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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전, 군인이 되고 싶었던 여자아이

<내 목소리를 들어라> 2탄. 말자의 이야기



성매매를 하는, 그 중에서 성을 파는 사람은 젊고 화려한 20-30대 여성으로 상상된다. 하지만 성매매 현장에는 언제나 노년의 여성들이 있었다. 수십 년 세월을 “가정동네”가 아닌 “이런 거 하는 동네”에서 흘려 보냈음에도, 이들의 경험은 성매매 논의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의 활동가들은 60-70대의, 성판매를 하고 있거나 쉬고 있는 세 명의 여성을 만났다. 이분들은 서로 다른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고 생활해왔다. 세분께 당신들의 일과 삶, 그리고 동네 이야기를 청했다. 이 기록들이 노년의 성판매 여성들의 삶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다음은 74세의 말자(가명) 언니 이야기이다.

 

-언니 어렸을 적 얘기 좀 들려주세요. 어떤 아이였는지.

 

“내가 중학교 때 뭘 했냐면 옛날에는 재봉이라고 했어. 디자이너가 아니고, 재봉. 미싱도 배우고 옷도 만들고. 그거 하느라고 나는 고등학교 안 간다고 하니까, 담임이 수업시간이 됐는데 막 소리를 지르고 들어와서는 내 손을 확 잡고 질질 끌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박는 거야. 그래가지고 3일 남겨놓고 여자고등학교 원서를 넣었어. 그래서 꼴찌로 붙었어.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간 거야.

 

고등학교 1학년 때 ‘에라, 간호장교나 가야 되겠다’ 해가지고 병무청에 시험을 보러 갔는데 거기에서 작은오빠 친구가 딱 붙잡더니 ‘너 왜 여기 있냐?’ 그러길래 그냥 심심해서 왔다고. 그래가지고 말이 들어간 거야. 역에서 탁 붙들려 갖고 그것도 못 갔어. 여군을 못 간 거야. 그때부터 공부도 안하고 아프다고 학교 안 가버리고 시험을 아예 안 봤지. 그때 여군 가는 사람들이 없었어. 지금에나 있지. 군인이 뭐야, 여자가. 그랬었지.”

 

-결혼한 적이 있으시잖아요,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어요?

 

▲ 말자 언니의 욕실. 언니는 세면대를 쓰지 않는다. 샤워호스는 아래 대야를 향해 고정되어 있다.  © 이룸


“결혼(생활)을 3년이나 했나? 결혼도 좋아서 한 게 아니고. 남자한테 잽혀갖고. 그냥 그 남자에 잽혀갖고. 우리 집 옆에 집을 새로 짓는데, 거기서 남편이 그 집을 짓는 일을 했어. 낮에 집 짓고 밤에는 이불만 갖다 놓고 거기서 자고. 그러다 거기서 일종의 몸을 뺏긴 거지. 그래서 내 생각에 남자하고 이래되면 애를 밴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에 굉장히 아팠지. 근데 뭐 피 나온 것도 없고 하니까 내가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던가 봐. 나 이거 처음이라고 그랬지.

 

우리 아버지가 한량이라서 각시가 다섯이었어. 아버지가 둘이고 엄마가 다섯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어느 엄마의 자식인지, 어느 아버지 자식인가를 모르는 거야. 우리 엄마가 다섯 명 중에 하나고 첩일 거라고 생각을 하고, 항상 어릴 때부터 몸에 대해서 내가 굉장히 중요시 한 거야. 그래서 ‘우리 엄마가 어디서 뭘 할망정 엄마 욕은 안 먹게 해야겠다’ 해가지고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간 거야.”

 

-그 남자와 결혼 생활은 어땠는지,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시집 간 날부터 남편은 안 들어오고, 그러고는 이혼 안 해준다고 이삼 일이 멀다고 맞은 거야. 이혼을 안 해준다고 그렇게 때리는 거지. 툭 한 대 치고, 툭 치고. 어느 땐 여기가 퍼래. 가슴을 툭툭 쳐 갖고. 자다가 한 대 때리면 속에 이만한 혹이 팍 생기고. 키가 185가 넘고, 역도를 해가지고 팔 하나가 절의 기둥 같았어. 미스터코리아 하려고 했다가 집에서 너무 완고하니깐 못 나갔다 하더라고.

