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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며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2) 호주살이 5년차 

 

 

여행, 출장, 이주노동,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많은 이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일다>는 지구화 시대에 필요한 ‘이주’의 감수성을 공유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서양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 주말마다 열리는 장터 옆 풀밭에서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  ©싸냥 
 

만 서른의 나이를 앞두고 나는 부랴부랴 호주로 가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땄다. 서울살이에 지쳐갈수록 막연하게나마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진 터였다. 20대를 정신 없이 보냈지만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동력은 점점 사그라졌고 돈벌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의 진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그대로 한국에 머물렀다가는 이런저런 관계와 사건들을 이어가느라 어떠한 시작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특별한 계획도 없이, 갖은 미련으로부터 도망치다시피 나와서 호주살이를 시작했고 어찌저찌 하다 보니 다섯 해가 흘러갔다. 그 동안 워킹홀리데이 체류자에서 유학생, 영주권자, 그리고 대학원생으로 신분을 옮겨왔고, 멜번과 브리즈번을 거쳐 시드니에 거주하게 됐다.

 

돌아보면 마냥 평탄했던 순간은 없었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고는 해도 오래 전이었고 같은 아시아였기에, 뒤늦게 서양문화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거듭되는 실수와 고립감 때문에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때면 다시 이곳 특유의 잔잔한 일상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라’는 난감한 주문

 

간호대학을 다니면서 병원에서 첫 실습을 했을 때의 일이다. 평가자는 내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지 않아서’ 주사를 놓는다든지 하는 실습의 기회를 자꾸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합격 시켜주기 어렵다고 했다. 병동은 늘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서 학생인 내가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어떻게든 짐이 되지 않으려고 파트너 간호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시키는 대로 잔심부름만 하고 여유가 되면 챙겨주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실습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니, 참 난감한 주문이자 협박이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니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조언이었으므로 나로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적당히 얌전한 얼굴을 하고 대충 장단을 맞춰주는 시늉을 하면 윗사람한테 그럭저럭 잘 보일 수 있는 체계에 이미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뒤에서 흉을 보거나 그저 소심하게 얼굴을 굳히는 정도로 불만을 표출하다가 그만둬버린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이 상당히 수동-공격적인(passive aggressive)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처럼 어디에서나 위계가 뚜렷해서 그것을 거스르기 어렵고, 논리적인 문제 제기를 해도 어린 것이 말대꾸를 한다고 찍히기 일쑤인 문화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어쩌면 그래서 때를 놓치고 갇혀버린 분노를 다들 안고 살면서, 엉뚱한 순간에 만만한 상대에게 쏟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곳에서라고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은 채 원활하게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간단하게 재현될 리 없다. 실습 마지막 날, 나름 노력한다고 파트너 간호사에게 환자 침대를 정리하는 대신 중심정맥카테터(정맥 주사를 놓기 위해 외부에서 심장에 근접한 상대정맥으로 삽입하는 관)를 제거하는 일을 보면 안되겠냐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한 상태로 하루를 마무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파트너 간호사 또한 호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서로가 그런 소통에 익숙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명확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것(assertive communication)이 자칫 무례함으로 비춰질까 조심스럽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다행히도 평가자는 공감을 해주었고 워크숍을 제안해주기도 했다.

 

이런 일을 계기로 눈 여겨보게 된 이곳 사람들의 소통 방식은 대체로 예의 있으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걸리는 게 있으면 문제 제기를 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하고, 감사한 일이 있으면 고마워하고, 잘한 일이 있으면 칭찬하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의 주고받음. 그러다 보니 화를 내는 일처럼 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는 흔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불씨에도 금방 터질 준비가 된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 사방에 널려 있는 듯했고, 나 또한 때로는 정당한 저항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그저 성질에 못 이겨 분노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맞장구 쳐주는 이가 없으니 짜증을 내는 일조차 쓸데없어지는 신기한 경험도 생겼다. 또한 서열에 놓인 위치에 따라 미안한 마음은 눈치나 멋쩍음으로 대신하고, 칭찬에는 쑥스러움으로 대응하던 예전의 표현방식이 스스로 참 이상해졌고, 조금씩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하게 됐다.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냐고?
 

