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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도 없는 민간잠수사에 책임 묻다니

김관홍 잠수사가 들려준 세월호 구난활동의 진상 
 

 

해경은 민간잠수사 공우영 씨를 동료 잠수사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고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그 배경을 설명하던 중 홍익태 해양경비안전본부장은 ‘무보수’로 자원 활동한 민간잠수사들을 사설 구난업체 ‘언딘’ 소속의 유급 잠수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김관홍 잠수사가 바로잡지 않았다면 민간잠수사들은 구난활동으로 얻은 육체적 고통에 더해 자존심까지 크게 훼손되며 오명을 쓸 뻔했습니다. 그러나 국정감사에 출석하면서 사실 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무책임하고 안일한 해경 간부에 대해 주요 언론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9월 16일, 저는 수요일마다 동네 지하철역 앞에서 진행하는 세월호 진상규명 피켓팅과 서명받기를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겼습니다. 민간잠수사 김관홍 씨가 마포에서 매월 16일에 열리는 ‘세월호 기억모임’에 오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김관홍 씨는 이날 나눈 이야기를 녹취해도 될 지 양해를 구하자, “나는 내가 한 말에 책임질 수 있다”며 흔쾌히 승낙하였습니다.

 

김관홍 잠수사는 해경이 민간잠수사의 죽음을 동료 잠수사의 탓으로 돌려 기소까지 한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세월호 참사 당시부터 구난 활동의 경위를 상세히 들려주었습니다. 

 

▲  9월 16일 마포에서 열린 ‘세월호 기억모임’에서 이야기하는 김관홍 잠수사.    © 촬영:망부 
 

오붓하게 모인 마포 주민들에게 김관홍 씨가 처음 조심스럽게 건넨 말은 “이 동네에는 (희생자가) 안 계시죠?”였습니다. 젊은 시절 레포츠 다이빙부터 시작해 물과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터라 마포 일대부터 일산까지 그 활동 영역이 넓은데, 일산 지역에도 희생자가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안부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심해 구조작업은 산업 잠수사가 아니면 안 돼요”

 

작년 4월은 김관홍 씨는 산업 잠수사로서 여태껏 해온 공부와 노력이 결실을 맺는 시기로, 큰 공사 계약을 앞두고 수중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방송과 지인들을 통해 전해오는 현장의 모습은 의아하고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계속 전화는 오는데, 저는 애가 셋이고, 작업은 맡아놨고, 그리고 제가 데리고 있는 잠수사들도 먹여 살려야 되요. 아내 눈치를 보는 거예요. 밤마다 전화는 와요. 상황은 계속 들어와요. ‘잠수사들이 어떤 사람들이 와 있다.’ ‘어, 그래그래? 그래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 안 되는데…’라고밖에 말을 못해요.”

 

해경이나 특수부대 지원자들을 교육한 경험도 있는 김관홍 잠수사는 당시 모인 잠수사들의 활동 영역이 심해가 아니라는 것도, 현장에 출동한 많은 잠수사들이 다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심해 작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무작정 현장으로 뛰어가지는 못했답니다.

 

“뛰어간다고 해서 다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일단, 팀이 짜져야 해요, 팀이. 그 다음에 일할 수 있는 스테이지가 있는 세팅된 바지선이 필요해요, 다이버가 들어갈 수 있으려면. 왜냐면 제일 중요한 건, 희생자를 구하러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조하러 들어가는 당사자들 안전이 보장되어야 해, 저렇게 뛰어가면 될 게 아닌데. (방송을 통해) 장비를 딱 보니까, 그분들이 그 바다를 잘 몰라요.”

 

김관홍 씨는 심해 작업을 하는 산업 다이버의 역할은 레포츠 다이버와는 다르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희생자를 구조하려는 뜨거운 마음은 알지만, 산업 다이버가 아니면 심해에서 구조 작업을 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산업 다이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맑은 물에서 다이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어둡고, 물이 가든가 말든가 가드하면서 자기 몸을 지켜가면서 장비를 쓰는 사람들이예요. 자기 몸만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장비를 사용해요. 고압장비, 유압장비, 멍키, 해머. 모든 장비를 쓸 수 있는 게 커머셜 다이버예요. 레포츠 다이버들은 아닙니다. 며칠을 안타깝게 지켜보니까 아내가 딱 그러더라구요, ‘가도 돼’라고.”

