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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의 성에 대한 중년남성의 상식‘들’
15세여성 성폭력 혐의 40대남성에 대한 무죄 판결에 부쳐

 

 

※ 필자 김보화(파이)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15세 여중생을 임신시키고,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는 40대 남성에 대한 무죄 판결로 한국 사회가 시끌벅적하다. 지난 20여 년 간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라고 주장해왔던 여성운동가들의 요구가 이렇게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해석될 줄이야…. 그로 인해 성적 자기결정권,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순과 이렇게 극적인 방식으로 조우할 줄은 몰랐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와, 법조인, 남성들 깊숙이 내면화되어있던 ‘사랑’이란 것의 실체를, 객관과 합리성에 가려진 지독한 편향을, 성보수주의와 성자유주의 담론이 묘하게 얽혀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성폭력이냐 사랑이냐, 상식‘들’의 대결에서

 

15세의 여중생이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강간과, 미성년자 유인, ‘카메라등 이용.촬영에 대한 위반’으로 40대 중반의 남성을 고소했다. 1심과 2심에서는 가해자가 유죄로 판결 내렸으나 대법원에서는 무죄,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되었고 10월 16일 고등법원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지지하였다. 이 사건은 현재 검사가 대법원에 재상고하였기 때문에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

 

재판부의 판단 근거를 살펴보자. 1심과 2심에서 재판부는 피해자가 ‘전반적으로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미숙하고, 처음만난 부모뻘 남자와 며칠 만에 성관계에 합의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으며, 성폭력과 임신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며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반면, 대법원에서 재판부는 ‘성교육을 여러 번 받은 중3이 키스만 해도 임신되는 줄 알았다는 진술은 거짓이고, 피고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그간의 카톡 메시지 횟수, 내용, 형식과 도망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던 것 등을 살펴보아 유인했거나 강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고, 최근의 파기환송심도 이를 지지했다.

 

여기에서 재판부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이란 무엇일까?

 

비록 1심과 2심이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하나 그 이유에 있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부모뻘의 남자와 만난 지 며칠 만에 성관계를 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다는 보수주의적 논리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녀를 대하는 인식, 즉 10대 여성은 순수하고 순결하며 성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고 ‘믿고 싶은’ 어떠한 믿음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식은 딸보다 어린 여성과 기꺼이 성매매를 즐기는 수많은 ‘상식적이지 않은’ 남성들은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

 

가해자의 무죄를 선언한 대법원의 입장 역시 묘하다. 성교육을 여러 번 받은 중3 여학생은 순수하지 않을 수 있고, 둘은 사랑했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자유주의적 논리는 한국 사회의 청소녀에게 성인여성도 가지기 힘든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고, 남녀의 관계는 사랑한다면 평등할 것이라고 ‘믿는’ 환상, 나아가 지긋지긋한  ‘로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판타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부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중3여학생이 누구인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정말 ‘일반적인 중3 여학생’이라는 존재가 있기는 한가? ‘일반’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전체화는 해당 청소녀의 특수한 경험, 맥락과 조건을 사장시켜버린다. 아마도 ‘중년’일 것으로 추측되는 어른들의 상식으로 ‘상상’하는 일반적인 중3 여학생은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즉, 피해자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일 수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저항했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호감의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서로가 상식 대결을 하고 있는 두 입장이 모두 특정한 중년/성인 남성의 경험과 입장에 치우쳐있다는 것이다.

 

왜 피해자는 문제를 제기한 것일까

 

여기에서 법원이 이 사건을 대하는 또 하나의 판단 기준 ‘사랑했는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1심과 2심은 사랑하지 않았고,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관계였다고 하는 반면, 3심과 파기환송심은 사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청소녀가 100일 중에 10일은 사랑하고 90일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나? 단 한 번이라도 호감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면? 만약 어떤 순간 사랑하는 관계였다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임신을 시키거나 상대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자신의 아들보다 한 살 많은 피해자를 사랑했다고 주장하면서 피임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사건에서 문제는 사랑했나 안 했나, 10대와 40대가 사랑할 수 있나 없나, 상식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왜 피해자가 ‘돌연’ 문제를 제기한 것인가, 무엇이 피해자로 하여금 성폭력 피해를 인식하게 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 10월 19일 서울고등법원 앞 <연애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녀 성폭력 사건의 무죄 판결 규탄 기자회견>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전국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165개 단체가 성명을 냄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우선 둘 사이에 권력 관계가 뚜렷하고, 카메라로 사진도 찍혔으며, 가족 내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임신까지 한 피해자가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얼마나 있었겠느냐는 점에서, 성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적인 위계와 위력이 존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청소녀는 어떤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해도 어떤 계기로 인해 사건을 낯설게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경험에 대한 해석이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정하게 보낸 카톡 등의 메시지로 보아 위계, 위력(아동.청소년 성호보에 관한 법률의 판단 기준)이나 폭행, 협박의 정도(강간죄 판단 기준)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법원의 판단은 그래서 그것 자체로 매우 문제적이다.

