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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는 무엇보다 친구들을 찾아주길 바랄거예요"

<세월호와 함께 사는 사람들> 김시연의 어머니 윤경희



피켓을 들고 한 시간 서 있고 나면 ‘다음번엔 꼭 장갑을 챙겨와야지!’ 다짐을 하게 되는 날씨입니다.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요구하는 청와대 앞 다윤이 부모님의 일인 시위가 어느덧 9개월째 접어들지만, 세월호와 미수습자 아홉 명은 아직 바다 속에 있습니다. 인양 과정은 국민 뿐 아니라 유가족에게도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미수습자들의 유실 방지 대책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은화의 부모님은 여전히 전국을 헤매며 온전한 인양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 2015년 10월 19일, 홍대 앞에서 다윤이 어머니와 은화 부모님, 준영이 어머니, 시연이 어머니, 그리고 시민 자원활동가들이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며 피켓팅을 하는 모습.  © 촬영: 신요섭

 

해경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기 위해 자원봉사한 민간잠수사들에 대한 의료 지원은 중단된 지 오래고, 오히려 해경은 민간잠수사 사망 사고의 책임을 다른 민간잠수사에게 물어 검찰이 1년 구형을 낸 상태입니다. 아이들을 구하다 희생된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도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교실의 존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600만 국민의 서명으로 만들어진 세월호 특별법은 시행령으로 무력화되었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의 훼방으로 활동이 막혀있지만, 세월호 선원들은 이미 출소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세월호는 점점 잊혀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월호 참사로 삶이 침몰하여 가라앉은, 세월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 사이 접착제 역할

 

제일 먼저 만나고 싶었던 분은 단원고 명예 3학년 3반 ‘깨박이’ 시연이의 어머니 윤경희씨입니다.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진행된 부모님들의 삭발식에서 젊은 여성의 얼굴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광장의 고된 시간 속에서 빛나는 그분의 웃음을 뵐 수 있었습니다. 윤경희씨의 그 밝은 에너지를 청운동, 광화문, 홍대 앞, 그리고 미수습자 가족 간담회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날까,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수소문해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시연이 어머니는 광화문을 찾은 학생들과의 간담회를 준비하고, 전국의 간담회 요청을 받고 섭외 전화를 하면서, 피켓을 챙기고, 자원활동가의 생일까지 챙기느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약속 시간이 두 시간 지나서야 간신히 광장에 마련된 좁은 방에 마주 앉을 수 있었습니다. 윤경희씨는 제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이미 알기라도 하신 듯 술술 이야기를 풀어주셨습니다.


▲ 2015년 11월 4일. 광화문 광장 안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시연 어머니 윤경희씨와 마주앉았다.  ©화사

 

“은화 어머님이랑 다윤이 어머님이 2월부터 피켓을 다니셨거든요. 그때는 광화문에서 안산으로 버스가 다녔어요. 참사 1주기 지나고 어머니 두 분 다 입원하시고, 피켓도 잠깐 쉬셨다가 어느 날부터 임영호 아저씨(아들의 친구가 세월호 희생자인 분)가 다윤이 어머님을 태워주셔서 피켓을 다니시는데, 저는 (미수습자 가족들만이 아니라) 우리 세월호 가족들이 하면 더 좋겠는 거예요. 근데 다들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 거죠. 그러다 영호 아저씨가 일이 있으셔서 못하게 됐어요. 다윤이 아버님은 허리도 안 좋으시고, 지병이 있는 다윤이 어머니 귀가 안 좋으시니까, 갑자기 윙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운전을 하실 수가 없잖아요, 위험하고. 그때부터 제가 함께 다니게 됐어요.”

 

“다른 유가족들이 미수습자 가족들을 싫어해서 안 나오는 게 절대 아니었어요. 다만, 너무 조심스러워서 다가가기 어려운 거였죠. 근데 제가 가게 되면서 ‘시연아, 오늘 피켓팅 갈 거니? 언니도 태워가.’ 이래가지고 요일별로 함께 하는 유가족들이 계속 생긴 거예요.”

 

세월호 유가족들은 ‘유가족이 되는 게 꿈’인 미수습자 가족들을 어떻게 대할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쾌활한 성격에 속 깊은 시연이 어머니가 은화 어머니와 다윤이 어머니 곁에서 함께하면서, 지금은 유가족들도 적극적으로 미수습자 가족들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내가 은화 엄마였으면, 내가 다윤 엄마였으면,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뭐 하나에도 서운할 것 같은 느낌. 우리 애가 마지막에 나올까봐 모두 두려워했잖아요. 지금은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의 상황이 다르지만, 어차피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애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전화하면 얘기 들어주고, 매일 들지는 못하지만 피켓을 들고, 뭔가를 가져와달라고 하면 해주고, 그것밖에 없어요.”