 

아이를 셋 둔 아버지로서 일을 중단한 채 현장에 달려가지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허락이 떨어졌고, 김관홍 씨는 동료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하고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니까 피정(경비정)이 오더라구요. 피정에서 신분 확인하고 바로 올라갔어요. 그 날이 4월 23일 5시경이에요. 와, 근데 사람이 되게 많어, 막 해경, 특수부대 바글바글하고, 한쪽에는 배가 그날 들어온 거라 SSU(해군 해난구조대)가 이쪽에 세팅을 하고 저희는 이쪽에 두 군데를 세팅하기 시작했어요. 그쪽이 세팅이 끝났어요. 우리도 세팅이 끝났어요. 근데 아무도 안 들어가. 못 들어가는 거예요. 버벅대고.”

 

김관홍 잠수사가 도착할 즈음에서야 제대로 희생자 수색 작업을 할 수 있는 장비들이 설치된 세팅 바지선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전혀 통제되지 않았고, 자격이나 경력, 심지어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시스템도 없었습니다.

 

바다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건 작업

 

선체에 진입해서 수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심해 잠수사도 일곱 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4월 17일부터 쉴 곳도 없는 작은 바지선에서 “딱 보니까 거의 사람이 아닌” 상태였던,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해갖고 거의 탈진 상태까지 와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작업을 해야겠구나, 저를 포함해서 동생 네 명이 있었는데 ‘우리가 뛰자.’ 이미 그 분들은 포화가 돼 있는 거예요, 피로가. 그때까지 우현 쪽 창문을 깨고 사고자를 꺼내야 했어요. 좌현 쪽이 해저면, 우현이 (수심) 23미터 정도예요. 하늘에 조명탄 터져대고, 막. 아수라, 지옥이었어요. 첫날 음식을 섭취 못했어요. 안 넘어가더라고요.” 

 

▲  세월호 참사 당시부터 구난 활동의 경위를 상세히 들려주는 김관홍 잠수사.    © 촬영:망부 
 

이전에 한강이나 홍천 등에서 사고자를 가족들에게 수습해드린 경험이 있던 김관홍 잠수사에게도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저도 패닉이 오더라구요. 아, 이건. 누구도 생각 못한, 갑자기 전쟁 터진 그런 상황 있잖아요. 근데 특수부대, 해경들은 막 몰려있어, 근데 뭘 해야 되는지 이들은 몰라요.”

 

배가 쓰러진 상태에서 헬멧과 렁(아쿠아-렁, 잠수용 압축공기탱크)을 멘 해군이나 해경은 선내 진입을 못하기 때문에, 민간잠수사들이 경로를 확보하면서 이동 라인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제대로 된 세월호 설계도조차 없어서, 민간잠수사들을 계속 고생하며 허탕을 치기도 했습니다.

 

“(라인을) 쳐낼 건 쳐내고 다시 깔 건 다시 깔고 그 작업 해놓고, 이제 사고자 안고 올라오고, 안고 올라오고…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는 거예요. 왜? 다이버가 (사고자를) 꺼내서 해면까지 올라오고 또 내려가고 그러니까 문제가 많아요. 그럼 체내 질소가 포화가 되거든요, 수심이 23미터밖에 안 된다 해도. 그래서 해경의 지원을 받았어요.”

