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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위해 성소수자는 빼고 가자?

양성평등기본법과 여성가족부의 퇴행하는 여성정책



올해 7월 1일부터 기존의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시행중이다. 그런데 ‘양성평등’의 개념이 이상하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야 하니 ‘여성인권’ 행사에서 ‘여성’이라는 말을 빼라거나, 동성애자나 제3의 성은 ‘양성’에 해당하지 않으니 성평등조례에서 제외시키라는 식으로 왜곡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남녀평등 외 다른 평등은 침해해도 상관없다?

 

법 시행을 앞두고 여성가족부는 “여성발전기본법이 낙후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여성발전에 중점을 둔 정책”을 추진했다면 “양성평등기본법은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 참여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매년 7월 1일부터 일주일간 열렸던 ‘여성주간’도 ‘양성평등주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러자 경상남도에서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 행사는 매년 경남여성단체연합에서 주도하여 진행해왔는데, 경상남도 측에서 갑자기 “양성평등 행사를 여성단체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예산을 예년의 절반으로 축소한 것이다.

 

또 양성평등주간 행사 내용에 ‘여성이 요구하는 의제와 여성의 정치참여확대’가 있는 것을 두고 “여성을 언급하는 것이 양성평등 취지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고, ‘여성의 정치세력화’에서 ‘여성’이라는 용어를 수정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양성평등의 의미를 남녀 간의 기계적인 평등으로 해석하여 오히려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이것이 한 자치단체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양성평등은 남성과 여성, 두 성 사이의 평등을 뜻하기 때문에 다른 평등은 침해해도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 10월 10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여성가족부의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여성 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가 열렸다.  © SOGI법정책연구회 제공 사진

 

지난 6월, 대전광역시는 성소수자 인권 보호와 지원에 관한 조항을 담아 ‘성평등조례’를 제정했다. 그러자 8월, 여성가족부는 이 조항이 양성평등기본법의 입법 취지와 맞지 않는다면서 대전시 측에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대전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갔으나 9월, 대전시의회는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삭제한 채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양성평등기본법 시행 이후,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10월 10일에는 성소수자 인권 보호를 요구하는 단체와 시민들이 서울 대한문 앞에 모여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궐기대회를 열었다. 여성운동 진영 내부에서도 여성가족부의 행보와 여성정책의 방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역차별 공세 속 여성발전기본법의 행방

 

지난 11월 27일 중앙대학교 법학관에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평등 정책, 이론, 운동의 방향과 미래>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SOGI법정책연구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수자인권위원회/여성위원회 등이 공동 주최한 것으로, 질문과 토론이 활발히 오가며 시종일관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배은경 서울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여성정책 변화의 역사를 짚으며,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바뀌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성발전기본법은 몇 번의 개정을 통해 성평등, 성주류화 지향의 여성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기본법으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이름이 ‘여성발전’으로 되어 있어 여성들이 발전하면 성평등이 달성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문제가 있었다. 또 성평등 정책의 수혜자가 생물학적인 여성만이 아닌데도 꼭 여성만 수혜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여성발전기본법의 이름을 바꾸자는 문제 제기가 일어났다.”

 

여성발전기본법 개정을 위한 준비는 17대 국회(2004년 5월 30일~2008년 5월 29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때 법안 명칭은 ‘성평등기본법’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18대 국회(2008년 5월 30일 ~ 2012년 5월 29일)에서 신낙균 민주당 의원이 ‘성평등기본법’을 발의하자, 여성가족부는 법안 명칭을 ‘여성정책기본법’으로 제시했다.

 

배은경 교수는 “‘성평등기본법’으로 명칭이 바뀌었을 때, 역차별 논란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정책의 대상과 기반이 흔들릴 것에 대해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성평등 정책은 여성에게만 이권을 주는 정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책을 시행하는 담당부처가 이를 피력하지 못하고 ‘남성에 대한 역차별’ 여론에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  11월 27일 중앙대학교 법학관에서 열린 <성평등 정책, 이론, 운동의 방향과 미래> 대토론회   © 일다

 

여성발전기본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된 19대 국회(2012년 5월 30일부터)에 와서는 법안 명칭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바로 ‘양성평등기본법’이냐 ‘성평등기본법’이냐의 논쟁이다.

 

나영정 SOGI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은 “이 과정에서 ‘성평등’이 동성애자나 제3의 성을 포괄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고, 바로 그 이유로 배격되었다”고 말했다.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 논쟁의 진짜 이유

 

여성발전기본법 개정 과정에서 ‘성평등’과 ‘양성평등’ 용어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는 19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의 녹취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열린 19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의 ‘여성발전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에 대한 공청회’에 참석한 일부 전문가의 진술 내용을 보자.