 

법에서의 성폭력: 얼마나 항거가 불가능했는지 증명하라

 

현재 성폭력의 판단 기준인 최협의설(폭행과 협박,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있어야 강간죄가 성립된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폭행, 협박, 항거가 현저하게 곤란한 상태를 누구의 시각으로 판단할 것인가에 있다. 이것은 피해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고 적극적으로 위기에 저항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인간이라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상대가 15세 여학생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얼마나 항거가 불가능했는지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피해자화하게 되고, 법의 조각들에 ‘맞춰지는’ 결과를 낳게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느꼈을 다양하고 연속적인 맥락이 배제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적절한 증거를 채택하고 경험에 근거하여 판단한다고 할 때 이는 주로 남성적 시각에 의해 만들어져왔고, 그렇기에 ‘강간은 조금 난폭한 성관계’라는 신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폭력 피해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의미화되기도 하지만, 가해자와의 관계나 주변 상황 등 현재의 조건들이 협상하면서 구성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폭력을 문제 제기하는 순간은 피해 직후가 아닐 수도 있다. 성폭력은 피해자에게는 상황과 맥락 속에서 재인식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가들은 관련 법의 제/개정 운동을 펼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강조했지만, 동시에 여성이 나약한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조에 문제 제기하고, 그 과정에서 주체적인 피해자, 생존자가 되기를 힘써왔다. 이것은 훼손된 자율성과 자아존중감이 이러한 과정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의 일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관들에게 성폭력이란, 피해자가 ‘피해자다운 피해자’, ‘보호할만한 피해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로 사랑한’ 관계(화간)로 여전히 이분화되어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아직도 굳건해 보이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주체성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을지, 피해자다운 피해자에 대한 전형적인 인식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지금, 나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안녕한가?

 

현재 강간죄의 판단 기준이 최협의설이고, 보호법익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하는 여성은 본인을 피해자화할 필요도 없이 권리 침해만 주장하면 되지만, 현재의 강간 판단 기준에서는 저항과 폭행, 협박의 정도를 강조하기 때문에 피해자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애초에 성적 자기결정권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담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주체적이라는 자유주의 법담론은 피해자/여성들의 상황과 맥락을 거세한 채 성별 관계가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수사나 선언에 그칠 가능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바틀렛은 페미니즘 법학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법을 다룬다는 것은 ‘법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법규의 성별적 함의와 가정들을 규명해내고, 여성의 종속을 영속시키지 않을 법규 적용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진실이란 상황적이고 부분적이므로, 자기 훈련과 성찰을 통해 위치성(positionality)을 강조하는 인식론을 피력한다. 이는 본질주의와 상대주의에 저항하면서, 나의 위치에 대한 자기 지식 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관점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법의 언어는 권위적일 뿐 아니라 기존의 남성중심적 경험을 ‘객관’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경험과 언어는 무시되기 쉽다. 그러나 법은 판단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과정의 문제이고 해석의 문제라는 점에서,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언어의 틈새를 찾아내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과거 ‘정조’(貞操, 남편 외 사람과는 성관계해선 안 된다는 인습)의 개념에 대한 저항이자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단지 성적 자기결정권 자체만이 문제가 아니다. 의미는 해석하는 자의 몫이고, 투쟁하는 자의 것이다. 누구의 경험에서 해석한 누구의 성적 자기결정권인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시작하자. 지금, 나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안녕한가? 김보화(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참고문헌> Katharine T. Bartlett, “Feminist Legal Methods”, Harvard Law Review 103, no. 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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