 

술 먹으면 밤에 내 목을 쭉 들어다 머리통을 벽에다 에밀레종 치듯이 거기다 치면 나는 발버둥 치고. 운명이 그랬어. 시어머니는 나한테 ‘죽어도 너는 이혼 못한다. 이혼 해주지 마라. 우리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진 이혼 못한다.’ 그러는 거야. 남편은 이혼 안 해준다고 때려 패고. 결국 몰래 시부모한테는 말 안하고 서류에 이름 쓰라는 대로 이름 썼지. 써서 갖다 내니까 이혼이 된 거지.”

 

-언니 이혼 후에 줄곧 혼자 살아오신 걸로 아는데, 이혼하고 나서 어땠어요?

 

“이혼하고 나니까 너무 좋은 거야. 세상이 다 뭐, 애기 생각도 없고. 얼마 동안 너무 좋은 거야. 한 번은 애를 보러 갔어. 애를 두세 번 봤나. 애만 보고 오면은 천장만 바라보는 거야. 물만 마시고, 배도 고픈지도 모르고. 나는 그 놈 나쁜 놈이야, 죽일 놈이야 어쩌고 막 그러고 싶지가 않애. 그 애들 있는 거, 애들 봐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지. 생전 나쁜 생각을 안 해봤어, 그 이혼한 남자한테. 세상에 이런 놈도 있구나, 그냥 이러고 말은 거야. 내 팔자려니 생각하고.”

 

-그리고는 바로 클럽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이혼하고는 서울 오빠네로 올라와 있었지. 택시를 타고는 명동 얘기는 들어본 적 있으니까 ‘나 명동에다 내려달라’ 해가지고 딱 둘러봤는데, 여기 보고 저기 보고 좋아서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어. 오빠가 돈을 대줘서 원효로에 하숙을 하나 치고, 원효로에서 명동만 다니면서 거기서만 왔다 갔다 하고 술도 먹고 놀고 했어. 통금이 있으니까 12시 딱 되면 집에 가는 거야. 택시 타고.

 

그렇게 살다가 동네에 사는 동창을 우연히 만났어. 걔가 ‘너 놀지 말고 클럽에서 일을 해’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런 거 안 한다. 놓고 나온 자식이 성장해서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 연결연결 가지고 만약에 알게 되면 지장 있을까 봐 안 한다’ 그랬지. 그랬더니 외국사람들만 오는 클럽이 있대. 한국사람들 안 들어오니까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그래 볼까 해가지고는 나온 거야. 거기 바에서 일을 시작한 거야. 내가 아마 서른이 안 됐을 거야. 거기는 테이블이 25개쯤 있었어. 손님이 오라면 가서 술도 같이 마셔주고 얘기해주고 춤도 춰주고. 하여튼 그런 일을 했어.”

 

-그 당시는 거리에서 외국인들을 흔히 볼 수 없었던 시대죠. 그런데 외국인 클럽에서 일하는 게 무섭지 않았어요?

 

“나는 일하면서는 무서울 게 하나도 없고, 싸우기도 많이 했어. 시집가서 남자한테 사흘을 멀다 하고 맞다가 나와 갖고, 이제 나 자신도 모르게 (남자에 대한) 보복이 되는 거야. 그래가지고 무서운 게 없어. 아무것도 무섭지가 않아. 내 저 아프리카 놈들 열한 명하고도 싸워봤다니까?

 

원래 여기는 검은 애들이랑 흰 애들이랑 들어오는 클럽이 달라. 딱 구역이 나눠져 있어. 그런데 어쩌다 한 번은 어떻게 검은 애가 들어왔는데, 아주 새카맣지는 않고 약간 검어. 아가씨하고 술을 먹고는 술값 때문에 문제가 있었어. 그 놈이 가서 지 친구들을 다 합해가지고 와가지고 나하고 싸우게 된 거야. 모르는 영어로 쒸알거리면서 내가 싸우는데. 근데 걔네들한테 약하게 보이면 안 돼. 양놈들한테. 강하게 보여야 돼. 내가 눈썹 붙이고 체격도 있고 해가지고, 또 성질 나면 눈에서 불이 난대. 애들이 나한테 ‘언니, 화낼 때는 정말 무서워, 정말 무서워’ 그러는 거야.”


▲  말자 언니는 인터뷰 하던 날 핸드폰을 새로 사셨다. 스마트폰에 익숙치 않으셔서 한참동안 전화를 받지도 못하셨다. 지금 스마트폰 터치법을 배우시는 중.  © 이룸


-그럼 언니는 클럽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주인으로도 일하고, 그런 거네요?

