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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난다면 ‘나’는?

‘움직이는’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in 은평



만약 당신이 사는 곳 옆 빌라에서 매일 밤 부부 간에 고성이 오가고 뭔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나 흐느낌이 들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잠을 잘 수 없어서 짜증이 날 테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웃이 걱정되기도 할 것이다. 어느 날은 용기 내어 신고를 했는데, 경찰에게 당사자 부부가 한다는 말은 “좀 크게 싸운 것뿐이에요.”

 

이것 참, 도와주려 했는데 속상하다. 그 여성이 안전하기를 기도하면서 잠드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직장에서 매년 받는 폭력예방교육도 이럴 땐 별로 쓸모가 없다. 슈퍼 주인 아주머니한테 슬쩍 얘길 꺼내보니 남의 집 일에 끼어들어서 괜히 피 보지 말란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혹시 낮에 집 앞 슈퍼에서 그 집 남편이나 부인, 혹은 아이와 마주친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부에서는 가정폭력을 4대 악(惡)의 하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근절을 선포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이웃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사실 우리는 대책도 고민도 별로 없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가정폭력 해결하기

 

가정폭력은 이웃들의 침묵과 무관심 속에서 완성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웃이 그건 ‘남의 일’이고 ‘다른 집안 일’이니까 끼어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침묵할 때 가정폭력은 은폐된다. 하지만 이웃이 침묵하지 않고 해결을 도모한다면 다른 국면이 찾아올 수 있다.


▶ 은평구 청년모임 ‘움직이는’ 워크숍.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추진한 <가정폭력 근절을 위한 움직이는 마을 모델 만들기> 프로젝트(이하 ‘움직이는’ 프로젝트)는 바로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탄생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정폭력을 알아채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하자’는 것.

 

지역 사회에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네트워크가 구성돼있긴 하지만 주로 ‘아동성폭력’ 사안에 치중하고 있다. 가정폭력 방지를 위한 법이나 제도들은 어느 정도 갖춰졌지만, 정작 현실에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마을’로 눈을 돌려야 해결할 수 있다는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움직이는’ 프로젝트는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시 은평구에서 펼쳐졌다. 마을에서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들을 모아 기획팀을 꾸렸다. 교사, 경찰관, 교회에 다니는 주민들, 지역아동센터 교사, 구청 주무관, 통반장, 부녀회장, 소방관 등. 3년간 다양한 마을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동안 가정폭력 사건을 처리하면서 겪었던 고충을 나누기도 했고 ‘무엇이 폭력인가’를 놓고 기획위원들이 갑론을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역량과 방식을 토대로 마을 주민들의 워크숍 자리를 만들었다. ‘움직이는’ 워크숍으로 3년 동안 은평구 주민 1천여 명을 만났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한국여성의전화는 생명보험교육문화센터에서 <여성안전정책 ‘보호’를 넘어 마을을 움직여라> 토론회를 열고 3년간의 여정을 보고했다. 


▶ 구파발성당에서 진행된 ‘움직이는’ 워크숍 첫번째.   ⓒ한국여성의전화

 

기획위원으로 활동한 방데레사 씨는 자신이 다니는 구파발 성당에서 교인들을 모아 워크숍을 열었을 때의 기쁨을 전했다.

 

“성당에서 아이들과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집에서 맞거나 억압당한 얘기를 하곤 했어요. 또 교인 중에 가정폭력 피해자도 있었고요. 가정폭력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움직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 큰 수녀님께 제안을 드렸죠. 성당의 구역장, 반장들이 움직여서 교인 150명을 모아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주로 여성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내놓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움직이는’ 워크숍은 일방적으로 교육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자리였다.

 

“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스스로 깨닫는 것이고, 그런 장을 마련해 주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거죠. 그동안 한 번도 아무도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고 교리만 가르쳤는데 그건 설득력이 없었어요.” (방데레사/기획위원)

 

‘움직이는’ 워크숍 기획위원들을 만나 인터뷰한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위에서 답이 내려오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가정폭력 사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했으면 좋았을 일, 못해서 아쉬운 일, 할 수 없었던 이유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학교나 직장에서 받던 폭력예방교육과는 질적으로 다른 셈이다.