 

‘유가족이 그렇게밖에 못 하냐’라는 질문

 

윤경희씨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여론에 대해서 답답한 마음도 털어놓았습니다.

 

“‘어머니 상담 잘 받고 계시죠?’ 누가 물어보는 거예요, 은화 엄마한테. 상담 안 받고 계신 부모님이 훨씬 더 많거든요. 저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굉장히 많은데 일일이 얘기해줄 수도 없고, 그게 답답하더라구요.”

 

“사람마다 이겨내는 방법이 다르잖아요?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서 밖에도 나오지 못하는 부모님도 계시고, 이제 좀 나오기 시작하셔서 분향소나 공방에 나와 계시는 부모님들도 계시고, 남몰래 봉사 다니는 부모님도 계시고, 저같이 밖에 나와서 사람들 만나서 얘기를 해야 극복이 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왜 세월호 유가족들은 다니는 사람만 다니냐?’ 얘기를 하는 분들이 계세요. 사람마다 성향이 달라서 그러는 거지 마음이 없는 게 아닌데.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이런 자리가 없으면 어디서 얘기를 할 데가 없잖아요, 저희가.”

 

“우리가 언제 남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봤겠어요, 진짜 평범한 사람들이 나오게 된 건데 무슨 법을 알겠어요, 정치를 알겠어요? 그저 내 새끼가 그렇게 죽어서 그게 억울해서 뭐라도 해야 되니까,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밖으로 나오는 건데. 우리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왜 유가족이 그렇게밖에 못 하냐’, ‘현실적이지 못 하냐’, ‘왜 어디로 끌려 다니냐.’ 그렇게 많이들 말씀하세요.”

 

저도 세월호 관련 서명을 받으면서 유가족에게 정치인의 역할을 기대하거나 냉정하고 전략적일 것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행동하기보다는 섣불리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손쉽기 때문이겠지요.


▲ 시연이가 직접 만든 노래 <야 이 돼지야>를 부르는 영상 중에서.  © 유튜브 캡쳐

 

“저 같은 경우에는 한가지예요. 아직 시연이 친구들이 바다 속에 있고, 그 아이들을 찾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뛰어다니는 거예요. 시연이가 다른 친구들이랑 자기가 왜 죽었는지 엄마가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겠지만, 제일 바라는 것은 ‘내 친구들을 부모님들이 찾아줬으면 좋겠다’ 이게 일순위일 거라고 봐요, 저는.”

 

“물론 모두 거기에 다 매달리지 못해요. ‘때’라는 게 있으니까요. 요즘 시급한 건 교실 문제거든요. 저희는 학교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네 명과 선생님 두 명을 기다려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학교가 책임지고 지켜줘야 되는데, 그게 불투명하니까 너무 속상해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단원고와 이야기하고 교육청과 이야기하고 안산 시민들과도 이야기하고 계세요. 인양 과정도 비공개로 하니까 멀리서라도 지켜보러 동거차도에도 가셔야 하고, 팽목도 지켜야 되고, 광화문도 지켜야 되고…. 할 일이 되게 많고, 한가지에 다 매달려있지 못하잖아요. 안 보이는 곳에서 움직이는 부모님도 굉장히 많고, 또 안산에서 더 많이 활동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부모님들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요.”

 

운경희씨는 다른 부모님들이 받는 오해가 가장 속상하신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고 계신 부모님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죄송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열심히 일하고 밥하고 내 새끼 배불리 먹이고,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줄만 알고 살던 평범한 부모님들이 내 새끼 억울하다고 길에 나와서 피켓 들고, 간담회 다니고… 이런 것 처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저렇게밖에 못하냐고 하는 이야기도 들리니까 요즘 심경이 복잡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우리는 활동가도 아니었고, 살림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곤 해요.”

 

희생자 가족들이 슬픔과 분노를 내딛고 세월호 진상 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어떻게 역할을 할 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일이지 그분들만의 몫은 아닐 겁니다. 그런 요구로 희생자 가족들을 힘들게 만들다니 속이 상합니다.