 

“처음엔 종업원(말자 언니는 당시 외국인 클럽에서 술을 접대하는 일을 했고 성매매를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으로 일하다가, 그 클럽을 인제 인수해서 장사를 한 거지. 아가씨가 먹는 술을 반잔이라고 해. 주인하고 반 떼기를 허걸랑. 예를 들어 만 원짜리 먹으면 오천 원씩 갖고, 이만 원짜리 먹으면 만 원 먹고. 그때 이 지역에 전부 술이 이천 원이고, 따블은 사천 원이었어. 그런데 내가 ‘절대 그 가격에 먹지 마라. 한잔에 육천 원, 따블은 만 이천 원이면 먹어라. 이제부터 손님한테 가격을 올려 갖고 생활을 하자’ 했어.

 

따블은 뭐냐면, 처음에는 상황 봐서 말 않고 먹고 그냥 얘기를 하다가 아, 이게 나한테 휠이 꽂힌 거 같으면 ‘아 워너 드링크 따블, 오케이?’ 이런 거야. 술 양은 똑같아. 그러면 이 남자 애가 내가 맘에 들고 오늘 저녁에 꼬시가야 되겠다 하면 돈을 쓰는 거야. 그게 따블인 거야. 그렇게 육천 원짜리, 따블 만 이천 원짜리 술 팔다 보니까, 이것도 마음에 안 차. 그래서 가짜 디오르 잔을 사가지고 우롱차하고 꼬냑하고 섞어서 색깔을 내. 그래서 한잔에 만원씩에 팔은 거야. 따블 이만 원이지. 우리 가게서 일하는 애들은 신이 났지.

 

그리고 잔 속에 얼음 두세 덩어리 넣어. 그럼 술이 조금 남아있을 때 따르륵 소리가 나. 얼음 소리만. 그럼 ‘야 너 잔 비었어’ 하고 가서 술 따르는 거지. 그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서, 손님한테 귀신이라고 마피아라고 별명이 났다니까. 사람들이 술을 빨리 빨리 안 마시면 ‘아엠 쏘 썰스티’ 하고 아가씨 꺼 (내가) 먹어버려. 그런 다음에 ‘오케이~ 에브리바디 원 모 드링크?’ 하면 사람들이 아주 재밌어 하는 거야.”

 

-장사 수완이 참 좋으셨네, 다른 집보다 비싸게 파는 데도 손님들이 와서 사준단 말이죠?

 

“사주지. 다 사주지. 왜냐면 (우리 클럽은) 군바리 안 받았어. 소령 받고 그 위에만 받았지. 쫄타 안 받지. 일한 애들이 다 인물이 좋았어. 우리 집은 굵은 손님 아니면 안 받는다고 소문났었어. ‘너 호텔 몇 호에 묵고 있냐’ 물어봐서 6년삼 있잖아. 그걸 갈아서 두 봉다리 딱 예쁘게 포장해 갖고 호텔에 맡겨.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대신 이걸 갖다 꿀에 섞어 먹으면 이게 잘 선다고 하면 남자애들이 혹하지. 이거만 잘 선다면 다들 눈이 커지는데.

 

그렇게 손님한테 서비스하고. 크리스마스 때 잠바를 미리 맞춰서 이름을 그 안에다 새겨서 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그러고 또 VIP 손님한테는 무슨 날이다 하면 메탈 핀에다가 금으로 18K로 해서 포장 딱해서 주면 다 넘어가는 거야. 또 아이디어를 뭘 냈냐면 ‘몇 십만 원 이상 먹으면 이 티켓 가지고 있으면 10%를 깎아주겠다’ 한 거야. VIP한테만 주지. 손님 많이 끌었어.

 

그리고 돈 냄새 나는 애가 있으면 내가 먼저 상스런 아이디어를 내. ‘야 우리 문 잠그고 더 좀 재밌게 놀자’ 해서 ‘내가 위에 벗으면 술 한 잔에 십 만 원짜리 사줄 수 있냐?’ 물어봐서 사준다고 하면 그러고 먹는 거여. 남자들은 들어와서 십오 분 이십 분 얌전히 있는 놈이 없어. 십 분 넘어 십오 분 되면 전부 또라이야. 미친놈이 돼버려. 돈은 엄청 벌었지. 근데 얼마 벌었는지도 몰라. 나는 돈 관리 안 했어. 다 그냥 맡겨버렸지.”

