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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에 대한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삶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 각자의 아름다움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들어봅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처음으로 나의 외모를 인식하게 된 때

 

“이상적으로 말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희생에 동의하는 것이고, 지나친 요구를 단념하는 것이며, ‘세계의 질서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자율적이 되려고 애쓰고, 자신에 대하여 초연한 만큼 자신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파스칼 뷔뤼크네르(Pascal Bruckner) <순진함의 유혹>


▲  프랑스에서 내가 거주했던 도시 벨포르 Belfort, France (2011년 11월)   © 정두리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96년에 ‘공주병’이라는 신조어를 알게 됐다. 처음에 공주병은 자신 스스로를 ‘공주처럼’ 예쁘다고 인식하는 현상이었다. 이때만 해도 외모를 평가하는 표준적 혹은 절대적 척도가 있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미인을 특정 연예인의 모습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비유적으로 표현했는데, 가령 보름달 같이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이라든지, 사과같이 예쁜 얼굴, 앵두같이 붉은 입술처럼 말이다.

 

공주병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배제한 채 오로지 자신의 평가만을 적용하며 타인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착각하는 증세를 이르는 말로 쓰였다. 그러다가 부정적으로 인식해야할 ‘병’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사랑하는 자신감 있고 당당한 태도라는 의미가 더해지기도 했다. 연예인 김자옥은 공주풍의 드레스를 입고 “공주는 외로워”를 불렀고, 얼마 후에는 남성들을 칭하는 ‘왕자병’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 당시 이성(異性)에 대한 발견과 맞물려, 우리 반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좋아하는 이성을 1순위에서 3순위까지 공개적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는데, 순위를 매기는 첫 번째 기준은 외모였다. 이때가 내가 처음으로 아름다운 혹은 아름답지 않은 외모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시기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나 자신의 외모를 인식하는 것으로 직결되었다.

 

여학생님, 부디 예쁘시기를

 

외모에 대한 인식과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선망은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이어졌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학교, 시내, 거리, 대중매체 속에는 항상 예쁜 여자들이 많았고 또래 친구들과 서로 완전한 타인의 외모를 일상적인 화제로 삼았다.

 

어느새 모두가 갈망하는 표준적 혹은 절대적 기준의 외모가 만들어져 있었다. 키, 몸무게, 가슴․허리․엉덩이 사이즈는 숫자로 표현되었다. 작은 얼굴에 갸름한 턱, 쌍꺼풀이 있는 큰 눈, 높은 코, 약간 튀어나온 이마 등 얼굴 부위의 모습은 서구적 모습의 바비인형에 가까워졌다.

 

여고생들은 예뻐야 한다는 당위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싱그러운 십대소녀라는 자체로 눈부시게 빛이 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미의 기준, 유행에 맞도록 우리의 외모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성인이 됐다는 해방감과 함께 맞이한 ‘행동의 자유’로 외모에 대한 관심과 미용 행위에 쏟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열심히 ‘이미지’를 소비했다. 캠퍼스에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넘쳐났다.

 

그 당시 내가 사귀었던 남자친구들은 (사회의 기준이 아닌) 그들의 기준에서 나의 외모를 높이 평가해주었지만, 이성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월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외모’라는 기준은 나를 항상 불편하게 했다. 이성 앞에서 항상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긴장감과 (내가 만나고 알던 많은) 한국남자들의 외모에 대한 직설적인 평가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못생기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계속적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다. 사람들은 내가 예쁘고 날씬하기를 기대했다. 가족, 친구, 연인, 직장동료,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내가 예쁘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방법은 소식(小食)과 운동이었다. 여러 번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만족스럽게 성공하진 못했고, 그러는 동안 자주 굶거나 한꺼번에 먹는 나쁜 습관이 생겼다. 내게 음식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양분되었다. 외모, 타인의 평가, 음식 등에 대해 나의 신경은 예민해져만 갔다.

 

외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던 나는 프랑스에서 교환학생 자격으로 1년, 석사생 자격으로 1년간 체류할 기회를 얻었다. 파리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벨포르에 있는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 대학은 한국의 카이스트처럼 기술특성화 대학으로 국제 교류를 원활하게 진행하였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다.

 

▲ 2012년 2월, 학교의 국제마을축제에서  © 정두리

 

그곳에서 한국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 친구가 가장 많았고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콩고,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폴란드, 스웨덴,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카자흐스탄, 중국, 일본,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 등의 국적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는 행운을 누렸다.

 

수업 시간이나 방과 후 활동 혹은 파티에서 만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와 가치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에서 익숙했던, 한국인들의 외모에 대한 태도ㅡ다소 획일적인 외모를 추구하며 경쟁적으로 외모를 가꾸는ㅡ에 자문을 던지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나는 말과 행동이 더욱 자연스러워졌고,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서 평가하는 대화를 단 한 번도 나누지 않았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남녀의 외모를 평가하는 척도가 외국인의 외모에 적용되지 않기도 했고, 문화마다 선호하는 미인 혹은 미남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타인의 외모를 주제로 대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라면 우리는 곧잘 외모에 대한 평가 대상이 되기도 하고 평가자가 되기도 했으나, 프랑스에 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연예인처럼 만들어달라’는 얘긴 상상할 수 없어

 

내가 거주하던 곳이 지방도시이며, 현지인과 같은 소속감과 책임감을 결여한 외국인 신분이어서인지 한국에서와는 달리 치열한 경쟁의식이 덜했다. 내가 느끼던 한국에서의 삶은 모두가 제한된 목표물을 획득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서바이벌이었다.

