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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백만 원’을 넘어선 질문
<모퉁이에서 책읽기> 비정규 사회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 기업만 살았다

 

길에서 두 여자가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걱정이 돼. 직장에서 경력 있는 사원을 좋아하지도 않고 새로 일 구하기 더 어렵고…” 구직자들이 많은데 회사에서 굳이 부담되게 경력직을 쓰겠냐는 것이다. 경력에 대한 인정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일을 계속하기만을 바라는데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십대였다. 몇 년 되지 않은 경력조차 벌써 고용에 불안한 요소가 된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한 이웃이 들려준 말이었다. “회사에서 승진이 빨리 되면요, 이제 빨리 나가라는 말이어서 불안하대요. 평사원으로 오래 일하는 직원이 오히려 나은데, 승진을 못 하면 또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니까 역시 힘들구요.”

 

임금을 받아 사는 노동자들을 만들어놓고, 임금은 주거나 말거나 해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기업의 이윤계산 속에는 산목숨이 없다. 하루의 시간을 대부분 일터에서 보내고 맞바꾼 돈으로 쌀과 집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 임금을 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교육을 시켜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 임금으로만 병원에 갈 수 있고, 그 임금을 버느라 때로 다치고 없어지는 목숨들 말이다. 더욱 무자비한 것은, 없어지면 본래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청년 핑계는 참 잘도 댄다. 청년 일자리를 위해서 노동시장을 개혁한다고 정부는 말을 앞세운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고 그렇게들 희생을 강요했지만, 기업만 살고 노동자는 죽어나갔다. “2015년 30대 기업이 투자나 배당을 하지 않고 쌓아 놓기만 한 사내 유보금이 710조 원에 이른다. 현대자동차의 2014년 당기순이익은 7조6천억 원이었고 그 전해는 9조 원에 달했는데 이 회사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드는 비용은 연간 2천 6백억 원 정도다.”(김혜진 <비정규 사회> 중에서)

 

그러나 대기업의 이윤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노동 조건을 갖추거나 사회의 지속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 최저임금과 연관된 노동자는 4백만 명이고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노동자는 2백만 명이다.

 

불평등한 노동에 절망하는 여성들

 

▲  김혜진 <비정규 사회> 중에서 삽화   ©일러스트: 박수정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이십 대 친구들을 만났다. 한 달에 ‘백만 원 받는 게 꿈인’ 이들은 회사의 사무직으로 5개월씩 일했다. 일당은 3만4천 원. 대학교를 나와서 당장 돈을 벌어야 하니까 입사해 이 일을 하면서 자신의 노동이 더 비싸게 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다른 사무직 알아봐야지요. 백만 원 주는 데 아무 곳이라도.”

 

‘백만 원이면 충분하다’가 아니라 ‘백만 원 이상 바라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논리가 다르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버려 말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그런 거잖아요”, “할 수 없죠”가 입버릇처럼 붙어 있다. 주말에 마트나 백화점 같은 데 일당직이라도 할 수 있을지 검색을 하느라 구직 사이트를 뒤진단다.

 

이전에 나도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랬다. ‘백만 원만 받으면 서울에서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IMF 외환위기에 겁을 먹고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낯설었다. 선배들에게 들어왔듯 그때만 해도 당연히 내가 앞으로 할 일들이 정규직일 거라고 여겼다. 이십 년이 지나서 “백만 원만 받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니 괜히 속상하다. “백만 원보다 더 받아야지요, 왜 백만 원부터 시작해요.” 일부러 한마디하고는 머쓱해진다.

 

월세를 삼십만 원 내고, 식대가 아까워 도시락을 싸서 다니고, 퇴근하면 바로 집에 틀어박혀 있고, 남의 일에 참견 안 하고, 결혼은 생각하지 않으며, 아이 낳을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고, 포털의 뉴스로 세상을 보며, 연이은 범죄기사에 “여자로 사는 게 하루하루 아슬아슬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이다.