 

구파발 성당에서 이뤄진 ‘움직이는’ 워크숍의 경우, 성당 안에 가정폭력 안내책자를 비치하고 가정폭력상담 전화번호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는 실천으로도 이어졌다.

 

마을에 ‘공론장’이 펼쳐지다

 

또 은평구약사회와 접속해 약사들이 모이는 워크숍을 열었다. 약사회는 약봉투를 활용해 가정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고지하는 캠페인을 기획했다. “나와 이웃에게 힘을 주는 처방전” 약봉투에는 이웃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들이 적혀있다. 은평구약사회는 이 약봉투를 3만개 제작해서 관내 198개 약국에 배포했다.


▶ 은평구약사회가 3만장 제작해 198개 약국에 배포한 [나와 이웃에 힘을 주는 처방전] 약봉투. 

‘옆집의 고성에 이웃이 대처하는 방법’과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안내가 담겼다.  ⓒ한국여성의전화

 

서경남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은 “심택사라는 사찰의 법당에서 신도들과 모여서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서북병원 병동팀장(수간호사) 20명과 함께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지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새마을 부녀회, 전의경 어머니회, 의용소방대, 통장, 반장 등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고 보고했다.

 

그중에는 여전히 가정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주민도 있었고, 가정폭력 해결 방법을 찾고 싶은 열망을 가진 주민도 있었다.

 

“엄마들도 성교육이라든지 가정폭력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우리들끼리만 수다 떠는 거죠. ‘어우 그 엄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런 얘기만 하고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어떤, ‘어떤 식으로 해야 되지?’ 이런 거에 대해서는 얘기를 못한 채, ‘어우, 그 집이 그렇대?’ 그러고서는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에서 이런 얘기들이 공론화될 필요가 있어요.” (이신애/ 기획위원)

 

해결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했던 마을 주민들과 ‘움직이는’ 프로젝트가 만났다. 이제 마을에는 가정폭력에 관한 ‘공론장’이 열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처벌을 강화하는 정부의 4대악(惡) 근절 정책이라든지, 도시디자인 설계나 지역 방범에 집중하고 있는 서울시의 안전마을 사업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일이다.

 

폭력을 내 문제로 여길 때 마을이 변한다

 

그러나 ‘움직이는’ 프로젝트 앞에는 공론장을 연 것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깊고 섬세한 논의를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다.

 

김홍미리씨는 ‘움직이는’ 프로젝트가 현재 “마을에서 폭력 감수성은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채 폭력에 대한 말들만 흔하게 회자되는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다고 진단했다. “폭력을 ‘침묵’으로 반응하는 것에서 폭력을 ‘감시’로 반응하는 것으로 이동한 것뿐일 수 있다”는 우려 지점도 지적했다.

 

침묵과 감시, 이 두 가지는 “우리 집은, 나는, 아니니까”라고 하면서 폭력을 나 자신의 문제로 가져오지 않는 태도이다. 폭력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돌려 가해자만 배척해 버린다면 마을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또 우리는 마을에서 가해자, 피해자와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한다. 폭력은 잘못된 것이고, 그래서 용기내서 가해자를 신고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신고는 사건의 시작이자 과정일 뿐이다. 할 수 있는 더 많은 일들이 발견돼야 한다.

 

“마을에서 어떤 사건이 회자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사건과 연루된 많은 사람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때 자신을 안전한 ‘판단자’의 위치에 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그 모든 것들과 연결돼 있는 ‘당사자의 위치’에 둘 것인가. 마을로 갈수록 폭력을 말하는 것이 복잡해진다. 이런 말하기의 ‘복잡성’이 마을에서 폭력이 더 갑론을박되어야 하는 이유고 마을에서만 그런 삶의 대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김홍미리)

 

이러한 심도 깊은 고민과 과제는 ‘움직이는’ 프로젝트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나랑 기자/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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