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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세레모니, 우리가 잊었던 기억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 영원한 봄의 나라를 추억하며②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스페인어가 아닌 다른 언어, 다른 세계를 만나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셸라에 체류하기 시작했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어가 아닌 또 다른 언어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루페를 알게 된 것은 한 카페에서였다. 루페는 그림을 그리고 마사지 세라피를 하는 삼십 대의 여성이었다. 과테말라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생각이 많이 열려 있었고 대화도 잘 통했다. 그녀는 정식으로 그림을 전공하지 않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림 그리기에 입문하여 이미 전시회도 여러 번 치른, 재능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 덕분에 음악을 하는 친구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 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들의 크고 작은 행사에 함께하게 되었다.
▲ 화가 루페. 그녀는 마야 세레모니 정신을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저항이자 대안으로 삼았다. © 루나
루페가 사는 곳은 셸라의 도심에서 비교적 한적한 지역에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은 산동네 같은 드넓은 언덕 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안에 루페네 가족들이 사는 낡은 집이 있고, 다른 친족들 역시 마찬가지로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콜로니얼 스타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일종의 씨족마을 같은 것이었다.
“저기는 삼촌 집, 그 옆은 고모 집, 그 옆은 사촌 집이야. 인사하러 다니자.”
나는 루페의 그림들을 이 공동주거 환경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려 했다. 셸라의 골목길, 전통 가옥들을 그린 구상화 그리고 수많은 추상화들. 예술과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그녀의 남다른 애정이 이 환경을 모태로 길러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러한 환경에 대한 반감으로 길러졌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는 나한테 지정된 땅이야. 조만간 내 집을 지어야 하는데 아직 돈이 모자라. 엄마 눈치 안 보고 맘대로 음식도 해먹고 내 집기들도 들여놓고 제단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번 전시회 때 그림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녀는 그림 판 돈을 집짓기를 위해 저축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가 정말로 특별한 액티비티에 나를 초대했다.
“루나, 마야 세레모니에 안 가볼래?”
마침 나는 몇 달 전 멕시코에서 아파치(Apache) 세레모니에 참여하고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세레모니에 막 눈을 뜬 상태였기에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야의 세레모니가 무엇인지 내게 묻는다면…
어느 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울퉁불퉁 산길을 지나 모모스테낭고(Momostenango)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한 무리의 현지인들이 등에 봇짐을 잔뜩 지고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말없이 용달차에 올랐다. 우리는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낯선 이들을 따라, 달빛과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어두컴컴한 산길을 묵묵히 올랐다. 그들은 등산복과 등산배낭 등의 장비를 갖추기는커녕 모모스테낭고 전통 의상을 입고 박스를 양 어깨에 번갈아 지면서 걷고 있었다. 심지어 몇 여성들은 전통 치마에 전통 샌들까지 신고서 산을 올랐다.
▲ 산 정상의 제단에서 시작된 마야의 세레모니 © 루나
이윽고 서너 시간 뒤, 산 정상의 제단에 이르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키체(K’iche)어야. 마야 조상들이 쓰던 언어이고 이 지역 사람들의 일상용어야.”
수많은 흰 초, 노란 초, 붉은 초, 파란 초, 검은 초, 알 수 없는 향을 풍기는 고형의 사물들과 로즈마리, 솔잎 등의 식물들, 사탕, 초콜릿, 설탕, 럼주 등이 제단의 불 속으로 던져졌고 그들은 스페인어와 키체어를 섞어 기도를 계속했다. 나는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도 가난한 나라에서 이렇게도 많은 물건들을 불 속에 던져 넣다니, 게다가 산 정상에서 이렇게 몰래 큰 불을 피우다니….
그러나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몇 달 후 루페가 다시 마야 세레모니에 나를 초대했을 때 또 따라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세레모니를 집전한 사제는 키체어에 능통하지 않은 내 또래 여성이었다. 장소도 셸라 부근이었고 참여자들도 모두 내가 아는 루페의 동료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보다 친숙한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세레모니를 이해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세레모니가 어떤 순서로 진행되고 각각의 제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자연계의 어떤 기운과 화합하며, 마야의 신과 달력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세레모니에 참여하는 이들이 비는 소원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이 행사에 남몰래 참여하는지.
“내 삶의 미션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주세요. 음악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지원해주세요.”
“어머니가 슬픔을 잊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사촌이 꾸어간 오백 케찰을 빨리 갚게 해주세요. 지금 제가 돈이 급합니다.”
“이 세레모니에 참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애인과 말다툼을 하고서 이곳에 왔어요. 나의 부정적인 기운을 깨끗하게 청소해주세요. 화의 기운을 갖고 이곳에 서게 된 것을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끝까지 품고 있었을 자식 걱정을 이제 모두 떨치고 가도록 해주세요.”
