는 어느 주인지, 그걸 알아맞추는 게임을 재미가 시들해질 때까지 꽤 여러 번 되풀이했다.(검색이란 건 없던 시절이다.)

 

그 때 생각에, 이 커다란 땅에 빈 병 재활용 규정 하나도 이렇게 각기 다른 주가 50개나 있다니 앞으로 진짜 신기하고 황당한 일이 계속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나 살다 보니 주 경계선은커녕 동네를 벗어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신기하고 황당하고 싶은 상상은 아주 가끔 다른 주를 여행할 때나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치만 동네에서도 충분히 황당했다. 문제는 맥주를 산 가게마다 빈 병을 받고 병값을 돌려주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빈 병 값을 계산해주는 곳에 가져가야 했다. 어쩌다 큰 맘 먹고 빈 병을 한참 모아 그런 델 가면, 작은 맥주병 당 5센트 꼴인 CRV가 아니라 저울로 무게를 재서 값을 쳐줬다. 가져갈 때 빈 병 개수를 세어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어서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이득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값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짐작은 했다.

 

게다가 현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쿠폰을 끊어주는 거다! (빈 병, 빈 캔 50개까지는 개수를 세어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은 있다.) 지역 재활용센터는 아예 그런 거래조차 없고 ‘순수한’ 재활용을 할 뿐이다.

 

우리의 게임은 가방끈 긴 것들의 탁상공론으로 끝나곤 했다. 빈 병 하나에 10센트나 돌려주는 미시건에 다녀오는 게 이득이 되는 분기점을 위해서 맥주를 몇 병 이상 마셔야하는지를 계산하는 거였다. 물론 늘 흐지부지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빈 병 재활용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캘리포니아에서 이게 와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빈 와인병을 수없이 내놓을 때마다 아쉬워했다. 대체 왜 와인을 팔 때 CRV를 붙이지도 않아서(그 돈도 내 돈이지만) 빈 와인병은 값도 없는지 연구할 일이다.

 

* 어느 와인 교과서에 실린 다양한 와인 빛깔 리스트. 각 빛깔에 이름을 붙여 기준을 마련하려고 여러 번 수정 과정을 되풀이해 만들었지만, 최종본 인쇄와 동시에 교수들이 들여다보고 “이 색이 이게 아닌데~” 갸우뚱했다는 후문이 있다.


집 앞에 내놓으면 시청에서 걷어가기 전에 푼돈 모으는 홈리스들이 알루미늄캔과 페트병은 집어가도 와인병은 그대로 남긴다. 무거워서일까? 와인업자들의 어떤 로비가 있었을까? 와인을 마실 정도면 병 값 돌려받지 않고도 ‘교양있게' 재활용병에 넣으리라는 믿음일까? 캘리포니아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얼만데, 그 많은 와인병은 그럼 하나도 재활용하는 일 없이 매번 새 병에 담는 걸까?

 

논어 <옹야> 편에 나오는 공자 말씀처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와인 마시다 하게 된 게임도 마찬가지로 시시했다. 그래도 와인 마시는 데에 즐거움을 더하고 빈 병을 모아도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는 데에 사소한 위로를 더하곤 했다. 아무튼 그냥 아는 것보다는 뭐든지 놀이로 하면 배움이 즐겁기 때문에 놀이가 반복되었던 것 같다.

 

게임은, 와인 향을 맡고 생각나는 것을 말하는 거였다. 와인을 그릴 때에는 빛깔, 향, 맛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 놀이는 기본적으로 눈, 코, 입의 경험과 기억이다. 수많은 향을 종류별로 모아놓은 동그라미 차트를 꺼내놓고 거기 써있는 과일, 꽃, 풀, 나무 이름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다 각자의 기억에서 냄새를 꺼내어 와인 향에 연결 지어 서술할 때 비로소 재미가 붙기 시작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경험과 기억의 다양함만큼 이야기가 더 풍성해진다. 수다와 함께 ‘와인은 어렵다’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고, 다 달라서 재밌구나 하게 되었다. 다양해서 때로 황당함도 있지만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세상에 얼굴 똑같은 사람 하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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