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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연탄과 함께하는 글쓰기치료(1) 나와의 대면, 나와의 소통

 

 

※ 글쓰기 치료를 전공하고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연탄’이 글쓰기를 통해 과연 심리적 치유가 가능한지, 글쓰기 치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왜 굳이 글쓰기 치료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은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에서 따온 별칭이다. 
 

‘연탄’은 내가 누군가와 글쓰기 치료를 시작하면서 사용하게 된 별칭이다. 얼굴이 그리 하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의 피부색에서 따온 별칭은 아니다. 스물 즈음 접한 안도현 시인의 연탄을 소재로 한 시가 준 성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그저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서 자칭하고 다니고 있다. 또 누군가와 나를 이어주는 매체가 ‘글’이었으면, ‘따뜻한 글’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글이란 나에게 무엇일까. 살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던진 질문이다.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 즉 종이 위에 나타난 단어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인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내 목소리를 갖는 것과 같다.” 글쓰기 치료에 참여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정확히 공감한다. 내가 글로 인연을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나’에게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내가 처음 글쓰기 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건강이 안 좋아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마침 예전에 취재원으로 인연을 맺었던 탈(脫)성매매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나는 심리치료 전문가도 아니었고 상담 관련한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처음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주저했지만, 쉼터 측에서도 그저 ‘글쟁이’로서 쉼터 입소자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해주길 원했다.

 

아마도 우리는 ‘글’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글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두 번의 불행한 사건을 통해 그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발생한 군산 대명동 성매매집결지 화재 참사와 2002년 1월에 발생한 개복동 유흥주점 화재 참사에서 여성들은 감금된 채 희생되었고, 현장에서 이들의 일기장이 발견되었다. 이들이 남긴 일기장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고,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날고 싶다. 훨훨 새가 되어 꽉 막힌 곳을 벗어나. 베란다 중앙에 있는 새장을 보았다. 외로운 새 한 마리가 보였다. 날 보는 것만 같았다. 창살 틈으로 새가 말한다 짹짹. 그 모습은 내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남들이 알아들으면 어찌할 방법을 가르쳐줄 텐데. 아무도 모른다.” (대명동 화재 희생자의 일기 중)

 

“… 비둘기야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언젠가 니가 나한테 이야기했었지. 나갈 수 있냐고. 난 도무지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어. 입장이 난처했지…” (개복동 화재 희생자의 일기 중)

 

쉼터에서 두 달간 진행한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해맑은 얼굴의 참여자들을 만났다. 처음 글쓰기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을 때, 참여자들은 문장력을 요하는 글짓기로 오해해서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글을 잘 쓸 필요가 전혀 없고 단지 자신에게 솔직해질 용기가 있으면 된다는 것을 차츰 이해하기 시작했다.

 

참여자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노라고 했고, 나중에 자신이 직접 쓴 시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뒤 그녀는 “잊고 지냈던 글이 힘든 내게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후기를 남겼다.

 

사실, 글쓰기 프로그램은 참여자들보다도 오히려 나에게 의미가 컸다. 당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던 내게 에너지를 되찾아주었고, 인생의 전환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매주 프로그램을 위해 쉼터로 가는 길에 느꼈던 설렘과 즐거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글쓰기 치료’라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글쓰기로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는 ‘글쓰기 치료’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글쓰기 치료라는 것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 한 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장애인 재활 쉼터를 통해 또 다른 인연을 만났다. 근육병을 앓고 있는 10대들이었다.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근육병은 나에게 생소한 병명이었다. 근육병은 온몸의 근육이 점차 약해지고 마비가 되면서 언제 호흡기관마저 기능이 멈추게 될 지 모르는 치명적인 병이다.

 

첫 만남에서 아이들은 모두 휠체어에 의지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낯선 나의 눈길을 피하거나 혹은 조심스럽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에 우리는 온라인상으로 글쓰기 치료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내가 벌써 이 병을 앓은 지 10년이 넘었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병 때문에 잃은 거는 평범한 일상 생활… 학교 갈 때 친구들과 같이 등교하는 거. 집에 갈 때 친구들과 같이 하교하는 거. 학원 같이 다니는 거. 학교에서 화장실 갈 때 같이 가는 거. 점심 먹으러 같이 가는 거. 매점 같이 가는 거.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수다 떠는 거. 그리고…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거…” (10년째 투병중인 14세 소녀)

 

“친구들이 많이 안 생겨서 힘들 때가 많았다. 너무도 힘들고 괴로워서 그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너무 우울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너무 힘들었던 세월이었다.” (10년째 투병중인 16세 소년)

 

“척추보다 신경 쓰이는 건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직까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나 봐요. 사실 몇 주 전에 쉼터에서 두 번이나 울었어요. 누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선생님들이 좀 웃으라고 말했을 뿐인데 눈물부터 나더라구요…” (8년째 투병중인 15세 소녀)

 

프로그램 초기에 아이들은 우울함, 답답함, 무기력감 등을 표현했다. 진행성이면서 치명적인 근육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겐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아이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고, 점차 자신과 현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글쓰기 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엔 이렇게 해서 어떻게 치료를 한다는 건지 알쏭달쏭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썼던 글들을 떠올리며 불안감과 우울함을 떨쳐버리려고 했던 적이 있었네요.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구요…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생각을 항상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각이 꼬여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는데 글로 정리를 해보니 좋았어요.” (8년째 투병중인 15세 소녀)

 

“2020년 0월 00일(미래일기). 제 나이 28살이네요. 좋은 약이 나와서 걷게 되었지요. 제 생일이에요. 휠체어를 안 타고 조금씩 걸으니까 축하해 주시는 분들도 많네요. (중략) 허허. 내 나이 28살인데 아직도 풍선을 사왔네요. ○○공원도 산책하고 영화도 보고 삼겹살 파티도 했어요. (중략) 저는 헤비메탈 가수가 되어서 지난 날 나처럼 아픈 아이들한테 용기를 잃지 않도록 희망을 전하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엄마가 멋진 상을 차려줬어요.” (9년째 투병중인 17세 소년)

 

오랜 투병 기간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절망 속에 있었던 아이들은 글을 쓰면서 차츰 숨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고,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꿈꿔볼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는 아이들에게 삶의 가능성,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길을 제공해주었다.

 

글쓰기로 존재를 확인하는 인간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Scribo ergo sum) 내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인데, 미국 문학이론가 로버트 숄스(Robert Scholes)의 말이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이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은 카카오톡, 트위터, 페이스북 등 수많은 메신저나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글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때론 일방적인 배설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미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인도하는 치유의 과정은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

 

글쓰기 치료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간단한 목록 쓰기나 편지 쓰기, 일기 쓰기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정리된 글로 발전시킬 수도 있고, 나아가 창의적인 글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 안의 에너지와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 새로운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 있다면 족하다. 글쓰기는 결과물보다는 그 ‘과정’에 가치가 있다. 진정한 나와 마주하는 진실한 시간이 주는 치유력을 믿는다. 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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