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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끼리 뭐해요?”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② 세 여자의 동거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여자 셋의 동거, 실상과 상상 사이
동생과 함께 자취한 지 칠 년째다. 둘이 산다는 것은 심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혼자 사는 것보단 낫지만, 월세를 올려 달라는 주인집의 급작스러운 요구를 감당해야 할 때는 두 사람이 힘을 합해도 충분치가 않다. 그것이 계기가 돼 올해 동거인을 한 명 더 들였다. 마침 혼자 살 방을 구하고 있던 동거인의 욕구와 내가 사는 집의 월세 인상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여자 셋이 살게 됐다.
셋이 되고 보니, 방이 두 개인 집을 나눠 쓰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같이 살아볼만한 이점이 꽤 많다. ‘십 분 안에 안 돌아오면 경찰에 신고하라’는 씁쓸한 너스레를 떨 필요 없이, 심야의 편의점에도 2인 1조로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월세살이의 가계 부담과 가사 노동 책임을 세 사람이 분담하면서 전에 비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동거인은 내 애인이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이 절감되는 등 나의 연애생활 역시 득을 보고 있다.
▶ 나와 동생과 내 애인, 세 동거인의 찻잔. ⓒ 견과류
그런데 우리의 동거를 바라보는 일부의 생각은 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동거의 당사자인 우리 세 사람이 만족해하는 실상을 존중하기보다는 ‘이 빠진 그릇’ 보듯 어딘지 모자란 상상을 덧씌우려고 한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내가 추천한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간 애인은 ‘누구 소개로 왔느냐’는 호구 조사를 당하다가 나와 한집에 살게 됐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단골손님인 동생과 나를 아는 미용실 원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 없이 여자끼리 살아서 뭐해요. 하긴,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참 슬프죠?”
치솟기만 하는 서울의 집값과 출퇴근 거리를 고려했을 때 이 동거가 합리적인 선택이며, 살아 보니 여러모로 잘 맞아서 좋더라고 열심히 대답했음에도, 끝내 안타까워하는 미용실 원장님 앞에서 애인은 웃어주고 말았다고 했다.
아마 나라도 그 순간에는 웃고 말았을 듯하다. 웃자고 하는 저런 말 한마디쯤 의식하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며, 굳이 정색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이 마뜩찮은 시선으로 본다 해도 내 인생이고, 내가 만족하면 장땡이거든? 내 그릇에 밥 담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 없거든?’ 묵언수행하며 속으로만 외쳐왔다고 할까.
말해지지 않는 이 떳떳함은 겨우 나 한 사람만의 정신승리에 기여할 뿐이다. ‘그것도 성차별인데요’ 라는 반박을 삼키는 사이 “여자끼리 뭐하냐”는 농담은 겹겹이 쌓여 실제로 뭣도 못하게 만드는 진담이 돼, 한데 모여 뭔가 해보려는 여성 개개인의 시도를 위축시키기도 한다. 그런 진담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나름의 떳떳함마저 의심하게 되기 십상이다.
남자 없으면 ‘미완의 존재’로 취급되는 세계
친구 L은 내게 비슷한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L은 초등학교 교사로 올해 서른이 됐다. 동년배 교사 중에는 더러 결혼한 사람도 있지만, L은 아직 결혼에 관심이 없고 결혼을 가정해볼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있지도 않다. L의 결혼 유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쪽은 당사자인 L 자신보다도 주변 사람들이다. 한 번은 아는 교사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선배 교사에게 하게 됐는데, 이렇게 묻더란다.
“거기, 남자 있어요?”
“한 분이요. 나머지는 다 여자분들이고요.”
“왜 해요? 여자끼리 해서 뭣하게?”
여자만 드글드글한 모임에 나가서는 결혼할 남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선배 교사가 하는 말의 요지였다. 독서모임이라고 강조했음에도, 선배 교사는 시간 낭비라는 식으로 일축했던 모양이다. L은 남자가 많은 모임을 찾아 봐야겠다며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화제를 바꿨다고 했다. 얘길 다 듣자마자 별꼴 다 보겠다고 열을 내는 내 앞에서 L도 덩달아 투덜거렸지만, 여전히 개운치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이상한 걸까?”
너는 이상하지 않다고, 선배 교사 같은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나는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솔직히 한편으로는 내 말이 얼마나 약하게 느껴지던지. 각자 알아서 정신승리한 뒤에는 다시 그런 선배 교사를 마주치는 세계에서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외롭고 막막하던지.
▶ 한 맥주회사 TV 광고. 미디어에서 남자들의 술자리는 찐~한 우정으로 묘사되곤 한다.
물론 이 세계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떠든다. 그만큼의 발전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 남자들의 술자리를 찐~한 우정의 표상으로 보는 반면, 여자들 다수로 구성된 모임을 향해서 ‘여자끼리 뭐하냐’는 질문이 돌아오는 세계이다. 복수의 여성이 모여 사는 삶을 여분 내지는 미완의 것으로 취급하는 이곳에서, 여성 개인으로 바로 서는 일은 더욱이 쉽지 않다.
