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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도록 ‘전략적 괴롭힘’ 가하는 금융권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 나와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성과자’들에게 식충이라는 말도 많이 했고… 월급 축내고 있다, 식충이다….”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저성과자를 새벽에 보자고 해서 자기 방에 부르고. (새벽에요? 몇 시?) 여섯시. (그걸 언제 고지를 해요?) 전날 하는 거죠. 들렀다 가라.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경고장을 보내죠. 당신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하니까 삼진아웃이다, 이런 뭐, 퇴사시킬 수 있겠다는 협박도 하고.”

 

생명보험, 손해보험, 투자증권 등에서 일하는 사무금융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이다. 2000년대 들어 지속된 경기불황과 2008년의 금융위기는 금융권에 상시적인 구조조정 바람을 몰고 왔다. 사무금융노동자들은 실적 압박과 해고 위협을 견디며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직장 내 괴롭힘’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사무금융노동자 절반가량 ‘직장 내 괴롭힘’ 겪어

 

올해 노동시장 전반에 걸쳐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최근 사무금융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끈다.

 

지난 11월 25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는 <전략적 성과관리? 전략적 괴롭힘!>이라는 제목으로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회가 열렸다. 이인영 국회의원실(새정치민주연합)과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이 공동 주최한 자리로, 정규직 사무금융노동자 3천3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결과와 11명의 심층 면접결과가 발표됐다.

 

응답자 3천33명(여성 54% 남성 46%) 중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겪어본 사람은 절반에 가까운 48.75%에 달했다. 주 1회 이상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16%였으며, ‘거의 매일 괴롭힘을 당하는’ 노동자도 5.2%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  사무금융 노동자가 겪는 '직장 내 괴롭힘'의 유형   ©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업무 관련한 괴롭힘이 37%로 가장 많았고, 언어폭력이 29%, 신체적 폭력(위협)이 3%였으며, 성희롱이나 성폭력도 7%가 겪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0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실시한 ‘근로환경조사’ 결과 서비스산업 노동자가 겪은 언어폭력이 6.1%, 신체적 폭력이 1.4%, 성희롱 및 성폭력이 1.5%로 드러난 것에 비하면 꽤 높은 수치다.

 

괴롭히는 상대는 상사가 27.23%로 가장 많았으며, 고객이나 거래처가 6.53%, 회사의 임원 및 경영진이 4.85%의 순으로 나타났다.

 

구조조정과 성과주의가 ‘내리갈굼’ 문화 만든다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괴롭힘이 구조조정이나 성과주의 같은 기업의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3년간 직장 내 환경 변화를 묻는 설문에 응답자의 약 삼분의 이가 ‘구조조정, 경쟁, 성과주의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또한 이렇게 응답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빈도가 높았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구조조정이나 경쟁, 성과주의 증가 등 환경 변화에 따라 괴롭힘이 증가한다는 것은 직장 내 괴롭힘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의 경영방침’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실태조사 대상이었던 한 금융회사에서는 지나친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직원도 있었다. ‘본부장의 실적 압박에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는 유서를 남긴 노동자가 일했던 금융회사는, 실적인 저조한 사람들에게 ‘삼진아웃’이나 “퇴사시킬 수 있다”고 압력을 가하는 괴롭힘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의 ‘내리갈굼’ 문화에 대해 지적했다. “영업실적이 부족한 노동자들에게 모멸감을 줘서 실적 부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기업의 일상화된 관행”이라는 것. 신경아 교수는 “반복되는 인격적 모욕 속에서 노동자의 자존감이 훼손된다”고 말했다.

 

심층면접 결과, 사무금융노동자들은 상급자가 ‘저성과자’로 지목된 직원에게 공개적인 자리에게 모욕을 주거나, ‘면담’이라는 형식을 빌려 퇴직을 종용, 회유하는 사례가 많다고 호소했다. ING생명에서는 희망퇴직을 종용하는 회사 측의 과도한 면담으로 임신 6주차 여성노동자가 기절하고, 여덟 차례 면담을 견디다 못한 남성노동자가 실신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에서 시행해야 할 사항’으로 ‘과도한 성과주의 정책 변경’을 1순위로 꼽았다. 이러한 성과주의적 기업문화가 직장 내 괴롭힘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저성과자 해고 제도’는 괴롭힘 부추길 것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연구팀’은 현재 금융업종에서는 퇴사를 유도하기 위한 괴롭힘, 구조조정 과정의 일환으로서의 괴롭힘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회사의 ‘전략적 괴롭힘’인 셈이다.