 

몇 명 안 되는 인원으로 작업에 과부하가 걸린 민간잠수사들은 결국 해경에 협조를 요청해서 사고자 수습 작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저희 선임(공우영 잠수사)이 해경을 달랬어요. ‘해경이 할 일없이 이러고 있으면 욕먹으니까, 우리가 쓰는 장비를 메고, 구조 다이버로 들어가서 안에서 선 넣어주는 거라도 해라.’ 그걸 우리가 다 했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안에서 사고자를 꺼내면 해경이 잠깐 잡고 있다가 위에서 다른 해경이 렁을 메고 들어오면 인수인계해서 올라가는, 그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어요. 근데 위에서 보기에는 민간잠수사들이 한 게 없는 거죠. 우리의 일은 물속에서 이뤄지고 안 보이잖아요.”

 

수색을 주도해야 할 해경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은 제대로 못하면서 실적 챙기기에만 급급한 모양새였습니다. 실제로 해경이 실종자 수색 작업에서 민간잠수사들이 수습한 시신을 해경이 수습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역시 주요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물속에만 있고 렁을 멘 해경이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숫자 개념이 ‘사고자가 몇 명이냐’예요. 실제 그 당시 해경은 사고자가 몇 명인지도 몰랐어요. 카운트 자체가 우리는 몇 구가 올라온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몇 구가 남았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근데 이내들은 올라온 수를 그들의 성과, 뭐 이런 식으로 판단을 하더라구요, 해경이.”

 

“희생자의 마지막 모습, 잠수사들이 많이 울었어요”

 

故 이광욱 잠수사의 사망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는 물살이 매우 거세서 정조(만조와 간조 사이 물상이 잠시 멈춰 있는 때)를 넘기면 수중 활동이 위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지만, 민간잠수사들은 희생자 수습을 하면서 유가족들의 고통이 어떨지 알기 때문에 무리한 요구에 응하면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물이 가. 막 가기 시작해, 물이 가는 게 보여요. 근데 임근조(현 국민안전처 단장) 과장이 우리 다이버 보고 들어가래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데.”

 

민간잠수사들은 정조 때 물 속에 들어가는 것외에도 바지선에서 라인을 내려주고, 상황을 체크하고, 장비를 손보느라 쉴 새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바쁘고 힘겨웠지만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 사고자 수습을 위해 민간잠수사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영상 출처: 뉴스타파 
 

“VIP(대통령)가 왔다 가고, 해경이 잠수사 두 분을 데리고 왔어요. 저희랑 전에 일하던 분이 아니라, 어디서 두 분을 모시고 왔어요. ‘일하라.’ ‘예.’ 어떡해, 하라고 했으니까 해야죠. 명단을 받고, 똑같이 순번 요청을 하다가 하필이면 그 전날 물때가 안 맞아가지고 그 분이 못 들어가고, 그 다음날 들어갔어요. 근데 좀 전에 말씀 드렸던 과정, 작업 있죠? 줄 옮겨 매는. 그 때 하필이면 팽목항에서 연락이 와가지고, 다른 구간 또 해달라고 그래서 그 분(故 이광욱 씨)이 줄 옮겨 다는 작업을 하려고 내려간 거예요, 혼자. 근데 내려가자마자 파르르 물소리가 나고, 다이버하고 통신이 안 됐어요. 119인가, 해경인가 들어가서 올렸는데 사망하셨어요. 그렇게 사고가 난 거예요.”

 

김광홍 잠수사는 동료가 사망했지만, 그럼에도 잠수사들은 계속 사고자 수습 작업을 지속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쪽에서 제가 일하고 있고, 저쪽에서는 사망자 계속 수습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 사고가 난 거예요. 안타깝죠. 어쩔 수 없지만, 우린 죽음을 두려워 안 해요, 다이버들은. 왜? 그걸 알고 들어온 사람들이거든요. 매번 내 순서가 됐을 때, 내가 죽을지… 그걸 생각하고 (머릿속에) 그리고 나와요. 그래서 오후에 또 일을 했어요.”

 

사실, 故 이광욱 잠수사의 사망 사고가 있기 얼마 전인 4월 30일에 김관홍 씨도 위험한 사고를 겪었습니다. 정조가 끝나는 시간대였지만 층을 바꿔 라인을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작업을 하러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날리며” 내려갔다고 합니다. 간신히 선체에 도달했지만 라인 외에 잡을 곳이 없어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라인을 조금이라도 더 연결하려 하고 있을 때 “정신 차리고, 어서 올라오라!”고 호통을 쳐준 이가 바로 지금 재판 중인 공우영 잠수사였습니다.

