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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게 없어도 기뻐하는 사람들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 영원한 봄의 나라를 추억하며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떠나온 곳의 어떤 것들을 몹시 그리워하며

 

일 년간의 세계일주, 그것이 2008년 봄 한국을 떠날 때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에 돌아온 것은 2014년이었고 내가 6년간 밟은 나라들은 여섯 국가도 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출판사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했던 나는 다시 출판사 편집자로 복귀해서 일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넘는 한국생활을 통틀어 나는, 내가 없던 6년 사이 변해버린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따라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고, 또 6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 모든 것들을 다시금 받아들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  과테말라 셸라에 살 적에 매일 들르던 '카페 라 루나'에서 집으로 가는 길.   © 루나 
 

돌아보건대 나는 바깥에 있는 동안 한국의 어떤 것들을 몹시 그리워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떠나온 곳의 어떤 것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안 좋은 것은, 한 곳에 살면서 다른 곳을 그리워하는 거야.”

 

사십 대 후반의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에 한국으로 돌아와 ‘적응하는 데 딱 5년이 걸렸다’고 했다. 귀국 초기부터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고 싶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으나 길이 열리지 않아 결국 한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때가 귀국 5년째 되는 시점이었단다.

 

“그래도 한국이 살기 좋은 곳이더라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얘기하게 될까?

 

특별한 미래의 사연을 준비한 채 나를 맞은 ‘셸라’

 

여행을 떠나고서 일 년이 지났을 때, 나는 과테말라의 아티틀란(Atitlan)이라는 커다란 호수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온 한 여행자는 전형적인 ‘히피 행색’에 잠시 소풍이라도 나온 듯 배낭이 아주 단출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배낭에서는 코펠, 버너, 밀가루 봉지, 돌돌 말린 멍석 돗자리 등이 마술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는 매일 밀가루를 직접 반죽해서 차파티라는 인도식 빵을 구워 먹었고 빵을 빚을 때마다 “차파티! 차파티!”라고 경쾌하게 외쳤다. 그가 8년째 여행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놀란 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8년 동안 여행하는 것 아주 쉬워. 간단해.”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을, 시간이 얼마 흐르고서 저절로 이해하게 되었다. 몇 주 뒤 내 여정이 닿은 셸라(Xela)라는 도시는 특별한 미래의 사연을 준비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4년 넘게,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부터 시작된 여행은 눈 깜짝하는 동안 일 년이 넘어갔고 나는 이제 막 북미를 떠난 참이었다. 미국과 캐나다가 워낙에 넓은 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시간 계산에서 빠뜨렸던 중요한 요소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었다.

 

▲  셸라의 스케이트보드장. 마야의 새인 '케찰'(Quetzal)의 그래피티가 있다.   © 루나 
 

셸라는 중아메리카에 속하는 국가인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지만 한국인이 보기엔 턱없이 작은 도시이다. 케찰테낭고(Quetzaltenango)라는 공식 지명을 갖고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를,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마야(Maya) 이름인 ‘셸라’라고 부른다. 해발 2,330미터에 자리 잡은 도시답게 날씨는 서늘한 편이지만 히말라야 같은 풍광을 기대해선 안 된다. 맥도날드도 있고 월마트도 있고, 멕시코 등 다른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티브이 드라마가 인기이고, 다수의 젊은이들이 테크노와 힙합 뮤직을 스마트폰을 통해 즐겨 듣는다.

 

다른 한 편에는 과테말라의 전통문화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데 이 전통이라는 것은 스페인 식민시대 이전의 마야 문화와 이후 스페인이 유입시킨 가톨릭 문화로 구분된다. 과테말라는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821년까지 거의 3백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는데, 바다 건너에서 들어와 마야를 절멸하고 이식된 이 식민문화의 영향은 기나긴 세월 동안 집단 무의식과 정서적 뿌리에까지 각인되어 있다.

 

도시의 구획은 유럽의 옛 도시 모양을 딴 전형적인 콜로니얼 스타일(colonial style)로 많은 이들이 이 거리 구조에 매혹된다. 나도 그랬다. 어둡고 구불구불하고 좁은, 미로 같은 골목길,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가게들의 불빛, 그리고 자동차나 사람이 아닌 말들이 다니기 위해 조성된 돌바닥.

 

내가 셸라에 한 달 이상을 머물게 된 첫째 이유는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여행할 중남미국가들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었기에, 보다 나은 여행을 위해 스페인어 습득이 필요했다. 셸라는 스페인어를 적절한 속도와 명확한 발음으로 사용하는 지역인 까닭에 많은 외국인들이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 위해 체류하는 곳이었다.

