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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경계를 푸는 열쇠는 무엇인가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3) 국경, 빈부의 격차①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에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공유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졸업을 앞두고 버킷리스트 파일을 열다
고등학생 시절, 한창 내 이목을 끄는 키워드가 있었다.
‘해외봉사’와 ‘무한도전’.
이 두 개의 키워드는 사춘기 여고생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하지만 나의 현재는 시골의 적막함과 규제 속 학생이라는 신분 모든 것들이 답답했다. 그랬기 때문에 근거 없는 자신감은 더 커져서 인생의 장면 전환을 꿈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4년 뒤의 나는, 여전히 도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해보지 못한 채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지금 취업을 한다면 내 인생은 무모함의 용기와는 정말 멀어질 것 같아!’ 어느 날 오랜만에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적은 목록) 파일을 열어보았다. 해외봉사가 눈에 들어왔다. 재빠르게 관련 단체들 사이트에 접속하고는 그 자리에서 장기 해외봉사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나는 인도와 네팔로 1년간 해외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 조효비
생각보다 일찍 합격 소식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바로 A단체 워크숍에 참가했다. 그러나 워크숍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경상도 어느 산 속에서 2박3일 동안 종교행사를 하며 끝없는 ‘말씀’을 듣고 CCM(기독교 음악)에 맞춰 율동을 배우는 게 전부였다. ‘이게 뭔가’ 하면서도 한창 율동을 하고 있을 즈음, B단체에서 장기봉사 해외파견 합격 문자가 왔다. 바로 B단체의 면접과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
2011년 6월, 남인도로 출발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다. 부모님 앞에선 힘껏 웃고 있었지만 사실 불안했다. 막상 출발을 한다고 하니 닥쳐올 상황들이 걱정되고 그제서야 봉사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나의 무모함에 발등을 찍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안일함의 대명사답게 나는 머리 속이 블랙아웃 되어버린 김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인도인의 두 얼굴
뱅갈로르 공항에 내려 출입국사무소에서 수속을 밟았다.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내 여권에 미국 학생비자가 찍힌 걸 보고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당황한 내가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을 하자 눈빛이 확 바뀌었다. 대뜸 여권의 위조 여부를 확인한다며 어딘가에 계속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질었다.
“널 확인시킬 무언가가 없으면 지금 당장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경찰이 널 잡아갈 거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서워서 나는 그 직원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먼저 수속을 마친 동료 중에 해외 경험이 많은 친구가 순발력 있게 말했다.
“얘는 미국에 4개월만 있었으니 학생비자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외국인을 보면 원래 긴장해서 말을 잘 못하잖아요. 알죠?”
그러자 직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처음 봤던 매너 있는 모습으로 입국도장을 찍어주었다. 순식간에 두 얼굴을 보여준, 처음 만난 인도인의 느낌을 나는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불과 1m 간격으로 서있었지만 우리 앞에는 유리 벽이라도 가로막혀 있는 듯했다.
▲ 인도와 네팔은 아직도 카스트가 문화적으로 강하게 작동해서 교육의 권리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된다. © 조효비
그렇게 위축된 모습으로 남인도의 한 시골로 갔다. 아직도 카스트(신분 계층)의 구분과 성차별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숙소에서 30분가량 떨어진 불가촉천민 마을 네 곳에 2~3명씩 배치되어, 학교에서 예체능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인도에 대한 인식을 좋게 바꾸고 싶었다. 앞으로 1년간 살 곳이라 생각하니 인식의 변화가 절실했다.
숙소 밖으로 나가기 전 옷차림부터 점검부터 해야 했다. 몸에 붙는 티셔츠를 벗고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려 몸을 가렸다. 그런데도 시장에 가니 시선집중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릴 쳐다봤다. 나중에 물어보니 ‘얼굴이 하얀 것이 신기해서’ 보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젊은 여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성들과 중장년층 여성들만 보였다. 시장엔 담배를 씹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씹는 담배는 혀를 빨갛게 만든다. 입은 피를 문 듯 빨갛고 눈은 노랗게 충혈된 사람들. 공항에서부터 무서웠던 그 느낌의 연속이라 경계를 풀 수 없었다.
피카츄가 뿜어낸 기쁨의 백만볼트, 봉사활동
오후에는 내가 수업을 하게 될 불가촉천민 마을을 둘러보았다. 시장사람들의 느낌과는 대조적이었다. 집에는 엄마와 아이들이 해맑은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엄마들이라 해도 나와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렸다. 집집마다 짜이(茶)를 건네는 정성스런 모습에, 나는 다 받아먹었다. 인도에 들어오며 느꼈던 불안하고 경계하는 마음들은 이 비좁은 골목길 마을에서 증발해버렸다. 엄마들의 눈빛은 따뜻하고 달콤한 짜이 같았다.
수업을 나갔을 때도 아이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나를 잘 따랐다. 눈빛은 거짓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과 부모들은 내가 지내면서 불편한 것이 없을지 항상 걱정해주었다. 우리가 종교에 대한 강요 없이 순수하게 도움만 주러 온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마을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었다. 어떠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싶었다.
▲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은 상상 이상의 기쁨을 주었다. © 조효비
그렇게 두 달을 지내면서 느낀 건, 봉사라는 것은 가슴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 이상으로 어떠한 말로도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피카츄가 기쁨의 백만볼트를 뿜어 우주까지 밝히는 무언가의 힘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기운, 밤하늘의 별, 템플의 기도문, 향냄새와 그 정취는 상상 이상이었다. 집안을 돌아다니는 바퀴벌레와 쥐는 잠깐의 놀라움에 그쳤을 뿐이다.
