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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의사 처방전 없이 피임약 구입할 수 있을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6. 4. 27. 08:35

피임약 재분류안, 여성의 목소리 반영하라

약국과 병원 간 ‘선택’ 문제에서 벗어나야



※ 경구피임약과 응급피임약을 의사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가 여부를 두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2년에 발표한 피임약 재분류안을 재검토 중입니다. 피임약 복용 당사자인 여성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보는 기사를 싣습니다. 필자 쎄러님은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피임약 복용을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들

 

#1. 남자친구와의 섹스 후, 늘 임신이 두렵다. 다음 생리일까지 임신에 대한 공포,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콘돔을 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임신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피임약을 사러 약국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생리를 멈추는 약’을 달라고 했다. 약사가 피임약을 건네준다. 피임약을 복용해야겠다고 결심한 시간에 비해 피임약을 구입하는 일은 의외로 손쉬웠지만, 피임 목적으로 피임약을 구입하면서 다른 이유를 댈 수밖에 없었다. -10대 여성, 김은하(가명)씨

 

#2. 피임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터넷 여성커뮤니티를 살펴봤다.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피임약 복용법, 부작용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피임약을 복용하기로 결심한 후 약국에 가서 구입했다. 약사는 별다른 설명 없이 피임약을 건네줬다.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피임약을 챙겨먹기란 쉽지 않았다. 피임약을 복용하면서도 혹시나 피임의 책임이 온전히 나한테만 맡겨질까 두려워, 파트너에게는 복용 여부를 알릴 수 없었다. -20대 여성, 강은진(가명)씨

 

위 사례는 한국여성민우회와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젠더건강팀에서 공동 주최한 여성들의 피임약 복용 경험에 대한 수다회에서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피임약 재분류 임박, 여자들의 수다회 [마이 리틀 피임약] (2015년 11월 20일)   ⓒ 한국여성민우회

 

많은 여성들이 의사나 약사들에게조차 복용법과 부작용, 위험성 등 개인의 과거 병력이나 고려해야할 만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 채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들은 피임의 목적뿐만 아니라 생리 조절 및 생리불순 등 여러 이유로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음에도, 정보를 얻고 싶을 때 찾을 만한 마땅한 통로가 없다.

 

피임약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들이 유통되고,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성들이 피임약을 복용하기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나이 어린’ (비혼)여성의 성적 실천에 대해 사회가 부정적 시선을 보내고, 피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 온전히 맡겨지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피임의 적극적 주체가 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는 피임약 구입 경로에 대한 재분류안을 발표했다. 약국에서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이 가능했던 일반의약품인 사전피임약(경구피임약)을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입할 수 없는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한 것이다. 반대로 사후피임약(응급피임약)의 경우는 전문의약품에서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병원 vs 약국’ ‘안정성 vs 접근성’의 문제?

 

식약처는 피임약 재분류안에 대한 근거로, 경구피임약의 장기 복용은 위험하다며 ‘부작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경구피임약은 한국에서 지난 50여 년 동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어 판매되어왔다. 국가의 가족계획정책에 따라 경구피임약 복용이 적극 권장된 적도 있다. 식약처는 기존의 경구피임약의 ‘안전성’을 강조했던 일련의 행위들과 모순된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안전하다고 믿고 복용하고 있던 여성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시 식약처가 주최한 공청회에는 여성단체, 시민단체를 비롯해 의료계, 종교계 등이 패널로 참석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의사들은 부작용과 오남용의 가능성 때문에 사전·사후 피임약 모두를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약사들은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사전·사후 피임약 모두를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할 것을 주장했다. 양측의 엇갈린 주장은 피임약 재분류를 두고 의사회와 약사회가 잇속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편 피임약의 처방이나 복약 지도 혹은 복용의 주체, 그 어느 쪽도 아니지만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련된 논의 자리에 늘 등장하는 종교계에서는 “사후피임약은 낙태약”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더불어 ‘성문란이 조장된다’는 이유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을 반대했다. 공청회의 패널로 참석했던 일부 단체는 사후피임약을 선택하기까지 여성들이 겪는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생명을 경시하는 문란한 여성들이 잘못’이라는 등의 발언을 일삼았다.

