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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자리에서, 여성들의 글쓰기
<모퉁이에서 책읽기> ‘시골생활’과 ‘지글스’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어디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른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어디에서 쓰는가에 따라 다른 글을 쓸 수 있다. 그 자리가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자리라면 어떨까. 빨랫줄에 널려 있던 형형색색의 마음들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바람에 펄럭이는 자리라면 어떨까. 넌 나고, 넌 내가 아니고, 넌 나여야 하고, 넌 내가 아니여야 한다고 반듯이 개켜 서랍장에 꼭꼭 넣어둔 마음들이 모두 풀씬풀씬 어깨춤을 추며 제각기 펄럭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더 관대해질 것이다. 결코 선하지 않은 세상에, 그렇다고 악하지만도 않은 세상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나에게 무관심한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막막해져도 혼자일 수는 없게 될 것이다.
▲ ‘생활밀착형 B급 교양문예지’ 계간 <지글스> © 지글스
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이 만든 잡지 <지글스>는 ‘생활밀착형 B급 교양문예지’라고 스스로 일컫는다. B급이어서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책에는 여자들의 농사 이야기도 있고, 마을 활동하면서 풍물하며 노는 이야기도 있다. 마음 공부해야 한다고 점잖게 다독거리는 이야기와 동네에서 새를 관찰한 시시콜콜한 글이 함께 있다. 경운기 앞에서 남녀가 춤추고 들판에 누워 여자들끼리 눈짓 주고받는 사진들도 실려 있다. 남몰래 끼적인 소설도 거리낌 없이 싣고 ‘식겁’할만한 ‘야한’(?) 이야기도, 마을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도 싣는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여성들의 글과 그림, 사진이 실린 이 잡지는 여러 필자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창작을 꿈꾸는 여자들의 열망을 깨우는 사랑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면서”(<지글스> 편집장 달리) 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또다른 책 <시골생활>(문학과 지성사, 2015)은 <지글스>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정상순 씨가 지리산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마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지리산 이음’의 커뮤니티 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책은 <지글스>가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 권역의 공동체 활동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글스>의 활동 무대가 어떤 지형 속에 있는지 조망할 수 있다.
▲ 정상순 <시골생활>(문학과 지성사, 2015)
이 책은 인위적인 지역 경계를 넘어 지리산을 매개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문화를 일궈내었는지를 보여준다. 전남 구례의 구례군민극단 ‘마을’, 협동농장 ‘땅 없는 사람들’, 공간협동조합 ‘째깐한 다락방’, 전북 남원의 ‘지글스’, 마을 놀이패 ‘산내 놀이단’, ‘산내마을신문’, 지리산문화공간 ‘토닥’, 지리산 시골살이 학교, 인드라망 사회연대쉼터, 살래청춘식당 ‘마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역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 울타리를 넘어 아이들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터전을 만드는 여성들, ‘전문’ 예술의 경계를 넘어 삶에 뿌리박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 공간과 땅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경남 산청, 하동, 함양에서도 카페 ‘빈둥’, 간디고등학교, 작은 도서관, 지리산 종교연대, 지리산 학교 등의 활동이 활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정상순 씨는 서른이 넘어 지리산 자락에 스며들어 귀농해 살면서 마을 활동들을 지켜보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책은 고집스런 활자들의 천국이 아니라 지역에서 또 다른 삶을 꿈꾸는 누군가의 소박하고 순결한 메모장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서문에 적어놓았다. 책에는 활동 실패담도 있고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필자의 유머러스하고 경쾌한 문장들이, 긴 사연을 압축한 짧은 소개 글들도 잘 읽히게 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작하는 모습들이다. 배운다는 것은 열려 있는 것이고 다양한 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라고 이 책은 알려준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13년 전 낯선 지리산으로 이사 오면서 웃었는지 울었을지 모를 필자의 기억은 그 다음 삶의 정답을 재단하지 않고 열어두었기에 만날 수 있었던 시간 속에서 새롭게 떠오른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라고. 또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인에게 주어진다’고. 그 아름다움이 만인의 것임을 알고 걷는 그대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은 그대는 아름답다. -정상순 <시골생활>(낮고 느리게 걸으니 너와 내가 보이네, 지리산 만인보) 175p
아마추어리즘에 동의한 것도 아니요, 전문 글쓰기 집단을 표방한 일도 없는 『지글스』에 대한 내 줄타기는 계속되었다. 조금 발전적인, 어쩌면 세속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과, 나의 글과 타인의 글이 병렬로 이어져 있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도 한몫을 했다. (중략) 그렇게 줄타기를 넘어 널뛰기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비 갠 뒤 문득 다가오는 능선처럼 선명하고 분명하게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무엇이 있었다. ‘이것은 여자들의 글쓰기다.’ -정상순 <시골생활>(헐렁하기 짝이 없는 글 쓰는 여자들의 연대, 『지글스』) 68~69p
▲ <지글스> 독자와의 만남 포스터 © 지글스
강요하지 않아서 살아난 B급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숨을 쉬면서 독자의 기억에까지 성큼 다가와 꽉 잠긴 자물쇠를 거침없이 덜그럭거리게 한다. 잘 말하지 않아도 된다면 누구나 말하고 싶을 것이다. 비난받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한번쯤은 드러내고 싶을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만 ‘내’가 아니어도 된다면, ‘나’는 무수한 목소리들로 제각기 노래하고 싶을 것이다.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이들의 어수룩한 웃음 때문일 테고, 얼마든지 실패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그러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어떤 장르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체가 아니라, 마음 놓고 숨을 몰아쉴 수 있는 자리, 마음껏 웃고 울어도 되는 자리가 아직도 여전히 필요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바람을 맞고 서게 되면 몸 안에 쪼그라들어 숨 넘어가던 말들이 물고기의 부레처럼 부풀어 숨을 토해낼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없으므로 흔적만 남아 있던 얼룩 같은 이야기들도 선명한 색깔을 뿜으려고 꿈틀댈 것이다.
그때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아팠는지, 위축되었는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용케 살아왔는지. 말들은 바람개비처럼 앞으로 달려가고 말들의 풀무질로 여자들은 또다시 일어난다. 바람이 성글게 만드는 관절과 이음새의 마디마디로 삐꺽거리며 또다른 노래가 흘러나올 참이므로. ‘다채로운 여성들의 삶이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작품이 되는’ 글들을 여자들은 새롭게 꿈꾼다. ▣ 안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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