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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할까? 결혼할까?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모퉁이에서 책읽기” 마지막 회입니다. 2년간 꾸준히 소중한 글을 기록해주신 작가님과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다들 왜 결혼해서 살려고 하는 걸까?’

 

결혼해 사는 친구 집에 주말에 놀러갔다. 친구와 나는 얘기를 나눌 시간이 제대로 없었다. 아이가 둘인 친구는 집을 청소하고 낮잠에서 깬 아이를 어르고 똥 싼 아이를 씻기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밤에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나와 마주할 시간을 얻었다. 그동안 내 말상대가 되어준 이는 친구의 남편이었다. 그는 직장에서 잘나간다는 소리를 자랑삼아 하고 요즘 취미로 무얼 배우는지 이야기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내 형편을 짐짓 걱정했다가 편하게 쉬다 가라는 인사치레까지 해주었다.

 

정작 만나러 온 친구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갓 잠든 깜깜한 방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들어가 친구의 옆에 누웠을 때였다. 친구가 말했다.

 

“왜 결혼해서 살라고들 하는 걸까?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게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왜 결혼해 사는 게 보통의 삶이라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걸까? 여자들이 재생산 노동을 다 해야 하니까 그렇게 만드는 건가봐.”

 

말의 뜻을 바로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가 그랬다. 힘이 빠진 목소리 앞에서 나는 ‘이런 생활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공감했다. 청소를 할 때 그녀는 혼자였고 빨래를 갤 때도 아이들만 들러붙었고 똥 범벅이 된 아이를 씻길 때도 그랬다. 국을 끓이고 밥을 안칠 때 그녀의 남편은 책을 보고 있었으며, 그녀가 다리에 엉겨 붙는 아이들 때문에 성가셔 “애들 좀 봐!” 소리 칠 때 남편은 “이리 와봐.” 건성으로 한소리를 할 뿐이었다. 나는 덩달아 허겁지겁 빨래를 널고 어질러진 물건을 치우고 아이들 간식을 챙겼다.

 

가사 일을 같이 하지 않고 육아에서 면제된 사람, 그와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얼마나 모멸감을 느낄 일인가. ‘바깥에서 돈을 버는’ 아버지는 신문을 보고 ‘안에서 살림만 하는’ 어머니는 밥상을 차리는 풍경은 얼마나 일그러지고 비현실적인 모습인가. 결혼생활만큼 경제적 타산, 사회적 인정이 중심이 되어 끝없는 인내를 강요하는 제도도 별로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풍경으로 포장되지만, 소외감은 삼켜지며 서로에 대한 비난과 밑지고 있다는 열패감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가족에 대한 불평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며 쉬쉬 하게 되는 것이지만, 가족 구성원은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제 얼굴’이라고 뭉뚱그려 표현되는 말 자체가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발설을 막는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이다. 할 말을 참는 쪽은 대개 성별과 나이로 정해져 있다. 가족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쪽도 대부분 침묵당하는 이들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 이혼하는 이유


▲ <이혼해도 될까요?>(노하라 히로코, 자음과 모음, 2015)


‘왜 이혼했냐?’ 사람들은 쉽게 물어대지만 ‘왜 결혼했냐?’고는 잘 묻지 않는다. ‘이혼할 결심을 어떻게 했냐?’고 색다른 사건인 양 캐묻지만 ‘결혼생활을 왜 유지하는 거냐?’는 질문을 대뜸 받는 것은 생각조차 않는다. 그래서 여성들은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

 

질문을 언제나 받는 쪽이 되는 것, 똑같이 되물을 수는 없게 되는 것, 온힘을 다해 자신을 설명하고 방어해도 간단없이 편견의 시선에 놓이는 것, 결혼 제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은 그런 것이다.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혼을 하게 하는 이유와 결국 같은 것이다.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자원을 차지하는 데서 불평등한 위치에 있고, 일과 양육을 함께 하는 데 사회적 지원의 미비를 경험한다. 남자와의 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여성은 결핍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구태의연한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편견과 폭력의 대상이 된다.