 

최소 이삼 주를 머물다 보니 이런저런 인연과 낙천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한 달을 더 머물고 그러다 일 년을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향을 떠나 임시 정착하게 된 외국인들의 갖가지 공동체도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공공연하게 셸라의 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어울려 사는 허름한 공동주택에서

 

“치나! 치니타!”

‘중국인’을 뜻하는 치노(chino, 남성형), 치나(china, 여성형)라는 단어를 그곳 사람들은 모든 아시아인들을 가리켜 불렀는데, 4년 넘게 살도록 길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여기 한국에서도 아시아인처럼 생기지 않은 외국인만 보면 무조건 “미국사람이다!”라고 소리친 시절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외국인을 향해 힐끔거리거나 손가락질하기가 부지기수이니, 용납할 법도 한데 말이다.

 

▲  “내가 살던 곳”  바람 부는 어느 아침 내 방문 앞에서.    © 루나 
 

셸라에서 내가 살던 곳은 바깥 거리와 다른 공기가 떠돌았다. 외국인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허름하고도 전원적인 일종의 공동주택이었는데 여덟 개의 개인 방이 있고 널찍한 마당, 주방, 욕실 등을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주로 북미와 유럽에서 온 이삼십 대의 이 젊은이들이 셸라에 터를 잡은 이유는 가지가지였다. 긴 휴식 기간을 갖고 스페인어를 배우거나 각종 단체 자원 활동을 하러 온 사람들, 일자리 때문에 이곳으로 파견된 사람들,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자리를 잡은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외지에서 경험도 쌓고 저렴한 생활비로 살아보고자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

 

나는 과테말라와 셸라에서 경험한 것들을 어느 정도 일반화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 경험들을 일반화시키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와 한 집에서 오래 살던 육십 대의 미국인 리차드가 왜 자기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과테말라라는 땅에서 진정으로 구했던 것은 무엇인지, 나는 그 고유한 이야기에 나름 깊숙이 관여했기에 그것을 또 다른 고유한 사연과 비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견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갖고 돌아온 나는 그래서 지금까지도 누군가 과테말라에 관한 이야기를 물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막막해 간혹 눈시울까지 화끈거린다.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 된 ‘요리’

 

과테말라의 날씨를 두고 ‘영원한 봄’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낮에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 아침 일찍 넌 빨래를 점심식사 후 걷어 개킬 수 있지만 땀이 나는 경우는 뛰지 않는 한 결코 없다. 새벽과 밤에는 추워서 스웨터를 껴입어야 하지만 난방기구가 절실하진 않고 눈이 내리는 법도 없다. 우기와 건기가 일 년을 6개월씩 나누지만 연교차는 심하지 않다. 연중 서늘한 봄가을 날씨도 나를 셸라에 오래 머물게 한 조건이었다.


▲  "나의 이웃"  셸라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   © 루나 
 

현지인들은 혼자 사는 아시아 여자인 나에게 꽤나 친절했다. 영어권 국가나 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은 그들끼리 영어 의사소통이 나보다 훨씬 수월했다. 그 점이 나를 상대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더 가깝게 만들었다.

 

아시아인들이 워낙에 드물고 한국인은 더욱 드물었기에, 외국인들끼리 모인 작은 일행 속에 내가 끼었다 치면 무조건 “우리는 분위기가 굉장히 인터내셔널해!”라며 반겼다. 내가 공동부엌에서 먹을 것을 요리하고 있으면 그것이 그저 야채볶음에 지나지 않는 경우라도 모든 이웃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시아인의 건강 식단을 확인하고 싶어 했고 맛보고 싶어 했다.

 

그것이 나를 부엌에서 불편하게 했든 편안하게 했든 간에 나는 부엌이라는 공간이 언제나 필요했다. 음식 만드는 일이 내게 에너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사온 다채로운 식재료들을 만지작거리면 재료들의 기운이 손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것들을 씻고 자르고 볶고 무치고 있으면 잡념들이 사라지고 생각들이 고요히 가라앉으면서 새로운 용기도 솟고 심지어 아이디어나 문제의 해결책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온갖 양념들을 계량 없이 눈대중으로 뿌려댄 맛이 그럴싸하게 나올 때면 연구실에서 실험에 성공한 사람처럼 자신감이 극도로 상승했다. 언어로 충분히 소통할 수 없었던 조건 속에서 나를 오롯이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할까.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아무도 내가 요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면 그들도 코웃음을 치며 그 얘기를 믿지 않았다.