▲ 어두운 밤 세레모니 뒤에 맞는 여명은 언제나 신비로운 그 무엇을 지니고 나타난다. © 루나
세레모니 참여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정신도 내 존재에 스며들어갔다. 가진 것을 저축하고 소위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또 순환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자본주의 경제활동’이라 한다면 이 세레모니의 ‘낭비’는 완전히 반대로 가는 움직임이라고 해야겠구나, 이 아낌없는 ‘허비’는 헌납이고 희생이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기운을 존중하고 그 기운과 하루하루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탈 없이 행복하리라는 것, 누군가 내게 마야의 세레모니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간단히 그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죽은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하자”
어느 날 마야 스승 중 한 명인 앙헬이 나의 가족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전쟁 통에 그의 아버지와 형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생 끝에 서울에 정착했고, 고향을 떠난 이래로 헤어진 그의 어머니와 여자형제들 소식은 결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 모두가 겪은 역사이고, 비교적 최근에 겪은 식민 경험과 동족 간 전쟁이 한국 현대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려서 이젠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는 것도 다들 귀찮아하고 다시 전쟁이 일어날까, 언제 통일이 될까 신경도 안 쓰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또한 나의 부모 세대들은 자신들이 겪은 가난과 배고픔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으로 잘사는 나라 한국을 이룩했고, 지금까지도 자식들이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까 노심초사라고 내가 얘기를 마치자, 앙헬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마야 사제 비르히니아의 젊은 시절 사진첩을 보면서 마야의 풍속에 대해 듣다. © 루나
“루나, 네 아버지 어머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름을 여기 적어봐라. 너의 가족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겠다. 그리고 전쟁으로 죽은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하자.”
앙헬은 죽은 자들과의 관계 맺기에 대해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자신들이 잊혀지는 것이라고. 여기에 이렇게 그들이 좋아하는 제물을 갖다 태움으로써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슬픔이 많았던 생일수록 더 많이 기억해주어야 한다고 앙헬은 말했다.
식민시대 이전의 마야의 정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
그때부터 나는 거의 한 번도 제대로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 가족의 역사, 한국인들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방 안에서 한국의 민요를 듣기 시작했고, 루페는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유사하다고 감상을 밝혔다. 나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잠들어 있던 모든 부분들을 깨우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는 셸라의 요가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공동체들과 연결되는 계기를 만났다. 그 공동체들은 과테말라의 전통과 상관없는, 이를테면 인도의 구루를 스승으로 둔 명상 모임 혹은 비교(祕敎)라고 할 수 있는 모임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른 모임들에 대해 배타적이기도 했고, 때로는 우호적이고 통합을 지향하기도 했다.
▲ 모모스테낭고 마야 사제들의 유쾌한 식사. 마야의 사제들은 아주 소박하고 평범하다. © 루나
“다른 사람들에게 씨앗이 되기 위해 우선 네가 빛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통합을 지향하는 나의 스승은 그렇게 나를 가르쳤다. 그리고 나를 통해 아시아의 영성이 무엇인지, 특히 불교가 무엇이고 유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다. 마야의 영성과 아시아의 영성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야의 사제들은 다른 종교의 사제들과 달리 아주 소박하고 평범하고 신경 쓰는 계율도 별로 없다. 술을 아주 좋아하는 사제, 젊은 여자들을 좋아하는 사제도 수없이 보았다. 위탁을 받고 남에게 해를 가하기 위한 세레모니를 집전하는 사제들도 있었고, 세레모니를 위탁받을 때마다 거금의 돈을 받는 사제들도 있었다. 반면 이름을 떨치는 사제임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내가 만난 공동체처럼 마야의 정신을 되살려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자연과의 조화와 행복을 되찾아야 한다고, 일종의 사회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루페와 그녀의 젊은 이삼십 대 친구들은 마야 세레모니 정신을 서구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Alternative)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젊은 사제는 생명의 본질을 경시하는 서구 문명을 반대하는 랩을 키체어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고, 마야 조상과 정신을 소재로 하여 밤마다 온 도시 벽에 그래피티를 그려대곤 했다.
차별대우 속에, 부족 언어를 잃어가는 원주민들
▲ 키체 소녀 솔레다드. 언젠가 널 만나러 갈 것이다. ©루나
그러나 과테말라인 대부분은 마야 세레모니와 달력에 대해서 나보다도 잘 몰랐다.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반감까지 갖고 있었다. 나더러 마법이라도 부릴 거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민족주의가 보수주의 우파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살다온 나에게 그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과테말라는 전체 인구의 반 정도가 원주민이고, 이 원주민들은 이삼십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부족이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 키체인을 예로 보자면 그들은 보통 가족들끼리 있을 때 키체어를 사용하지만, 외지인들과의 모임이나 직장에서는 공용어인 스페인어로 의사를 소통한다. 말하자면 바이링구얼(bi-lingual)인 셈이다.
오늘날 많은 키체인들은 자식들에게 키체어를 가르치지 않고 집안에서도 스페인어만 말하게 한다. 그들에게 바이링구얼이라는 의미는 키체인 원주민이라는 의미이고, 원주민은 어느 공식 사회에서든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아는 많은 키체인들이 키체어를 말할 줄 몰랐다. 앙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키체어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앙헬은 아주 적은 단어 지식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키체어를 이어받지 못한 후손임을 늘 애석해했으며, 세레모니 기도문으로써 키체어를 조금씩 익혀갔다.
과테말라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구 국가에서 온 친구들이 아시아의 종교와 영성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내가 알기로 아시아의 영성적 요소는 일찍이 서구 사회로 유입되어 일종의 뉴에이지적인 것으로 통합되어 거꾸로 우리에게 역수입되고 있다. 서구 사회에 갔다 왔으니 모든 것이 자본주의와 결탁되어 선보여지는 건 당연하다. 더욱이 경쟁사회인 한국에까지 왔으니 상업적 요소는 배가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런 불순물들이 함유되지 않은 우리만의 본질과 뿌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얼마만큼 유의미한지는 잘 모르겠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하여 새로 짓기를 반복할 수 있는, 한국인의 역사적으로 길러진 근성과 대대로 이어져오는 재주가 나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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