 

이렇게 식약처가 주최한 공청회는 애초에 피임약을 복용하는 당사자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 2012년 7월 <여성의 결정권과 건강권 측면에서 본 피임약 재분류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단체들은 피임약 복용 당사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아내기 위해 ‘여성의 결정권과 건강권을 위한 피임약 정책 촉구 긴급행동’을 결성했다. 2012년 7월 4일에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공동으로 <피임약 재분류, 왜 ‘여성’이 결정의 주체여야 하는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피임과 임신,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경제적 부담 등 여성의 생애 전반과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피임약 재분류안에 대한 이야기를 확산시키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여성들의 현실에서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일은 구입의 용이함 문제를 넘어선다. 비혼의 젊은 여성이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 약을 처방받는 과정에서 의사와 약사에게 듣게 되는 불쾌한 질문, 사회․경제적 이유로 피임약 접근성이 취약한 여성들에 대한 고려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의료전문가들은 ‘접근성’의 문제를 단순히 약국과 병원이라는 의료기관의 선택 문제로 논의를 축소시켰다.

 

사회적 합의 이룬다더니, 또 일방적 통고할 건가

 

당시 피임약을 둘러싼 논의를 보면 의료계의 입장과 식약처의 해명, 미디어의 논조 등 어디에서도 피임약 복용 당사자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 과정은 전문가들이 드는 근거가 대부분 해외 사례라는 것과, 한국 상황에서 구체적인 복용 실태와 부작용 등에 대한 조사가 그동안 부족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논란이 계속되자 2012년 8월, 정부는 3년간 피임약 재분류를 유예하고 재검토하기로 했다. 피임약에 대한 부작용 및 실태를 조사하고, 전문가 의견 수렴을 통해 사회적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식약처는 의약품안전관리원에 위탁하여 피임약 실태조사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작년 12월 연구용역이 마무리되어 식약처에 연구 결과를 최종 보고했다.

 

그런데 현재까지 연구 내용은 전혀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결과 발표일도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재분류안의 발표가 곧 나올 것이란 기사만 반복될 뿐, 최근까지 어떠한 정보도 유통되고 있지 않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조사였고, 논의 과정을 갖기 위한 시간유예였음에도 불구하고 식약처는 연구 결과를 아직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하고 있다. 또 다시 일방적인 재분류안 발표로 논의를 피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피임약 재분류 유예 3년, 꼭 반영돼야 할 논의


▶ 경구피임약,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고 여성의 의료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한 1인시위. (2012년 7월)  ⓒ민우회


피임약에 대한 언론 보도들은 최근까지도 전문가들의 영역 안에서 피임약 “오남용 위험성”이 강조되거나, “청소년의 성문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피임약의 오·남용 문제는 충분한 복약 지도와 시스템의 보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의약품의 재분류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여성들이 피임약을 처방 받더라도 그 이후의 복용 경험을 의사나 약사와 상담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피임약 복용 전후의 이야기가 모이는 창구가 마련되지 않는 한, 막연한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이 조장될 뿐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피임에 대해 ‘무지한 여성’들의 오·남용 문제로만 회자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피임약 복용을 선택하는 당사자들의 이야기이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신체와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여성의 성적 주체로서의 권리, 건강과 삶에 대한 종합적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피임약 재분류 유예 이후 3년, 올해 피임약 재분류 논의가 단순화된 ‘안정성’과 ‘접근성’의 문제로만 이야기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의 경험으로 피임(약)에 대해 말하고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정책을 제안한다. 첫째, 여성들 스스로 피임약 복용에 대해 최소한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둘째, 약제의 특성과 부작용, 피임약을 복용하는 개인들에 따라 다른 위험 요소 등을 고려해 철저한 복약 지도를 현실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피임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과 실천,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문화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한다. 넷째, 임신과 출산에 관한 부담과 책임이 여성들에게만 전가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쎄러/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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