 

-이 동네에서 사십 년 넘게 사셨으니 동네 역사를 다 알고 계시겠네요, 클럽 풍경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나요?

 

“이 지역 돌아가는 수준이 옛날이랑 지금이랑 하늘과 땅이야. 그만큼 지금은 애들이 수준이 없다는 거지. 남자들이 들어오면 ‘뭐 마실래?’ 그러면 ‘나 뭐 마시겠다’ 이런 애들이 드물어. 바로 (손바닥을 짝짝 치면서) 이거를 해. 바로 이거를 원해. 그니까 클럽은 생겨도 거의 다, 열명 중에 아홉은 이거(성매매)야. 시스템이 그렇게 돼버린 거야. 옛날에는 밤새 같이 술 마셔도 이거 하자고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손님도 말하기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고, 우리 역시도 그걸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랬어. 이제는 시간당으로 물어보지. 한 번 하는 데 얼마, 또 한 시간 노는 데 얼마,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한 시간은 삼사십만 원은 달라고 하지. 근데 거의 다 한 시간씩 여자들이 안 하려고 그래. 싫증이 나고 힘드니까. 힘드니까. 다 여러 가지야. 어떤 놈들은 가슴을 좋아해 갖고 여기다가 문질러 싸는 놈도 있고. 또 입으로, 그거를 빨대라 불러. 브로잡이라 하는데, 빨대를 하는 애들도 있고. 뒤로도 하는 놈도 있고, 항문으로 하는 놈들도 있고. 거의 다 남자들이 원해. 다 해줄 수 있다고 하면 금액이 높지. 근데 많이 주려고 하지도 않아. 보통 한 번에 이십만 원. 그건 좀 수준이 높은 거야, 그래도. 십만 원, 십오만 원. 짭짭이들(이주노동자)은 오만 원이야.”

 

-언니는 거의 오십 대까지 가게 운영을 한 거네요. 그런데 이제 아가씨로 일하게 되었잖아요. 어땠어요? 자존심 상하지 않았는지…

 

▲  말자 언니 방의 해바라기.  © 이룸


“나도 처음엔 칵테일 만들고 술만 팔았지 이런 건(성매매) 전혀 몰랐어. 그 뒤에도 아가씨들 데리고 장사할 때도 나는 안 했고. 오십 될 때까지 나는 운영만 하지 그런 건 몰랐어. 내가 이 동네를 떴다가 다시 들어와 가지고 종업원 생활하면서 그때 이제야 알은 거지. 처음 아가씨로 했을 때 뭘 생각을 했냐면, 대통령 부인 생각을 한 거야. 대통령 부인도 그 남자한테 몸을 바쳐야지, 자식도 낳고 바쳐야지 사는 거잖아, 다만 나는 매일 남자를 바꾸는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한 거야. 내 몸을 팔면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야. 쌍말로 말해서 대통령 부인도 남편한테 몸을 파는데, 내가 이 판국에 돈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거지.

 

내가 허리만 나으면 다시 크럽에 가서 앉아있을라고 허는데. 크럽도 간판이 크럽이지, 전부 이거(성매매)야. 겉으로는 멀쩡해, 근데 속으로는 그렇게 돼있어. 방으로 가든가 모텔을 가든가 이거(손뼉 짝짝) 하러 가는 거야. 이 동네가 변했으니까 나도 이제 그렇게 일을 하는 거야. 근데 없어. 나한테 오는 놈 없어. 나이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젊은 놈한테 가지. 단골들은 지금 이십 년 넘은 게 두 마리밖에 없어. 내가 자꾸 이태원을 비웠기 때문에 다른 이렇게 멀쩡한 클럽들, 큰 클럽들 이런 데로 가지. 나 있던데 찾아가봤자 그 여자 시집가고 없다 이러지, 어디서 일한다 이렇게 안 가르쳐줘. 장사니까.”

 

-말자 언니는 살면서 만나고 연애한 남자는 없었어요?

 

“남자친구가 내가… 그 미군이 제이슨… 그 후론 없어. 많기는 많어. 이놈도 있고 저놈도 있고. 다 그냥 손님 친구야. 남자하고 자고 싶고 이거 허고 싶고 그런 거가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런 마음이 없어. 1년이고 2년이고 휴일 날 하루도 안 빼놓고 꽃 가져온 놈도 있었어도, 그냥 이거야. 내가 남자들을… 남자들을 내 발톱 끝에 때보다 못하게 여긴 거야.