소와 사람이 느릿느릿 왕래하는 인도-네팔 ‘국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도 경찰들이 우리를 경찰서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거주자 등록 불허가 통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다. 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는 두 달 만에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수업을 진행한 마을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다. 요 며칠 왜 오지 않았냐며 반겨주는 마을사람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우리는 대도시로 나와서 한 달 동안 거주자등록 허가가 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현지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나는 네팔로 자원 파견되었다. 30인치 캐리어와 45L 배낭을 메고 기차에 올라탔다. 48시간 동안 가야 하는데, 현지인들이 타는 일반석인데다가 짐도 많아 걱정됐다. 쇠사슬로 가방과 기둥을 연결해 묶어 자물쇠를 달 수 있는 모든 곳에 달고 경계하며 쪽잠을 잤다.
기차 안에서 맞은 둘째 날 아침, 복도 맞은편 어떤 가족이 먹을 것을 내밀었다. 현지인의 친절에 내 경계는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어둡고 더러운 기차 안이 더 이상 답답하지 않게 느껴졌다. 48시간 몸을 담았던 기차에서 내린 뒤, 인도 고락푸르에서 하룻밤을 잤다. 아무 정보도 없이 온 우리는, 기차 옆자리에 앉아있던 인도인 대학생의 도움을 받았다. 청년은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을 알아봐주려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짐까지 들어주며 안내해주었다.
▲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는 네팔 북서부 마을에서 ©조효비
그렇게 인도와 네팔의 경계인 소나울리에 도착했다. 국경이라고 하면 남과 북의 경계(38선)를 상상하며 왠지 지뢰가 있을 것만 같고 황무지일 것 같아서 긴장했는데,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의 국경 왕래, 소와 사람의 느릿느릿한 움직임. 마침 다사인 축제 기간이라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길가에 있는 한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네팔 투어리스트 비자를 여권에 붙이고 도장 찍는 것으로 네팔 입국이 허용되었다. 가방 수색이나 검문, 여권 검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인력거를 소개해주는 친절함뿐이었다.
‘돕는 자’라는 우월감에 대한 성찰
축제 기간이라 버스가 없어서 국경에서 벤을 타고 포카라까지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가지 요금을 냈다. 포카라에서 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해발 2,600m의 네팔 북서부 마을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적막함이 다가왔다. 체감온도는 점점 떨어지는데 군데군데 뚫려 있는 판자지붕이 우릴 맞았다. 40도 넘는 습한 기온의 인도에 있다가 온 우리는 봉사활동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존이 우선이었다.
이곳에서는 홈스테이를 했다. 혹시나 배고프지 않을까 하고 할머니와 엄마가 계속 음식을 해 주셨다. 네팔 전통의상도 만들어주셨다. 그 정성을 봐서라도 빨리 이곳에 적응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홈스테이 가족들과 함께 마당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서양인 여행자들이 보였다. 그 중 어떤 독일인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서는 친절하게 말했다.
“널 위해 선물해줄게. 좋은 볼펜이야.”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뭐야, 내가 볼펜도 없는 사람인줄 아는 거야?!’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홈스테이 아빠는 “정말 고마워요. 또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라며 과장된 몸짓과 억양으로 말했고, 곧 여행자들을 돌려보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독일인이 모습이 흡사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으로 들어와 한참을 생각했다. 혹시 내가 현지인들에게 무례하게 느껴질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던 우월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진 않았는지…. 왠지 그런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현지인들에게 생활용품 하나라도 더 주기 위해 선의를 베풀려 하였지만, 정작 그들이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외국인을 바라보는 눈빛에 변화가 생기다
▲ 네팔의 카스트가 낮은 계층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예체능 수업 중 © 조효비
가난한 나라에 봉사활동을 하러 온 사람들의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계기를 얻었을 즈음, 이곳 마을사람들은 겨울을 나러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도 남쪽 마을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날씨도 온화하고 식수가 풍족한 곳으로, 한창 개발과 지원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학교 교장선생님과 코이카 단원들이 적극 우리의 정착에 도움을 주었다. 나는 바로 카스트가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와 장애인학교에서 예체능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파견 NGO와 갈등이 생겼다. 현지에 파견된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을뿐더러, 우리가 지불한 3백여 만원의 생활비와 사업비마저 주지 않겠다고 나온 것이다. 마찰이 반복되면서, 나는 봉사활동을 할 때의 따뜻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남은 기간, NGO 소속이 아닌 독자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히려 봉사활동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후원을 많이 끌어내기 위해 감성을 유발하는 방식의 국제구호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1년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해서 경기도 양주에 있는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 근처에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집 앞 마트에만 가보아도 네팔사람들이 많았다. 김밥용 김, 조미김, 파래김, 다시마를 가지고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네팔에서 장을 보며 현지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들은 내가 겪었던 것보다 마음의 경계를 훨씬 더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겪은 바로는, 사람의 마음의 경계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상대방의 표정이었다. 낯선 곳에서는 누구든 두려움과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경우는 더하다. 그럴 때 누군가의 태도가 공포를 주기도 하고, 위축되게 만들기도 하며, 반대로 두려움을 일순간에 녹여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하루빨리 마음의 경계가 풀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인도-네팔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경험은 내 인생의 길을 여러 갈래로 제시해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과 인식과 태도도 상당 부분 바꾸어 놓았다. ▣ 조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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