 

차티네 식구들과 매일 또르띠아를 먹으며

 

한 달쯤 지나 과테말라 남자 애인이 생겼다. 그는 알코올 중독이었고 여성편력이 심했고 거식증이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지내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했고, 일주일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한 아들의 안부를 내게 물었다.
 

▲ 차티네 식탁. 과테말라 식단은 메인플레이트와 옥수수가루를 빚어 만든 또르띠아 또는 따말로 이루어진다. © 루나 
 

스페인어를 잘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나는 그들의 부엌일 돕기를 선호했다. 말없이 미소만 짓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또 그 어머니의 애환에 내가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의 어머니 ‘차티’는 적은 예산을 갖고 식탁을 정갈하고도 맛깔나게 차려내는 과테말라 여성이었으니, 나는 과테말라의 일상적 식단을 매일 대접받는 행운뿐만 아니라 그 요리를 실습하고 식탁 문화에도 참여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과테말라의 식단은 메인플레이트와 옥수수가루를 빚어 만든 또르띠아(Tortilla) 또는 따말(Tamal)로 이루어진다. 또르띠아나 따말은 굳이 한국 식탁에 견주어 설명하자면 쌀밥과 같다. 즉 양념 없이 빚고 메인플레이트의 고기, 야채, 콩, 쌀 등에 곁들여 먹는다.

 

셸라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또르띠아나 따말을 직접 빚지 않고 집 근처 또르띠아 가게에서 끼니 직전에 따끈따끈한 채로 사와, 식지 않게 천으로 덮어 식탁에 낸다. 밀가루가 아니라 백 프로 옥수수가루로 만들었기에 소화도 잘된다. 한국인들이 ‘밥심’으로 살듯이 과테말라인들은 또르띠아로 에너지와 포만감을 구한다.

 

차티네 식구들과 또르띠아를 매일 먹는 것은 내 영혼 한구석을 과테말라의 정신과 무의식으로 물들여갔다. 또르띠아는 담백하고 맛있었고 점점 더 맛있어졌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소피아, 내가 셸라에서 만난 행운의 여신. 큰딸의 세 살 먹은 딸, 우울한 심해 같은 집안 공기를 상어처럼 흔들어 모두에게 활력과 기쁨을 주는 어여쁜 그 아이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부엌일을 포함한 내 행동을 전부 따라하니, 집안사람들은 결코 이 상황을 예사롭게 넘길 수 없었다. 아이의 중요한 심리적 발달 단계에 갑자기 내가 가족 드라마의 출연자로 나타났던 모양이다. 소피아가 “루나, 루우나아!”를 외치며 다니자 차티도 다른 가족들도 차차 내게 마음 내밀한 곳을 열어 보여주었다.
 

▲  소피아. 나는 그곳에서 그 시절 너와 함께 성장하였다.   © 루나 
 

어느 날 차티가 식사 후 차를 마시면서 친족 성추행 등으로 불행했던 고향의 어린 시절, 찌들어지게 가난했던 결혼 초기, 평생에 걸친 남편과 아들의 거짓말 등의 이야기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어떤 어려움과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존재의 기품, 그것은 아름다운만큼 슬픈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느낀 것 같다.

 

성장, 머나먼 곳에서 ‘가족’이 되는 경험

 

내가 다니던 스페인어학원은 원장인 로사의 집이기도 했는데 싱글맘인 그녀 로사는 수업이 끝나고서 나를 자기 주방에 종종 불러 앉혀 역시 또르띠아와 함께 점심을 먹였다. 칠십을 바라보는 그녀의 어머니, 주방의 모든 권리를 쥐고 있는 이사벨이 어느 날 나를 부엌 안으로 들여 또르띠아 빚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사벨을 “엄마”라고 부르고 로사를 “언니”라고 부르고 로사의 딸 다니엘라를 “조카”로 부르기 시작했다.

 

가족이 단출하여 그런지 사람 불러들이기를 좋아하고 손도 큰 로사를 언니로 둔 덕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일파티, 결혼식 등 각종 집안행사, 동네 축제에 초대되었다. 어느 잔치에서나 나는 먹기도 잘 먹었고 부엌일도 잘 거들었다. ‘깔끔한 한국인’답게 설거지도 열심히 했고, 큰 잔치에 필요한 수많은 과일과 야채들도 잘 손질했다. 언어소통이 모국어만큼 원활하지 않으니 잡념도 압박감도 덜 들어오는 듯했다.