 

김관홍 씨는 올라와서 바로 챔버에 들어가 감압을 하다가, 그만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호흡이 끊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응급처치를 하고 병원에 실려 가서 호흡이 살아났는데, 곧바로 다시 바지선으로 돌아왔다는 말에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왜 혼자 내려갔냐고 질문하자 “내 호스, 생명선 하나. 내가 연결해야 하는 선 하나. 거기에 자기 몸도 못 가누는 해경, 그 호스 또 하나. 그렇게 들어가면 백 프로 다 꼬여버려요. 다 죽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참사 희생자들) 마지막 가시는 모습. 다 잔인하게 돌아가셨어요. 고통스럽게… 잠수사들이 많이 울었어요. 많이 울고…. 그래서 제정신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근데 그거는 저희가 감수해야 될 부분이에요. 거기까지는.”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상세히 이야기하면서도, 김관홍 잠수사가 말을 아끼는 부분은 희생자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겪은 아찔한 사고를 이야기할 때조차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김관홍 씨가 유일하게 눈시울을 붉힌 때는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유가족 어머니들이, 아버지들이 그러시더라구요. 자기 새끼 구해줘서 고맙다고. 시신으로 돌려드렸는데, 우리한테 고맙대…. 일주일에 한 번씩 고기도 싸들고 오고요. 음식물을 보내주면 우리한테 제대로 전달이 안 되니까. 직접 가져와서 우리한테 직접 해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먹으라고…”

 

권한이 누구에게 있나? 책임을 민간에 떠넘기다니…

 

목숨을 걸고 거센 물속에서 라인을 연결하고, 선내의 집기들을 정리해서 수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희생자를 수습하고, 희생자들의 유품을 올려주는 등 사고자 수습 작업을 한 것은 민간잠수사 스물다섯 분이었습니다. 

 

▲  김관홍 씨는 목숨을 걸고 사고자 수습작업을 한 공우영 잠수사가 재판을 받는 상황에 분노를 표했습니다. © 망부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고 언급하며 함께 목숨 걸고 일한 동료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김관홍 잠수사는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힘들 때마다 다독여준 “형님” 공우영 잠수사가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 분노를 표했습니다.

 

“우리 형님, ‘야, 초심 잃지 마라, 초심 잃지 마라. 너희가 여기서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으러 온 것도 아니고. 단지 저 아픔들… 너희밖에 할 수 없어!’ 진짜 우리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걸 우리가 박차고 나가면 차라리 오지 않은 것만 못하잖아요. 근데 쫓겨나니까(민간잠수사들이 갑자기 수습 작업에서 배제됨) 사람이 환장하대요. 그러더니 형님이 재판에 서…”

 

김관홍 잠수사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살리지 않고, 더 찾을 수 있는 희생자들을 찾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다하지 않은 해경과 정부가 이제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피항 나왔을 때(7월 초) 그때까지 우리가 열한 분 남겼을 거예요. ‘아, 이제 열한 명만 (수습)하면 끝난다. 교체 수색만 하면 이제, 우리가 몇 분 더 찾을 수 있다. 이쪽에선 한 여섯 분 정도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들. 어, 근데, 태풍이 크게 와갖고 피항을 왔는데, 해경 측에서 문자 하나가 딱 온 거예요.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작업 방법을 바꾸겠다’고. 나가달래요. 와. 진짜 억울하더라구요. 제가 통고를 했어요, ‘열한 분 남았는데 어떻게 나가냐.’ 그러니까 이춘재 국장(현 남해해경본부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다른 다이버들이 동요할까봐 나를 안고 나가버리더라구요. 열한 분 놔두고…”

 

거의 죽었다 살아나서도 다시 돌아와 희생자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던 김관홍 잠수사와 다른 민간잠수사들은 그렇게 수색 작업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후 다행히 두 명의 실종자를 찾았지만, 아홉 명은 여전히 바다 속에 ‘미수습자’로 남아있습니다.