 

같은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의지해온 ‘세월호 가족’

 

▲ 2015년 10월 28일,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미수습자 인양을 위한 피켓을 들고 있는 윤경희씨  © 촬영: 신요섭


“그럼에도 제가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 움직이는 이유는 딱 한가지예요. 가족대책위에서 간담회 섭외를 하다보니까, 전국에서 어떤 분이 피켓팅을 하고 있고, 어떤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알게 되는데요. 미용실하시면서 8시에 문 닫고 9시에 매일 피켓팅을 하는 분도 계시고, 아침에 출근 전에 한 시간씩 대구역에서 피켓팅하는 분도 계시거든요. 그분들 말고도 훨씬 더 많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제가 움직이는 거죠. 그분들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리멤버(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세월호가 인양되고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거리에서 피켓을 드는 시민들의 모임)를 가면 거의 엄마들이잖아요. 그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 부끄러운 맘이 드는 거예요. 내가 내 아이를 잃지 않았으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것 같은데… 어머님들 정말 존경스럽더라구요. 비가 와도, 몇 백 회차 피켓을 드세요. 청운동에서 한 시간, 홍대에서 한 시간 반 들고 있어도 우린 힘든데. 그걸 매일 지방에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 보면 정말….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이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나오셨지만 지금은 달라요. 목동 사는 어느 분이 그러셨어요. ‘저희는 더이상 아이들이 불쌍해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내 아이를 안전한 나라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라고요. 모든 국민이 그런 생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월호 참사 1주기가 지나고, 메르스 사태 이후 수많은 이슈들로 세월호가 묻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윤경희씨가 아닙니다.

 

“저는 정말 힘들면 아침에 광화문으로 나와요. 다혜 어머니가 상 치르신지 한 달도 안 되었잖아요. 10월 말에 전화로 ‘시연아, 이제 언니 움직여야 될 것 같아. 언니도 이제 발로 뛸 거야.’ 말씀하셔요. 다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말이에요. 그 언니도 작년에 국회에서 저랑 매일 같이 자고 하면서 밤새 얘기하고 다 가족같이 친해졌거든요. 내일도 같이 오기로 하셨어요.”

 

시연이의 어머니는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을 구분하지 않고 ‘세월호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슬픔과 고통을 겪은 가족, 억울하고 분하고 괴로운 일들을 함께 겪으며 서로 의지해서 버텨온 진짜 가족.

 

"친척들이나 몇십 년 알았던 지인들보다 저는 세월호 가족이 더 좋거든요, 더 가족 같고. 그래서 옆에서 아무리 누가 어떻게 얘기를 해도 나는 우리 가족들 믿어요. 상황이 어려워도 우리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갈 거예요.”

 

“내년엔 시연이랑 같이 졸업할 거예요”

 

참사가 있기 전에 시연이 어머니의 삶은 어땠을까요. 윤경희씨는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녁에 수업을 하다 보니 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쉬워서, 한 달에 한 번 ‘엄마의 날’을 정했다고 합니다. 두 딸과 공연을 보거나 쇼핑을 하며 데이트를 즐기고, 시연이가 피어싱을 하고 싶다며 망설였을 때 어머니가 손잡고 가서 같은 위치에 함께 뚫고, 시연이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며 연애 상담까지 해주는 등 세 모녀가 친구처럼 지내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답니다.

 

▲ 세월호 참사 이전에 시연이와 이연이, 윤경희씨 세 모녀가 한 달에 한 번 가졌던 ‘엄마의 날’ (2014년 2월)


“시연이 중 3때, 저도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시연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 같이 졸업할 목표를 세우고 말예요. 저는 교사가 물론 교재도 중요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학원에서 애들이랑 진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부모님들이랑 상담도 많이 하고요. 자연스레 상담 공부도 하고 싶고 교육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어서 교육학과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다보니 사회복지 쪽이랑 연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복지도 같이 공부를 하고 있다가 이 사고가 난 거예요.”

 

세월호 참사가 있던 때는 윤경희씨가 교육학을 배우던 3학년 1학기 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학을 했어요. 2학기에 복학을 안 하려고 했는데, 옆에서 가족들이랑 학우들이 ‘시연이한테 너 졸업장 줘야지. 시연이가 너 공부한다고 되게 좋아했는데.’ 그래서 복학했어요. 그런데 시험보기 3일 전에 지현이(295번째로 발견된 단원고 학생)가 나온 거예요. 지현이 발인하는 날이 시험 날이었거든요. 지현이 발인하러 가서 세 과목 F를 맞고 세 과목만 통과해서 계절학기로 들어야 해요.

 

올해 4월 16일까지 리포트 세 개를 써야했는데, 그때 바빴잖아요. 삭발도 하고, 팽목도 가야하고. 그래서 4월 13일 하루에 리포트 세 개를 다 쓴 거예요. 간신히 1학기가 통과되고, 2학기도 어찌어찌하고 있긴 한데, 피켓팅이나 간담회 하러 왔다갔다 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 강의도 듣고 있어요. 점수가 잘 나오진 않죠. 그래도 내년에 시연이랑 같이 졸업하려구요.“

 

공부를 하고 계신 건 얼핏 알았지만, 이렇게 고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 줄은 몰라서 윤경희씨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잖아요. 저도 나중에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제가 가진 달란트가 뭘까 생각했죠. 저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걸 좋아해서 쉽게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평생교육사 자격증도 따고, 그러니 나중에 복지센터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석 달 전부터는 수학지도사 자격증 수업을 듣거든요. 이제 시험 봐요. 화요일, 목요일 아침에 3시간 수업 듣고 있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큰일이에요. 요번 학기에 청소년교육학과 수업을 6개 듣고 있구요.”