 

한편 다이어트를 하고 예뻐지면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아 식사를 거르고 성형수술에 드는 몇 백만 원의 비용을 고민하며 노동시장이 주지 못하는 안정감을 자신의 몸을 바꿔서 거머쥘 수 있지 않을까 환상에 젖는다. 나는 그걸 환상이라고 꼬치꼬치 생각하지만 실은 그럴 자격이 없다. 나부터가 그렇다. 일을 하다 좌절한 사람들이 신데렐라를 꿈꾼다. 불평등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망하는 이들이 노동을 떠난 단 하루의 나들이를 소망한다. 그 소망이 격렬한 것은 그만큼 현실이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송받는 젊음을 자원화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만연한 희롱과 폭력 앞에서 아슬아슬해하는 여성노동자가 한 달에 백만 원을 받고 싶어 하면서, 다음 달이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끝날 일자리에 서글퍼한다. 일을 하면서 만난 동료들과 자신의 책상을 떠나야 해서 아쉬워한다. 이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해도 자신이 일에 가졌던 애착을 생각한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려고 하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진심이나 마찬가지인데, 불안정한 고용은 바로 그것을 짓밟는다.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자긍심을 가지고 어떤 연대를 느끼고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기업은 관심이 없다. 불어나는 숫자가 아닌 것은 결과물이 될 수 없으니까. 군더더기 없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많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퇴직금을 주지 않고 고용 안정을 보장하지 않기 위해 6개월, 10개월씩 계약직으로 일한 사람들이 사라지만 그 자리에 또 새 사람들이 들어올 것이다. 이전에 있던 이들은 없던 사람들이 되고 그들 노동의 성과는 숫자가 되어 기업의 부에 축적된다.

 

국민이 기업에 부를 축적해주는 부속품인가?
 

▲  김혜진 <비정규 사회>(후마니타스, 2015) 
 

“그래도 이만한 데 없었어요.”

 

어디든 또 가서 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 친구는 일터에서 좋았던 점을 꼽아 생각한다. 4대보험이 되는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있는 곳이었다, 화장실에 눈치 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5천 원의 식대가 있는 곳이었다, 여자들만 근무하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다시 나를 부를 곳인지도 모른다. 관리자들이 반말하고 큰소리를 치고, 자기 시간을 아무 때나 요구하고, 젊다고 어린애 취급 하는 말을 하고, 처음부터 계약직 여성이라고 승진과 수당이 없었던 곳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터의 좋은 점이 실은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 나머지 군더더기 말이다. 어쩐지 잘못된 것 같고, 부당하게 느껴지고, 참을 수 없고, 불평등하게 생각될 때 가슴속에 웅얼거리는 말들이 어떤 말이 되어 나오고 싶어 하는 건지 떠올려볼 수 있는 책이다.

 

여성의 가난과 차별을 재생산하는 건 비정규 노동이다. 비정규 노동이야말로 젠더의 관점으로 더 많이 공론화되어야 한다. 이 책은 비정규 노동 일반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앞으로 여성의 비정규 노동에 대한 더 깊고 다양한 조망들도 잇따르면 좋겠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터는 성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계약 해지라는 명목 아래 임의로 해고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비록 1년 단위의 계약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당한 것이다. 특히 정규직 취업 관문이 막힌 청년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선택했으니 책임지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안정한 일자리를 만든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과 정부이기 때문이다.” -김혜진 <비정규 사회>(후마니타스, 2015) 139쪽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용 불안정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윤을 중심에 둔 ‘노동 유연화 정책’이 지속되는 한 실업과 고용 불안정은 필연이다. 그래서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기업과 정부는 먹고살려면 일하라고 명령한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하며, 임금이 적고 힘든 노동이라도 하라고 압박한다. 그러나 노동이 불안정하고 실업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일자리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존은 고용과 임금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생존권은 고용되어 있지 않는 사람도 보장받아야 할 독립적인 권리이다.” -같은 책 145쪽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겠다고 하고 저성과자를 해고하겠다고 하며, 취업 규칙을 회사가 임의로 바꿀 수 있게 제도를 완화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로 노동자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35세 이상인 경우 비정규직으로 4년까지 고용하겠다면서 상시 고용의 책임을 더욱 피하고, 고용보험 제도도 비정규직이나 신규 취업자에게 불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의 정체다.

 

국민은 기업에 돈을 벌어다주는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소유하며 마모되거나 탈락되는 국민은 버려도 좋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부속품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일하지 않으면 생존할 권리조차 없는 것일까?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이어진 노동을 토막 내어도 되는 것일까? 불안정한 일자리를 제공받았다고 그것을 끝까지 감수해야 하는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은 왜 이 모양인가?

 

아마 그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동자의 가슴에 있는 군더더기 말. 상상하기 어렵고 발화되지 않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래서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되었나, 방향을 잃은 차별과 불만과 분노 속에 사실 가슴속 깊이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의문이 아니었을까. 안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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