뭐하긴요, 잘 먹고 잘 살려는 거지!
“그래서 나는 결혼하는 것도 이해가 돼.”
이건 내 동생의 얘기다. 지난 설 연휴 중에 동생은 친구들을 만났다. 대입을 계기로 스무 살부터 죽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동생을 빼고는 모두 고향에서 자리 잡고 사는 친구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다른 친구들 역시 결혼과 육아에 대한 저마다의 계획을 줄줄이 꺼내 놓았다. 동생은 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보다 또래 친구들이 결혼과 육아를 적극적으로 욕망한다는 점에 놀랐다. 결혼과 육아로 인해 직업이나 건강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자, 친구들은 그런 미래를 예상하지만 감수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역 차이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나의 단순무식한 의문에,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원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는 불가피한 계기가 없이 한집에서 살아온 친구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개인으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조건에서 살아왔다면 서울에 사는 여성이라고 다르겠냐는 것이다.
동생은 한 친구의 얘기를 들려줬다.
“나도 결혼 생각 없었어. 근데 가족들 사이에서도, 직장에서도, 나는 어른으로 대하질 않아. 어린 여자애로만 보는 것 같고. 요즘에는 수시로 결혼 안 하냐고 언제 하냐고 물어보는데 이젠 지쳐서 빨리 결혼해버리고 싶다니까.”
▶ 여성들의 자립을 다룬 영화 <카모메 식당>(오기가미 나오코, 2007)의 한 장면
여성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삶의 형태가 곧 ‘결혼’이라고 여기도록 만들어진 세계에서, 동생의 친구에게 결혼은 거의 유일한 독립의 방법이다. 내가 동거를 선택했듯, 살기 위해 결혼이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한 셈이다. 그런 선택이기에, 나는 결혼과 동거와 독서모임이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개개인에게 실제로 주어지는 사회적 자원이 적고 그조차도 편파적인 데다가 선택지가 결코 다양하지 않은 이곳에서, 너무도 달라 보이는 결혼과 동거와 독서모임을 선택한 각자의 목적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다.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때문에 웃으랍시고 하는 농담에 의해, 인생의 선택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는 시선에 의해, 특정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지 않는 제도에 의해 행복이 좌절되는 상황에서는, 같은 일을 겪은 여성으로서 더 이상 삼키지 말고 한 목소리를 내도 좋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라고.
‘여자끼리 뭐하느냐’는 질문에 이와 같이 반문할 때, 서로의 옆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는 여성의 자원이고 내 삶을 반영하는 모델이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모여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불행은 비로소 성차별이라고 불리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계가 하지 않는 질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여성으로 살아가기, 지난날과 다른 상상으로!
요즘 나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여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릴레이 달리기 하듯 이어가면서 친해졌다. 그 속에는 차별의 경험도, 폭력의 경험도 있었다. 관계 속에서도, 사회생활 중에도 우리는 참 힘들었구나 싶었다.
▶ 콩 반쪽도 나누는 행복이라 했던가. 동거인들과 나눠먹은 한라봉. ⓒ 견과류
상처 입은 삶의 일면을 드러낸다고 해서 이미 겪은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쉽게 나아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도, 덜 된 어른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 세계에서 혼자 좌절하기 전에,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당장 만나지 못하는 대신 단톡방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단톡방에서는 그날 읽은 책의 한 구절이나 같이 보고 싶은 기사를 공유하는 친구도 있고, 불행한 하루의 우여곡절을 풀어 놓고 위로를 구하는 친구도 있고, 자다 깨서 방금 무슨 꿈을 꿨다고 툭 던지는 친구도 있고, 뭔가를 하자고 의욕적으로 조르는 친구도 있고, 뜬금없이 긴 편지를 쓰는 친구도 있다.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것이 저마다의 이야기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안다는 느낌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견고해 보였던 “여자끼리 뭐해요?”라는 시선의 벽이 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무엇이라고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이 모임에서 나는 설명을 들을수록 어렵게 다가오기만 하던 여성주의를 몸소 깨치는 기분이다.
지금 단톡방에서 ‘다음 모임은 지난날의 상처를 애도하고 떠나보내는 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자’며 갖은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는데 벌써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기대된다. 이제 우리는 나란히 서서 오래 달리기 하는 사람들 같다. 나 말고 누구라도 오래오래 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남자랑 살아야 한다면서 이따금 결혼하지 말라고 한탄하는 두 아이의 엄마인 미용실 원장님도, 여자끼리의 모임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L의 선배 교사도, 어른으로 인정받길 원하는 동생의 친구도. 그들 모두가 지난날과는 다른 상상으로 여성들의 실상을 기대하고 채워갈 수 있길, 나는 상상해 본다. ▣ 견과류/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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