 

“아직 세월호 가족들과 할 일이 많은데 조금 이른가 하는 생각도 있어요. 근데 이연(시연이 동생)이가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 캠프’에 갔는데, 제가 그런 걸 처음 가본 거예요. 거기에서 봉사해주시는 분들이 노래도 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여러 프로그램을 해주시는 걸 보니까, ‘나도 저런 걸 하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한테 힘이 돼줄 수 있고 정말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저녁 숙소에서 인터넷 검색을 한 거예요. 수학지도사 과정 접수를 거기에서 했어요. 1회 차 지났는데, 그 다음다음날부터 바로 수업을 들었죠.”

 

엄마의 행동력을 빼닮아서 시연이가 노래도 만들고, 영상도 만들어 올리고 했나봅니다. 이 많은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윤경희씨의 일정을 여쭤보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청운동 피켓하러 다녔고요, 그 전에는 월요일 오전에 가족대책위 운영위 회의가 있었고 저녁에도 회의가 있었어요. 화목 오전에 수업 갔다가 간담회가 있으면 가고, 수요일에 7반이 담당인데 아픈 부모님들이 많으셔서 지난주부터 광화문 지킴이를 하고 있고, 금요일에 광화문에 오고, 주말에는 이연이와 함께 있으려 하구요.”

 

이렇게 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이 됩니다.

 

“몸은 괜찮아요. 저는 보시다시피, 많이 웃잖아요. 은화엄마가 ‘시연엄마는 안 힘들어?’ 물어요. ‘나도 힘들어. 근데 내가 언니 붙잡고 울겠어?’ 나보다 힘든 사람 붙잡고 울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진짜 힘들면 시연이한테 가서 붙잡고 펑펑 울거든요. 요즘에는 이연이 때문이라도 집에 더 있으려 하는데… 집에 있으면 계속 울었는데, 밖에 있으니까 우는 일도 많이 줄었어요. 집에 있으면 애 생각이 나서, 계속 시연이 물건 보고 정리하고 그러다보면 정말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녀가 소소한 일상을 꾸려갈 날이 어서 오길

 

지금 이 시간, 집을 지키고 있을 시연이 동생 이연이의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연이는 고1 인데요, 시연이 떨어진 학교에 들어갔잖아요. 그 와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언니가 다니고 싶어 했던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말렸는데, 이연이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이연이는 그림 그리는 앤데. 딱 입학설명회 듣고는 ‘엄마 나 시각디자인과 가야겠어.’ 그리고 들어갔어요. 공부도 잘 하고 있고, 반장도 됐구요. 물론 이연이도 아프겠죠. 엄마도 계속 밖에 나와 있고. 요즘은 학교에서도 계속 전화와요, ‘엄마 오늘 몇 시에 들어올 거야, 몇 시에 올 거야?’ 작년하고 달라요. 잘 버텨준 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죠.”

 

이연이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 모녀는 그야말로 ‘초인’ 같습니다.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범인’들을 ‘초인’으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이연이는 엄마가 꾸미고 화장하고 옷 예쁘게 입고 그런 거 되게 좋아해요. 엄마가 학원에서 일하니까 옷도 예쁘게 입고 다녔는데, 이제는 맨날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다니니까, 자기가 앉혀놓고 매니큐어도 막 발라주고. ‘얘, 엄마 사람들 만나는데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욕한다’ 그러면, 왜 욕하냐고, ‘매니큐어 바르는 데 왜 욕해?’ 그러면서 막 발라주고 해요.”

 

▲ 2015년 11월 4일.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찾은 장곡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세월호 가족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가 끝나고 학생들에게 416기억 팔찌를 나눠주시는 윤경희씨.   © 화사

 

사실 윤경희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일정을 잡으면서도 어떤 질문을 해야할 지 막막했습니다. 시연이 어머니를 처음 뵙고서 한참 후에 알게 된 일인데, 저와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더 마음이 쓰이고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래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고통을 경험한, 세월호 가족들의 ‘막내’로 씩씩하게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 사이에서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는 윤경희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연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체 우리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대와 요구가 과연 정당한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연이 어머니가 ‘시연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아직 한창 젊고 밝고 힘 있는 사람 ‘윤경희’로서 꿈을 이루고 살아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이전처럼 딸과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무엇보다 세상의 수많은 기대와 편견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이 가장 먼저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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