 

한 번은 내가 누구랑 사주를 한번 봤는데 거기서 말한 거 기억이 하나 남어. 남자는 참~ 많대. 근데 나를 평생에 놓고 이렇게 나만 위하는 남자가 없대요. 근데 여자는 꼭 남자가 있어야 돼. 나는 지금이라도 또 쓸 만한 애 있고 같이 살자고 하면 살 거야. 왜냐. 야 봐봐, 등 긁을 때도 사람이 손톱으로 긁으니까 더 시원하지 이런 걸로 긁는 것보다. 그니까 너네들도 빨리 머시마들 하나씩 만들어. 야, 자다가 어디가 불편하거나 내가 물이 먹고 싶어 저기 뜨러 가야 될 때 이것도 못 가지러 갈 때는 그거 심부름해줄 놈이라도 있어야지.”

 

-언니 요즘 사는 얘기 들려주세요. 이 동네에 이웃이나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나요? 한창 일할 때 동료라든가.

 

“같이 일했던 애들은 별로 없어. 다 시집, 전부 유럽 쪽으로 시집갔지. 어렸을 때는 ‘사십 먹을 때까지 여기서 뭐 먹을 게 있다고 주워 먹고 살겠다고 여기서 있나, 저거 또라이 아니야, 미친 거 아니야’ 그랬어. 근데 내가 지금까지 여기에 있잖아. 이 동네에서 제일 천치고 보지기고 멍청이고 바보가 나라고 생각해. 순간에 ‘야 그 많은 빌딩을 다 날리고 내가 왜 이러고 홀로 거지같이 앉아있냐’ 생각이 들면 내가 딱 ‘가. 야, 가. 어제도 과거야’ 그래.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내가 현재 중요한 건 내 몸밖에 없어. 내가 고혈압, 갑상선, 위염, 장염, 지방간, 허리 디스크 이게 있어. 그리고 이렇게 혼자 계속 집에 테레비만 보고 이러면 밥맛도 없고 괜히 이것저것 씹어대는 거야. 그니까 건강이 더 안 좋아. 시간 있으면 밖에 나가서 왔다 갔다 허는 거 사람이라도 보고. 남대문이라도 가서 사람보고 가서 얘기하고 헛소리 벙벙하고 그러고 있다 오면은 몸도 인자 피곤허고, 그게 인자 운동도 되는 거야.”

 

말자 언니와 인터뷰를 마치고

 

처음 말자 언니를 만나게 된 날을 떠올려본다. 70대라는 정보를 가지고 병원 앞에서 만나기로 한 상황이었다. 어떤 할머니가 계시기에 다가가 아는 척을 하다가 그 분이 아니란 걸 알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앗, 저분이구나 싶은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로 솟아오를 기세로 웨이브를 추고 있는 앞머리와 함께. 그리고 속눈썹라인보다 살짝 위로 그려진 아이라인, 열손가락 파란 매니큐어가 언니의 첫인상이었다.

 

그렇다고 말자 언니가 도도한 깍쟁이 스타일인 것만은 아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하다가도 천연덕스럽게 녹음기를 엉덩이에 갖다 대고서 방귀를 뿡 뀌어다. 우리가 경악을 하며 깔깔거리자 다시 한 번 앙코르 방귀로 화답하는, 소탈한 성격의 인물이다.

 

“42년생. 칠십 사세래. 이제는 알아. 이제야 주민등록을 왼 거야. 주민등록도 안하고, 몇 살인지도 모르고 살았고. 왜 그리 바뻐. 그런 거 뭐 세고 이러고 살지를 않았다니까?”

 

언니는 자기 나이를 이야기할 때조차 남들이 그러더라는 식으로 말했다. 인터뷰 도중 그게 몇 살 때 이야기냐고 여쭈면, 오십인지 육십인지 모르겠으니 대충 계산해서 적으라 하신다. 그렇다고 언니의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는데,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얘기할 때 그 사람의 머리 결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사까지 줄줄 읊은 후에야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나’ 하실 법도 한데, 방대한 양의 이야기가 언제나 길을 잃는 법 없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곤 했다. 이런 분이 본인의 나이는 잊고 산다니, 말자 언니의 인생시계는 어떻게 굴러가는 것일까.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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