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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에서 베트남에 사죄하지 않으면 안돼요"

베트남전 진실규명과 성찰 위한 ‘한베평화재단’ 발족



“저희의 바람은 이 문제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사람들이 다 알고 (한국 정부가)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는 거예요.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고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요. 우리 세대에서 이걸 사죄하지 않으면 피해자분들은 한 분 두 분 돌아가실 거고, 그러면 전쟁의 당사자분들이 다 없어지는 거잖아요.”


▶ 베트남전쟁 당시 참전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고 알리는 의정부 청소년들의 모임 ‘베트남 프렌즈’    ⓒ일다


친구들하고 ‘베트남 피에타’상에 헌화를 한 이예진씨(18세)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예진씨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고 알리는 의정부 청소년들의 모임 ‘베트남 프렌즈’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트남 프렌즈 구성원들은 작년 1월 ‘의정부 청소년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 온 후, 베트남 민간인 피해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찾아서 같이 보기도 하고, 평화 토크 콘서트를 열어 베트남 평화기행 이야기를 사람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기행문 내용으로 직접 제작한 달력과 엽서, 베트남 커피 등을 팔아서 모금도 했다. 이렇게 베트남 프렌즈 1기가 1년 동안 모은 돈을 베트남 프렌즈 2기가 베트남 중학생들에게 직접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베트남 프렌즈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예진씨는 이렇게 답했다. “베트남 가기 전에 책을 읽긴 했지만 현지에서 피해자분들에게 직접 들은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우는 친구들, 악몽 꾸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한국에는 아직까지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관련 단체도 없어서 우리가 이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베트남전 성찰과 반성,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

 

베트남전쟁(1960~1975. 베트남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1차 인도차이나전쟁 후, 분단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 과정에서 1960년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북베트남 지원 하에, 남베트남 정부와 이를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 미-소 냉전시대 자본주의/ 공산주의 진영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고, 여러 국가가 개입하였으며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됨) 종전 41주년을 사흘 앞 둔 4월 2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서 한베평화재단이 발족 기자회견을 했다.

 

이날 프란치스코 회관 앞 평화의 소녀상 옆에는 베트남 피에타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베트남 피에타상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인 어머니와 이름도 없이 죽어간 무명 아기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제작됐다.

 

“베트남에 사과를, 미래 세대에 정의를, 아시아에 평화를!”이란 모토를 걸고 시작된 기자회견에는 베트남 프렌즈의 청소년들과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의 구수정씨, 명진 스님, 정지영 영화감독,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유시춘 작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활동가인 이용수 할머니, 이길보라 다큐멘터리 감독, 베트남 유학생 응우옌 응옥 뚜옌씨 등이 재단의 건립추진위원으로 함께했다. ‘베트남 평화기행’에 참가했던 시민들도 각 지역에서 올라왔다.

 

베트남전에는 한국군 32만여 명이 참전(미군 다음으로 많은 수를 파병)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희생자만 9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피해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5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1만 명의 부상자와 2만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가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 베트남전 종전 41주년을 맞아, 4월 27일 열린 한베평화재단 발족 기자회견.  회견문을 낭독하는 구수정씨.  ⓒ일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베트남에 대해 사과는커녕 어떤 진상 규명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1999년 구수정씨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한국에 처음 알린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의 성찰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지 못했고, <아맙>이나 <평화의료연대> 등의 개별 단체들에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만 그 흐름을 이어오고 있다. 또, 수 천 명의 시민들이 ‘베트남 평화기행’에 참가했지만, 개개인의 역사적 성찰을 하나로 모아갈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베평화재단의 설립은 베트남전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찰과 반성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며, 재단이 구심점이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 담론을 확산시켜 나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읽힌다. 이제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묵혀왔던 역사적 과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온 셈이다.

 

노화욱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은 “전쟁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며,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 규명, 사과와 반성을 이끌어내고 베트남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넓혀갈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한국 참전군인들의 고통도 끌어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베평화재단은 또한, 한국과 베트남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시민사회와 연대를 모색하면서 “아시아 평화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노화욱 위원장은 “미래 세대를 교육하고 연구, 출판, 아카이브, 문화예술교류로 동아시아 평화의 주춧돌을 놓겠다”고 밝혔다.

 

베트남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한국 정부 책임론’

 

▶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앞 ‘베트남 피에타’상.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이다.   ⓒ일다


무엇보다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들과 시민들은 베트남전쟁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1999년부터 베트남에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구수정 건립추진위원은 “베트남에서 종전 후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2월 26일, 베트남 중부 빈딘 성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민간인 학살인 ‘빈안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열렸다. 생존자 응우옌 떤 런 씨는 “용서를 한다는 것이 과거를 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빈안학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한국 정부가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빈딘 성 인민위원회의 호 꾸옥 중 주석도 “과거를 닫는다고 하더라도 잊는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베트남 정부는 그동안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하자”는 입장을 견지하며 당과 정부 차원에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억제해왔다. ‘과거를 닫는다’는 모토는 오랜 기간 분단되었던 베트남의 체제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진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즉, 외부라기보다 베트남 ‘내부’를 향한 방침이었던 셈이다.

 

구수정씨는 “이제 베트남도 어느 정도 통합을 완성했고 앞으로는 베트남전 문제 등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베트남 일간지들은 한베평화재단 발족과 ‘베트남 피에타’상, 사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주요 기사로 다루고 있다.

 

베트남의 유력 일간지 <덧 비엣>은 4월 28일자로 베트남 최고의 역사학자로 불리는 즈엉 쭝 꾸억의 인터뷰를 실었다. 즈엉 쭝 꾸억은 “한국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사과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베트남은 이제 보다 ‘솔직한 태도’로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 지나간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고 회피하는 건 인민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베트남이 국가 차원에서 과거를 제대로 마주해야 함을 역설했다.

 

한베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들은 “베트남의 태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해결을 미뤄서는 안 된다. 국제 사회의 여론에 등 떠밀려 나선다면 그때는 이미 늦다”며, 한국 정부가 하루 빨리 역사적 과오를 성찰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기억’을 꺼내어 소통하자

 

정부뿐 아니라 범국민적 차원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확산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영화감독 이길보라씨는 “저희 할아버지도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고엽제로 인한 폐암과 구강암을 오래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며, 이제 우리 사회가 전쟁의 기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지만, 베트남에는 전쟁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베트남 친구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베트남에 서 있는 수많은 한국 기업 건물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있는 기억이 무엇인지, 그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국가 폭력이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합니다.”


▶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헌화 퍼포먼스.   ⓒ일다

 

구수정 건립추진위원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한국 사회 분위기를 체감한다고 한다. “요새 베트남전 문제에 대한 강의 요청이 너무 많아서 다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라면서, “위안부 문제에 임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한국 사람들도 베트남 전쟁 문제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이나 변호사 그룹 등에서도 이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해가려는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다고.

 

구수정 위원은 “달라진 한국 사회 분위기를 느끼면서 놀라지만, 한편으로 당황스러운 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한베평화재단 설립을 계기로 우리가 걸어왔던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의 ‘현재’ 속에도 만연해 있는 폭력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트남 피에타’상은 올해 11월, 빈호아 학살 50주년 위령제를 맞아 베트남에도 세워질 예정이다.  나랑 기자/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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