 

육체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고스란히 민간잠수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와 상담은 작년 12월로 끊기고, 이후에는 대책을 세워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기다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해경은 다른 잠수사들을 다독이며 작업했던 공우영 잠수사에게 故 이광욱 잠수사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초창기에 있던 멤버들이 스물다섯 명인데, 한분 돌아가시고 이제 스물네 명인데. 저희는 포기하지는 않았었어요. 포기한 적 없고. 저희가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한 게 무슨, 그 어둠 속에서 한 구 한 구 모시고 나오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에요. 저희가 쫓겨나고 나서, 우리  임의대로 나온 게 아니잖아요? 쫓겨나오고 나서, 이광욱 잠수사를 사망케 했다고 우리 선임(공우영 잠수사)을 고발해버렸어요, 해경이. 왜?”

 

김관홍 잠수사는 애초에 민간잠수사들에게 작업에 관한 ‘권한’이 있었다면 사고도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격증 검사 안 했다. 신체검사 안 했다.’ 저희가 그걸 할 수 있는 권한도 능력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저희, 이광욱 잠수사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거는, 우리 형님이 무슨 권한이 있어서 작업을 지시하고 이럴 수 있었으면 사고 안 나요. 그게 주예요, 저는.”

 

“진짜 중요한 건 아이들을 안 살린 거야, 이 정부가”

 

모임의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나서야 김관홍 씨는 당시의 상황과 민간잠수사들의 노고를 설명하느라 숨겼던 본인의 고통을 조심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심해는 어둡기 때문에 수색할 때 앞이 보이지 않아서 손으로 더듬어 희생자를 가려낼 수 있었다며, 눈으로 본 것보다 몸으로 느끼고 각인됐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보인다’고, 그것이 너무 괴롭다고 했습니다.

 

지난 겨울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잠수사의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되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  뒤풀이 자리에서야 김관홍 씨는 본인이 겪는 고통을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 촬영:망부 
 

김관홍 씨는 함께 고생한 민간잠수사들과 온힘을 다해 치료해주고 도와준 한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 그리고 현장에서 열심히 했던 몇몇 해경들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정작 현장에서 애쓴 해경들은 진급을 못했고, 전문 지식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지휘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윗선’들만 다 진급하고는, 어처구니없게도 공우영 잠수사에게 책임을 떠미는 행태에 다시금 분노를 표했습니다.

 

민간잠수사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대부분 몸이 회복되지 않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김관홍 씨도 허리와 목에 디스크가 터졌고 꼬리뼈까지 틀어졌지만,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반평생 물에서 살았고, 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컸던, 과거 보디빌딩 선수까지 했던 건장한 분이 지난 3월까지는 기저귀를 차고 대리운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하지만 김관홍 씨는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저희가 아프고 다친 거,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 중요한 게 뭐냐면, 애들을 안 살린 거야. 우리가 들어가게끔 만든 이유가 중요한 거예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애들이에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게! 근데 그거에 대한 조사가 안 되고 있어요. 이게 맥이에요, 이게. 우리가 같이 재판 받는 거? 그 맥만 잡으면 그것도 끝나요. 우리가 왜 들어갔어요? 배가 넘어가고 애들이 갇혀서… 배는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비행기도 떨어질 수 있고요. 그네들이 왜, 참사 희생자가 된 이유는, 살릴 수 있는 애들을 정부에서 안 살렸기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참사가 된 거예요. 그 애들… 자기 죽음을 알고 부모에게 미안하다, 그런… 다 봤잖아요. 그렇죠? 우리, 그런 애들 안고 나올 때 많이 울었어요. 정작 중요한 건 그거예요. 우리 재판? 끝까지 가요. 근데 진짜 중요한 것은 안 살린 거야, 이 정부가.”  화사 

 

※ 세월호 민간잠수사 무죄판결 촉구 탄원 온라인 서명 http://goo.gl/forms/9lsBG6bY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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