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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상실의 순간을 지나는 사람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5. 12. 9. 09:00

상실의 순간을 지나는 사람들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사일런트 하트>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영화 <사일런트 하트> 포스터


고요한 풍경 속에 놓인 고즈넉한 집에 두 딸의 가족들이 찾아온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손수 준비한 특별식을 갖춘 풍경은 흔한 파티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벌어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상실의 공기는 어쩔 수 없다

 

빌 어거스트 감독의 연출작 <사일런트 하트>는 루게릭병에 걸린 엄마 에스더(기타 노비)가 전신마비가 오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후, 가족들을 불러 함께 보내는 마지막 2박 3일의 시간을 담은 영화다.

 

이별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은 큰 딸 하이디(파프리카 스틴)와 그의 남편과 10대 아들, 작은 딸 산느(다니카 쿠르시크)와 남자친구, 그리고 에스더의 친구 리즈베스, 남편 폴이다. 손님들은 에스더와 각각 엄마와 딸, 장모와 사위, 할머니와 손자, 오랜 친구, 그리고 부부라는 서로 다른 관계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파티의 구성원들이 에스더의 존엄사라는 하나의 사건을 받아들이며 겪는 감정의 변화를 두 딸 하이디와 산느를 중심으로 그려낸다.

 

두 딸이 상실에 임하는 자세

 

하이디는 영화 전반부에서 책임감 있는 큰 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엄마의 결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마지막 파티에 임한다. 엄마에게 뜻 깊은 마지막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써 담담한 척 하는 하이디의 모습은 외줄에 처음 올라 능숙한 척 해야 하는 초보 곡예사처럼 불안해 보인다.

 

작은 딸 산느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위태로운 기색이 역력하다. 과거에 자살 기도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산느는 여전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막내다. 하지만 스스로 뭐든 잘 하는 언니와는 달리 여전히 엄마를 필요로 하는 산느는 그만큼 엄마 에스더와 깊이 연결된 관계이기도 하다. 엄마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아직 엄마의 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엄마의 몸에 달려드는 산느에게 에스더는 쓰러졌다가 일어선 적이 있는 산느야 말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고 일깨워 준다.

 

하이디는 엄마의 편안한 마지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꾹 눌러 담지만, 산느에게는 그럴 재간이 없다. 하이디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산느가 못미덥고, 엄마의 마지막 파티에서마저 자신의 상태나 기분을 우선하는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하이디는 산느의 남자친구 데니스를 통해 산느가 비밀스러운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그치듯 산느를 설득한 하이디는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사일런트 하트> 스틸컷

 

죽음,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최선의 선택

 

<사일런트 하트>의 인물들은 함께 머무는 공간에서 불안을 침묵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에 드러나는 시간은 아니지만, 이는 에스더의 존엄사라는 이슈를 놓고 모두의 동의를 얻기 위해 회의했던 지난한 시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스더의 결정을 존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음식을 나누어먹고 음악을 연주하며 함께 노래하고 옛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에 젖는 일상적이고 평온하던 시간은 에스더의 손에 쥐어진 꼬냑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비일상적인 순간의 개입으로 긴장감을 일깨운다.

 

깨진 유리잔을 보며 담담하게 농담을 건네는 에스더와는 달리 그의 상태를 직면한 가족들은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에스더의 농담에 유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산느의 남자친구 데니스다. 그의 눈치 없는 행동 덕분에 긴장된 분위기는 무마되지만, 가족들은 이 순간을 통해 침묵으로 지키고 있었던 불안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다.

 

욕실 거울 앞에 혼자 서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립스틱을 바르던 에스더는 립스틱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허리를 숙여보고 발로 립스틱을 굴려도 보지만 몸이 굳어가는 그에게는 립스틱을 줍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에스더는 결국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 간신히 립스틱을 주운 뒤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에스더가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납득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임을 보여준다.


▲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사일런트 하트> 스틸컷

 

침묵의 틈새로 보이는 반짝이는 순간들

 

<사일런트 하트>는 엄마의, 부인의, 친구의 존엄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장면은 긴장된 공기를 느슨하게 만드는 따뜻하고도 유머러스한 순간들이다.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유품 분배’라는 이슈를 입에 올리거나, 함께 나온 사진을 보다가 “가지고 가라”며 갑작스러운 선물을 건네는 순간은 함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신뢰감을 확인하게 한다.

 

에스더는 SNS를 통해 여자친구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10대 손자의 사랑법에 도움을 건넨다. 그 도움이 효과를 발휘했음을 확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은 마지막 순간의 무거운 공기에 미소를 더한다.

 

데니스의 주도 하에 모두가 빙 둘러앉아 대마초를 함께 피는 장면은 예정된 죽음의 엄혹함을 잠시나마 녹게 한다. 완벽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되기 위해 애쓰던 가족들은 대마초를 피운 뒤 행복감에 젖은 얼굴로 나른한 대화를 나눈다. 그 순간 모두에게 필요했던 것은 각자가 ‘완벽한’ 딸, 남편, 손자, 친구는 아니어도 괜찮다는 위로 아니었을까.

 

▲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사일런트 하트> 스틸컷

 

가족들을 돌려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 더 자도 된다는 남편 폴의 말에 에스더는 “다시 한 번 일어나고 싶다”며 커튼을 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죽음을 명확하게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의 걱정거리였던 둘째딸 산느는 마지막 순간에 엄마를 위한 가장 성숙한 제안을 하고, 처지가 뒤바뀌어 엄마를 잡고자 했던 하이디도 결국은 엄마의 결정을 존중하게 된다. 마지막 파티의 손님들은 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올 집에는 에스더가 없을 것이라는 예정된 결말을 받아들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영화 <사일런트 하트>는 이 어려운 상실의 순간을 내내 담담하게 담아낸다. ▣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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