 

그러한 목표물에는 정형화된 외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타인의 외모에 대한 평가, (언제나 최고의 미인일 수 없기에) 스스로 느끼는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꿈꾸거나 실행하는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은 이미 일반적이었다.

 

프랑스 친구들의 부모님 집으로 놀러갈 때마다, 나는 중년의 여성들이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꾸미는 모습에 적잖게 놀랐다. 그들은 유행처럼 번지는 다이어트에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시키지 않았고,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멋을 냈다. 프랑스인 여자친구들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중년여성들도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외모를 꾸몄다. 각자가 달랐지만 추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고,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  2012년 7월,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 정두리

 

물론 프랑스 내에서도 성형수술이 꽤 이뤄진다. 이들이 가장 많이 받는 시술은 지방흡입, 주름살 제거, 가슴 확대다. 프랑스에서는 몸매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날씬한 몸매를 아름답게 생각한다. 이목구비는 개인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남과 구분되는 얼굴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듯하다. 프랑스 여성이 특정인의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에 찾아가 동일한 모습으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는 한국 사회보다 다양한 민족이 오랜 역사 동안 섞여 지내오면서, 또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 외적 특징도 다양해져 머리카락, 눈동자, 피부색에 대한 개인차가 한국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일까, 이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외적 특성을 인정하고 그곳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한다.

 

2005년부터 성형광고를 규제하는 프랑스

 

몇 년간 나의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지내다보니, 다이어트를 하느라 생긴 나쁜 식습관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몸무게가 저절로 빠졌다. 몸에 대한 의식과 긴장에서 자유로워지니 몸이 본래의 생체리듬을 되찾았다고 할까.

 

나의 프랑스 남자친구는 내 몸에 붙어있는 체지방이 얼마인지에 따라 나의 외모를 평가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콤플렉스로 여기는 낮은 코, 작은 눈을 매력적인 요소로 여겼다. 친구, 연인, 가족 간 주고받는 대화에서 외모에 대한 평가가 없던 시기 동안 나는 내 몸과 타인의 몸에서 점차 해방되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시선과 표정, 행동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중학생 딸은 한국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나서 아시아적 특성이 뚜렷하면서도 이국적인 외모를 가졌는데, 쌍꺼풀이 없는 자신의 작은 눈을 좋아했다. 공주병은 아니지만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그것을 가꾼다. 한편 친구 중에 치아 사이가 많이 벌어진 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 역시 그것을 자신의 매력적인 개성으로 여겼다. (물론 미적 관점에 대한 차이도 있지만, 한국에서라면 치아가 고르도록 교정을 했을 것이다.)

 

한국의 대중매체와 성형광고 속 이상적인 미인들은 분명 여러 명이지만 너무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에 익숙해져 정형화된 미인상을 갖게 된 나에게, 자신만의 매력적인 개성을 발견하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은 작은 충격이었다. 아마 프랑스 여성들은 여느 나라 여성보다 남들과 같은 모습을 못견뎌할 것이다.

 

물론 프랑스 사회에도 외모를 가꾸기 위한 노력과 이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 프랑스에서 15세~35세 여성 중 1.5%가 마른 몸을 갈망하여 거식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2010년에는 거식증을 앓아오던 모델 이사벨 카로가 건강 문제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프랑스 의회는 올해 4월에 이른바 ‘말라깽이 모델 금지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는 이미 2005년부터 모든 성형광고를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외모 판단’에서 벗어나 발견한 아름다움

 

은희경의 단편소설 중에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있다. 과체중으로 외모가 볼품없던 주인공이 아버지의 건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에 뚱뚱한 주인공의 모습을 못마땅해 하던) 아버지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해 성공한다는 내용이다.

 

현대 문명화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처럼, 이 소설에서도 아름다운 외모는 슬림한 몸매이며 풍만한 몸매는 아름답지 않게 인식된다. 또한 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속 비너스와 풍만한 형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대조적으로 언급된다. 우리들의 인식처럼 후자는 멸시할만한, 아름답지 않은 형상으로 여겨진다.

 

▲  2011년 6월 Belfort 국제음악축제에서   © 정두리

 

인간사회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외모를 가질 수도 없고, 표준화된 외모가 반드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10년 후에는 지금의 관점과는 다른 모습이 미적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에 세상이 더욱 다채롭고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듯 같은 모습의 의상과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서 지내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테드 창의 단편 소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속에 나오는, 미(美)와 추(醜)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인, 칼리그노시아(calliagnosia)를 착용했다고 상상해보며, 외모를 타인을 판단하는 최상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프랑스에는 외모지상주의적 시선이 부재하며 그곳이 그러한 편견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프랑스에서 살면서 인간의 외양과 행동을 보다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다양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가꾸는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한국은 지난 10월 국회에서 미용 목적의 성형광고를 규제하는 법률안이 발의되었다. ‘성형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시점에, 한국에서도 아름다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면 좋겠다.  정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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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BlogIcon 라임 완전 공감합니다.. 그래서 슬픈...
    저 스스로 제 자신, 제 외모에 만족하고 나름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려해도 이나라에선 부서지는게 워낙 부지기수라.. 아마도 전 외국에서 살아야할거같애요.
    2015.11.19 17:47
  • 프로필사진 BlogIcon ㄱㄱㄱ 글 감사해요.. 외모는 진짜 껍데기에 불과한건데 왜이렇게 집착하게 된건지.. 자유롭고 싶어요 2015.11.20 00:20
  • 프로필사진 BlogIcon 블랑슈 글 잘봤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중심을 지키며 사는게 정말 어려운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계속 건드리고 압박을 가하니까요.
    각자 개성있는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면 훨씬 편하고 좋을거같아요.
    2015.11.20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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