 

개인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과다한 업무를 주고서 다 못하면 “당신 저성과자다”라고 낙인을 찍는다거나, ‘저성과자 역량향상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산행, 봉사 활동을 시키거나 독후감을 써오게 하는 등 끊임없이 ‘쪼는’ 것이다. 증권이나 보험 업무의 경우, 이전 근무지에서 축적해 온 고객관계와 네트워크가 중요한데 원격지로 발령을 내버려 노동자가 성과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무너뜨리는 방식도 취한다.

 

한 증권회사는 ‘전략적 성과체계’ 프로그램을 도입해 저성과자로 선정된 직원들을 상대로 온라인 강의를 수강하고 코칭 일지를 작성하게 하는 한편, 지속적인 면담으로 압박을 가했다. 노동조합에서는 이를 상시적 퇴출 프로그램으로 인식하고 있다. ‘저성과자’로 찍힌 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역량이 강화되긴 커녕 자존감이 무너지고 무기력해져 회사를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11월 25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무금융노동자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회.  © 일다

 

특히 보고회 참가자들은 최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저성과자 해고 제도’가 기업의 이런 ‘전략적 괴롭힘’ 행위를 조장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없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도록 보호하고 있다. 이때의 정당한 이유란 ‘사회통념상 고용계약을 계속시킬 수 없을 정도로 노동자에게 책임 있는 이유가 있다거나 부득이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로 한정된다.

 

그런데 정부는 올해 안에 저성과자 해고 제도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작년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보면 ①객관적·합리적 기준에 의한 평가 ②교정기회 부여 및 직무·배치 전환 등 해고 회피 노력 ③공정한 절차와 관련한 사내 규정 마련 등을 통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사회통념상 도저히 고용 관계 유지가 어려운 경우’ 해고가 가능하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서선영 변호사는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사회통념상 도저히 고용관계 유지가 어려운 경우 해고가 정당화된다고 했다. 저성과자 해고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은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 ‘모든 노력’ 속에는 더욱더 은밀하고 잔인한 괴롭힘 행위가 속해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서선영 변호사는 “정부가 직장 내 괴롭힘을 장려할 생각이 아니라면, 저성과자 해고제도 도입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법률원의 차승현 변호사도 “저성과자 해고 제도는 직장 내 괴롭힘 행위를 합법화해주는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적 압박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번 실태조사 과정에서 한 사무금융노동자는 “실적 압박을 ‘괴롭힘’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영업직에서는 실적을 내지 못하면 압박을 받는 것이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고 정규직 역시 언제 퇴직 당할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환경 속에서, 실적 압박을 받아도 그나마 임금이라도 제대로 받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한 생명보험사의 경우, 보험 설계사는 전원 비정규직이고 100% 성과급제로 운영된다. 실적이 낮은 비정규직 설계사는 월급을 거의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서 사무관리직으로 일하는 정규직노동자로선 그래도 자신은 형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이번 보고회 참가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 노동권과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라는 인식을 확산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는 “고용관계가 일종의 종속 관계라고 하더라도 노동자를 ‘노동하는 몸’으로만 보는 것은 인간을 ‘사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류은숙 활동가는 직장 내 괴롭힘이 “해고 같은 너무 심각한 문제들 속에서 자칫 덜 심각하거나 소위 ‘배부른’ 문제제기로 들릴 소지”가 있지만,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괴롭힘은 자존감 파괴, 상호존중과 저항력 상실, 무기력, 법적 제도적 권리 박탈로 내달리고 있다”고 설명하며 “일터 괴롭힘은 뒤로 밀려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서선영 변호사도 “한국 사회에서 노동과 건강의 문제가 ‘신체적 재해’ 중심으로 사고되고 정신건강 문제는 부차적으로 취급되어왔지만, 직장 내 괴롭힘에 노출된 노동은 유해환경에서의 노동과 다르지 않고 심각한 경우 우울증, 자살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은 인간의 ‘존엄’과 분리되어서 사고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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