 

“법리적으로 검토해 봤을 때, 최고 규범인 헌법 제11조 및 제36조에 따른 ‘양성’이라는 용어가 좀더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헌법에서 양성평등 이념은 도출할 수 있지만 성평등 이념을 도출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3의 성이라든지, 성적 지향이라든지, 여러 가지 부분에 있어서 사실은 우리 법이 그렇게 온정적이지는 않습니다.”(김용화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

 

“성평등은 저는 아직 너무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남성, 여성 뚜렷하게 양성에 대한 얘기를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헌법 36조 1항에도 있듯이 가족의 중요성 또 혼인 이런 것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기초로 유지가 되어야 된다고 주장이 되어 있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우리 국가와 사회가 굳건하게 세워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김정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요약하면 ‘양성평등’은 남녀 간의 평등만을 뜻하고, ‘성평등’은 제3의 성과 동성애자 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또한 양성평등 개념은 헌법에서 도출할 수 있지만 성평등 개념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성평등 개념은 시기상조이며 양성평등 개념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양성평등’이라는 명칭은 그렇게 동성애자와 제3의 성을 배제하는 의도로 제시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어 ‘성평등’이나 ‘양성평등’ 모두 영어로 번역하면 젠더 이퀄리티(Gender Equality)다. 나영정 SOGI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은 ‘양성평등’ 개념이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 두 개의 성을 구분하는 것을 뜻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성평등’ 개념 또한 제3의 성이나 다른 성적 지향을 포함한다는 것도 관점과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 연구원은 “문제는 어떠한 논거도 없이 ‘성평등’이라는 개념을 배격하기 위해서 저런 해석과 주장을 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10월 10일 여성가족부를 규탄하며 열린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 SOGI법정책연구회 제공

 

‘성평등’을 헌법이 보장하지 않는다고?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공청회에서 진술인들이 ‘양성평등’ 개념은 헌법에서 도출할 수 있지만 ‘성평등’ 개념은 헌법에서 도출할 수 없다고 얘기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헌법 36조 1항의 내용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번 대토론회에서 참여자들은 우리 헌법이 ‘성평등’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여성발전기본법 전면 개정 과정에서 굳이 성소수자를 제외하기 위해 헌법의 가치를 왜곡시켰다고 지적했다.

 

나영정 연구원은 “성평등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논하려면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권을 명시한 헌법 제11조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양성 평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36조 1항에 대해서도 “혼인이 반드시 이성 간에만 가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류민희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소속)도 “호주제, 간통죄 등 차별적 요소가 많았던 관습법들을 제거하는데 근거가 됨으로써 성평등에 기여했던 헌법 36조 1항이 성소수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결과적으로, 여성발전기본법 전면 개정안은 양성평등기본법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나영정 연구원은 “성소수자 문제가 인권 정책의 일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정책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때에 성소수자를 부적절한 시민으로 낙인찍은 것은 유감스럽다”라고 말하며. “여성정책의 이름으로,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가 그런 낙인을 찍거나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할 자격이 있는가?” 반문했다.

 

여성의 차이와 다양성 무시, 퇴행하는 여성정책

 

<성평등 정책, 이론, 운동의 방향과 미래> 토론회 참가자들은 양성평등기본법이 기존 여성정책의 한계를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여성정책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여성가족부의 명칭은 영문으로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젠더평등 & 가족 부처)이다. 이미 명칭에 ‘사회적 성’을 의미하는 젠더(Gender)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법 개정 과정에서 젠더(Gender)는 ‘양성평등’이 되면서 이는 곧 생물학적인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만 의미하는 것으로 협소해졌다.

 

Gender를 성으로 번역할 것이냐 양성평등으로 번역할 것이냐에서 결국 ‘양성평등’이 승리했다. 여성정책이 추구해야 할 평등이 오직 양 성 사이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성정책의 장에서 젠더(사회적 성)를 폐기하고 섹스(생물학적 성)를 불러오는 이 같은 후퇴는 역사를 수십 년 되돌리는 일이다.”(배은경 교수)

 

배은경 교수는 “이렇게 되면 여성들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과, 젠더와 다른 사회적 범주의 교차로 인해 일어나는 다양한 불평등의 문제는 사장되고 만다”고 우려했다.

 

사람들은 생물학적 성별만이 아니라 나이나 장애, 성적지향, 인종, 계층, 국적, 세대, 종교 등 다양한 정체성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현실을 살아간다. 이러한 복잡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미국의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이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란 개념을 제기하였다. 유엔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여성정책에서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엔은 2000년 <성주류화 개관>(Gender Mainstreaming: An Overview) 문서에서 “여성과 남성을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인구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고, 사람들의 욕구와 관점이 다양한 요소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2014년 각국의 성주류화 정책 이행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 UNWomen의 <인권과 성평등 지표를 만드는 팁>은 “관련자들을 단일한 집단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성별, 민족, 연령, 장애, 건강상태, 소득,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HIV 상황, 정치적 성향 등을 고려한 지표를 만들도록 권했다.

 

류민희 변호사는 “이번 양성평등기본법 입법 과정에서 특정 교차 사유(성적지향, 성별정체성)를 적극적으로 배제한 것은, 국제규범이나 유엔여성기구의 입장을 볼 때 매우 부당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유엔여성기구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교차성을 고려하는 것이 ‘좋은 관행’임을 지침을 통해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 ‘좋은 관행’을 한국의 여성부는 저지시킨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류 변호사는 “성소수자 여성(LBTI women and girls)이 겪는 폭력과 차별에 대해 국제여성인권보호체제에서 주목하고 있다”며, 올해 국제노동기구(ILO)와 세계보건기구(WHO) 등 12개의 유엔전문기구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종식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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