 

“루나, 바쁘냐? 다음 주 종교 축제 주간에 마실 전통음료를 만드는데 손이 필요하니 이번 금요일에 아침 열시부터 와서 일 좀 해. 우리랑 점심도 먹고.”

 

어머니 이사벨이 나를 망고 백 개가 쌓인 주방에 들여앉혔을 때 마치 동화 속 콩쥐라도 된 기분이었다. 망고 백 개의 껍질을 다 까고 난 뒤에는 한 달 동안 오른손 손가락 감촉이 마비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게 좋았고 그런 식으로 가족이 되어가는 게 뿌듯했다.
 

▲  로사네 가족. 어머니 이사벨은 2012년 1월 1일 아침, 만 칠십 세로 작고하였다.    © 루나 
 

물론 가족이 되어가는 것은 책임을 요구하기도 했고 가슴이 쓰라린 순간, 원망의 눈물을 남몰래 훔쳐내는 순간, 심리적 위기의 순간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국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가족과 살아냈던 것이다. 가족중심주의를 비난해왔던 내가 어째서 머나먼 곳에서 가족을 다시 배우게 된 걸까. 언어 수준이 어려지고 거의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진짜 피를 나눈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는지도.

 

과테말라의 이 부엌 저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나니 시장 보는 것도 능숙해졌다. 현지인 뺨치게 흥정을 일삼으며 당당하게 시장을 한바탕 돌고 나면 다채로운 과일과 야채의 생명력이 내 존재를 파릇파릇하게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과테말라 전통수공예품 생산자인 원주민 여성들의 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시작했고, 아침 일찍 샌드위치를 만들어 카페에 납품하는 작은 사업에 착수했으며, 그 밖의 여러 모임에 참여하고 수많은 이들을 수차례 집으로 초대하여 내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갔다. 내 정체성과 가능성은 제로 시점에 선 것처럼 새롭게 성장기를 그려갔다.

 

정기적인 축제와 행렬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

 

우리에게 추석이나 설날 같은 큰 명절의 실질적 의미가 일을 쉬는 연휴 기간이라면, 과테말라인들에게 세마나 산타(Semana Santa, 부활절)는 말 그대로 성스러운 종교 축제 기간이다. 사람들은 종교 행렬을 좋은 자리에서 관람하기 위해 서너 시간 전부터 거리에 의자들을 놓아두고 가족끼리 돌아가며 자리를 맡는다.

 

이 행렬은 매년 똑같은 순서에 똑같은 모양으로 치러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년 똑같은 것을 보는 데 열광한다. 종교적 열정 이상의 무엇이 거기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세마나 산타(Semana Santa, 부활절) 축제의 행렬    © 루나  


독립기념일에도 거대한 규모의 거리퍼레이드가 치러진다. 역시 매년 똑같은 순서를 따른다.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의 행렬이 있는 날,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장소, 모두 작년과 동일하고 다음 해에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웬만한 현지인들은 퍼레이드의 일정을 꿰고 있을 수밖에 없다. 꼬마들에서부터 장년 이상의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행렬에 참여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기고, 수십 년이 지나도 무용담처럼 그때 그 순간을 얘기한다.

 

셸라에 체류한 지 몇 년이 지나고서 나는 그들의 정기적인 잔치와 행렬을 향한 열정이, 마치 때가 되면 싹을 내고 잎을 돋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해마다 헌신적으로 반복하는 나무와 같다고 생각했다.

 

과테말라인들의 또 다른 명절인 ‘죽은 자들의 날’이 돌아오면 빵과 초콜릿을 선물로 주고받고 ‘피암브레(Fiambre)'라는 음식을 돈과 열의를 바쳐 만들어 먹는다. 무덤마다 화려한 빛깔의 꽃들을 몇 다발씩 꽂고 아이들은 연날리기를 즐긴다. 크리스마스엔 쌀가루로 만든 ’파체스(Paches)'를 해먹고 서로 선물한다. 파체스가 많이 들어오면 이웃들과 나눠먹을 수 있으니 많이 가질수록 좋아하고 나도 그랬다.

 

그들은 노동과 헌신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으며, 해마다 행사에 새로운 게 없다고 지루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속도로 일상을 운용해가고 새로운 아이템을 계발하는 데 경쟁적인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나의 가슴에 그 고요한 기쁨의 규칙은 파문처럼 번져갔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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