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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에 대한 낭만을 비껴서는 영화
앤드류 헤이 감독의 <45년 후>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세요. -편집자 주
결혼 45주년 파티를 일주일 앞둔 노부부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수십 년 전 남편의 애인이었던 카티야가 알프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화 <45년 후>(앤드류 헤이 연출, 영국, 2016)는 이 사건을 마주한 부부가 파티 전 일주일 동안 겪는 일을 통해 긴 세월의 결혼생활이 보장할 것이라 기대되는 ‘신뢰의 무게’에 대한 스산한 전망을 건넨다.
스위스에서 날아온 편지를 받은 이후 남편 제프(톰 커트니)는 계속 동요된 모습을 보인다. 아내 케이트(샬롯 램플링)는 남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괜찮냐’고 반복적으로 묻지만 그는 초연한 대답을 한다. 하지만 두 챕터를 채 넘기지 못했던 철학책을 다시 펴고, 어렵게 끊은 담배를 다시 피기 시작하며, 기후변화와 빙하에 부쩍 관심을 갖는 등 제프의 행동은 이전과 같지 않다. 하지만 케이트와 제프는 이 사건으로 인해 변화한 일상을 마주하면서도 언성을 높여 싸우지 않는다.
▶ 영화 <45년 후>(앤드류 헤이 연출, 샬롯 램플링-톰 커트니 주연, 영국, 2016)
부부의 일상에 닥친 위기라는 소재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닌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샘 멘데스 연출, 미국 2009)에서 주인공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함께 꿨던 꿈이 좌절됨과 동시에 관계의 존속 여부를 도마 위에 올리며 피터지게 싸운다. <45년 후>의 케이트와 제프에게는 이 ‘젊은 커플’과는 달리 상황을 대화로 풀어갈 연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45년 세월의 힘인지 독인지는 차차 판단할 일이지만.
45주년 파티를 앞두고 곱씹어보는 부부관계
제프의 상태를 유심히 지켜보던 케이트는 어느 날 한밤중에 깨어 카티야와의 추억을 곱씹는 제프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정적으로 폭발하고 만다. 케이트는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 여자들의 역할”이라는 동네 친구의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이해와 포용의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제프의 행동이 선을 넘자, 죽은 여자의 나이와 외모를 가늠해 자신과 비교하고, 45년을 함께 보내 온 남편에게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등 감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 그러나 제프는 케이트의 상태를 명확히 인지하지 않으며, 그녀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을 하지 않는다.
결혼 45주년 파티를 앞두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맞닥뜨린 두 사람은 지금껏 흘러온 45년의 세월을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손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자랑하는 친구와 달리 자식도 손자도 없어서 “사진 찍을 이유가 없는” 삶을 산 두 사람에게는 키우는 강아지의 어릴 적 모습도, 처음 구했던 집에서의 추억도 물리적인 형태로는 남아있지 않았다.
다락 위에 소중히 보관된 카티야의 사진을 직접 확인한 케이트는 자신이 제프와 함께 보낸 세월이 사진으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카티야와 만나던 시절에도, 케이트를 만난 이후에도 제프에게는 카메라가 있었다. 카티야의 모습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남긴 것과 달리 제프는 케이트를 피사체로 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흥미도 변하고 중요한 것의 순위도 달라지기 마련이라지만, 케이트는 사진으로 남아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기억될 카티야와는 달리 젊을 적 모습이 사라져버리고 노화된 모습의 현재만 남은 자신의 처지를 복잡하게 받아들인다.
▶ 영화 <45년 후>(앤드류 헤이 연출, 영국, 2016)
케이트의 감정은 매일 아침의 일과이던 개와의 산책을 거를 정도로 무너져가지만 제프는 여전히 카티야와의 추억에, 그녀와 보냈던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감상에 젖어있다. 어리광에 가까운 기행을 반복하는 제프의 태도는 카티야에 대한 여전한 사랑 때문이라기보다, 은퇴해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는 현재에는 되찾을 수 없는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프가 자신만의 감상에 빠져 케이트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는 동안 케이트의 마음에는 파도가 일고, 그 파도는 점점 더 거칠어진다. 제프의 어리광에 대한 케이트의 반응 또한 점점 거칠어진다.
“모든 생각을 다 말하고 싶지만 못하고 있다”는 케이트의 말처럼, 감정을 억제하고 생각을 검열한 상태에서 대화가 잘될 리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를 또는 서로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를 그만두고, 대화도 이곳에서 멈춘다. 일상은 아무 일 없는 듯 되풀이 되지만 스며든 균열은 점차 자리를 넓혀 간다.
두 사람이 함께한 45년의 무게는 신뢰일까 덫일까
45년 함께한 연륜의 노부부는 그들에게 닥친 위기가 별 일 아닌 듯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소를 추억하며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한다. 또한 마음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이름을 피해, 관련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제프는 케이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그녀가 권하는 결정을 따르기도 하지만, 이는 직면하지 않은 채 닥친 문제를 에둘러 지나가기 위한 갈등회피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을 정도로만 감정을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소중한 관계를 지키기 위한 합의의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고통 받으면서도 문제 삼지 못하는 케이트와, 45주년 파티를 맞아 얼렁뚱땅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제프의 모습에서 세월을 통해 쌓이는 것이 신뢰가 아닌, 적응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어쨌든 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신뢰’보다 ‘덫’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관계 아닐까.
▶ 영화 <45년 후>(앤드류 헤이 연출, 샬롯 램플링-톰 커트니 주연, 영국, 2016)
혼란의 5일은 지나가고 파티 당일이 찾아온다. 성대하게 차려진 파티장에는 45년 세월의 “성공한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손님들은 케이트와 제프가 함께 보낸 긴 세월을 낭만화하고 일견 경외한다. 그들의 친구들은 여러 곳에서 얻은 사진들로 두 사람의 추억의 장면들을 구성한 사진첩을 선물한다. 친구들은 사진이 남지 않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보다 완전한 것으로 보완한다. “성공한 결혼”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모두 저마다의 낭만에 취해있는 파티장에서 케이트는 길 잃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홀로 서 있다. 제프는 그녀의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어 이미 빈틈을 내어버린 차가운 바람을 이 날도 역시 읽어내지 못한다. <45년 후>는 세월이라는 신뢰의 바깥에 선다. 45년의 무게는 ‘가정의 달’ 5월이면 휴먼 다큐의 단골 소재가 되곤 하는 잉꼬 노부부 류의 익숙한 낭만에 답하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는 결혼 생활에 대한 낭만이 무색하게도 결혼은, 그리고 관계는 예상치 않았던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지옥을 선사할 수도 있는, 철저한 현실이다.
케이트 역의 샬롯 램플링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에 찬바람이 서는 얼굴을 더하고, 앤드류 헤이 감독은 제프와 케이트의 일주일을 통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일주일을 담아낸다. ▣케이/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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