 

결혼을 했느냐 하지 않았냐로 여성들을 구획지어 부르고 결혼 여부로 사회에 편입된 안전한 사람인지 가늠하려고 한다. 결혼은 불안정해지는 우리 삶에서 전시대의 박제화된 이데올로기가 되어가고 있다. 각자 경제적 생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절박한 때에 ‘결혼’의 분홍빛 환상은 억지를 쓰는 훈계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을 재생산하기 위해서건,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건, 양육을 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건, 낮아진 자존감을 벌충하기 위해서건,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 속에서 결혼은 유지된다. 그리고 유지되는 결혼은 묵묵하다. 침을 뱉고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 제도 안에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 가족’으로 비춰지게 한다.

 

사실은 ‘우리 가족’이 있어서 타인이 생겨난다. 그 타인에게 자신의 결혼이 아름답게 비춰지길 바란다. 자기보다 불행하게 사는 듯한 사람을 보면 자기 선택을 자화자찬하고, 자기보다 잘사는 듯한 사람을 보면 똑같은 밑천 가지고 자신은 왜 이것밖에 선택 못 했냐고 속 끓이기도 하며, 자신과 같은 조건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급기야 차별한다.

 

남들에게 평범하게 보이는 자신의 일상이 마음을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해야지, 금 밖에서 혼자 살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불행의 독백은 거기에서 멈춘다.

 

다른 자리에서 같은 독백을 하는 여성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찢긴 자리에서 질문이 생겨난다. “이혼해도 될까?” 어쩌면 ‘이혼’이라는 것이 그나마 탈출구로 여겨져 체증에 손가락을 따듯 묻고 또 묻는지 몰라도, 누가 대답할까. 이곳과 저곳이 다른 곳이라고. “후회할까?” 가난과 차별과 배제가 그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라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했던 두려움과 불안이 결혼 제도에서 벗어난 그 어느 길에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것이 무엇인지 직시하면 환상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더 없겠지. 남이 가르쳐준 말로 자신의 고통을 재단하며, 왜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으니까. 아프면 안 된다고, 남들은 괜찮다는데 너만 왜 아프다는 거냐고 채찍질하는 것만큼 안쓰러운 것은 없으니까.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 비혼이니 결혼이니 이혼이니 하는 말로 사람을 규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외롭지만 정직한 자리다. 사랑받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자리지만, 그 자리에서는 세상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가동하는 차별의 지점이 선명히 보인다.

 

▲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마스다 미리, 이봄, 2012)


노하라 히로코의 <이혼해도 될까요?>를 읽으며 나는 마스다 미리의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떠올렸다.

 

슈퍼마켓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시호는 퇴근한 남편에게 ‘파트타임 말고 제대로 일을 하라’는 폭언을 듣고 ‘내가 좀 제대로 된 일로 돈을 벌고 있다면 진작에 결심했을 걸’이라고 빨래를 개며 속으로 생각한다. 카페에서 일하는 수짱은 13년째 연애도 하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하루하루 이따위 말만 하면서’ 의지할 데 없이 나이가 드는 것을 불안해한다.

 

시호는 남편한테 맞고 불안에 떨면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탈출인데’ 고민하다가 아이들을 안고 다시 집에 머물게 되면서 ‘앞으로 몇 년이나 참아야만 하나요?’ ‘얼굴에는 미소, 마음속은 통곡’을 한다. 수짱은 마음에 두었던 상사가 카페의 다른 여직원과 결혼하게 되는 것을 부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면서, 언제까지 카페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어야 하는지 한숨을 쉰다.

 

시호는 ‘사람은 간단히 변하지 않아. 언젠가 반드시 이혼할 수 있기를’ 가족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에 별을 보고 속으로 기도하고, 수짱은 ‘결혼하지 않고 나이가 들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결혼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해야만 할까?’ 거듭 되뇐다.

 

결혼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지, 결혼 속에서 자신의 일을 지킬 수 있을지, 결혼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나이 들 수 있는지, 결혼 속에서 모멸을 겪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 결혼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지, 결혼 속에서 두렵지 않을 수 있을지, 시호와 수짱은 다른 자리에서 같은 독백을 한다.

 

누군가는 더 가진 것 같고 누군가는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 그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수퍼마켓에서 카펫에서 머리 숙여 일하고 일터에서나 집에서 편견에 찬 말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이 고일 때마다 벌떡 일어나 목욕을 하고 울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여자들이다.

 

이곳이 아닌 저곳의 가능성을 그려보는 질문들에, 굳이 너와 내가 다르다고 선 긋는 것은 가혹할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게 살고 있지만 너와 나는 또한 충분히 닮았다고, 시호와 수짱도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면 외딴 격려를 나눌지 모른다.  안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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