▲ 원주민 커뮤니티에 봉사활동 다녀오는 길에 친구들과.  ©싸냥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종종 호주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냐며 몸조심을 하라는 당부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비하면 이곳에서 아시안으로 사는 게 호사일 정도’라고 대꾸했는데, 실제로 나는 백인이 아니라서 불이익이나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고생을 해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아시안에 대한 차별 때문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시급을 제시하는 서빙 일조차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다른 영국애들도 일을 구할 수가 없어 시골로 가려는 처지였던 식이다. 어디에서나 경쟁은 있었고, 누구에게나 경력을 따졌으며, 외국인은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종 불문하고 어느 정도 제도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더 적응을 잘 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것도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른 듯했다. 조금 더 약자인 사람, 그러니까 영어가 서툴러서 의사소통이 안 된다거나 비자가 만료되어 불법체류 상태가 된 사람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자본가가 있는 한, 그 대상 역시 인종을 가리지는 않았다. 간간이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낯선 이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다가 그런 사건들을 무척 창피하게 여기는 편이라, 사회적인 분위기가 거기에 동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이곳엔 아시안, 그리고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이 많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백인을 찾아보기가 더 어려울 때도 있을 정도였다. 학교에 가도, 거리를 걸어도, 병원에서 일을 해봐도 항상 다양한 언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누군가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환경조차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원주민에게 가혹했던 호주 역사

 

다만 호주에 인종차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여전한 이곳 원주민에 대한 억압적인 처우를 말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 과거와 현재는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히다. 원주민 공동체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백인사회에 흡수시키겠다는 의도로 아이들을 강제로 빼앗아 시설에 가뒀던 정책은 1970년대까지 이루어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정부에서 이 훔쳐진 세대(stolen generation)에 대한 사과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을뿐더러 오늘날에도 많은 원주민 아이들이 아동보호라는 명목 하에 가족과 분리된 채 살아간다.

 

2007년에는 원주민이 주로 사는 노던 테리토리(Northern Territory)의 아동들이 가정폭력과 성적 학대에 시달리고 있다는 모욕적인 이유를 들어 그 지역 이름을 딴 긴급 조치(Northern Territory National Emergency Response)를 도입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대체로 이들의 땅에 대한 권한을 축소하고 알코올과 포르노를 금지하거나 복지기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 호주 건국기념일은 원주민들이 침략당한 날이기도 하다. Invasion Day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원주민 깃발을 펼쳐든 모습. 검정은 원주민, 노랑은 태양, 빨강은 땅을 상징한다.  ©싸냥 
 

가난과 질병의 대물림 속에서 원주민은 다른 호주인에 비해 평균 수명이 10년 가량 더 짧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구치소에서 원주민이 의심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공권력 남용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호주에서는 영국함대가 처음으로 도착한 날을 건국기념일(Australian day)로 지정하고 있으나, 원주민은 ‘침략을 당한 날’(Invasion day)이라고 하여 매년 집회를 열고 건국기념일의 날짜를 바꾸라는 요구도 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호주에서도 테러에 대한 공포 분위기가 조금씩 조성되면서 이슬람 문화와 그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갖는 조직이 생기고 반이슬람을 외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아직은 작은 움직임이고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얻는 상황은 아니지만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었다면 도전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일상에 길들여져 호주가 낯설었던 당시의 인상은 희미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때때로 이 나라가 신기하다. 호주라는 나라는 사람으로 치면 세상물정 모르고 마냥 태평한 아이 같다가도 자존감이 낮은 어른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국 식민지 이후의 역사는 짧기도 하거니와 그 시작부터 깨끗하지도 정당하지도 못했고, 마음 같아서는 영국이나 미국을 필두로 한 서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지만 그들이 딱히 알아주지도 않는데다가 몸은 또 아시아에 인접하게 묶여 있어서 좋든 싫든 상호 의존을 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호주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전에 이민자들이 엄청나게 몰려들면서, 알지도 못하는 문화를 그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데에서 오는 혼란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소화해 내기에는 이 안에서 발달한 철학도, 인문학도, 혹은 사회적인 갈등을 해결해 온 경험도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더구나 땅덩어리가 워낙 큰 데 비해 인구가 적어서인지 사회적인 화제 거리라고 해도 누구나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편이기에 불만이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사례도 별로 없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한 가지 이슈가 순식간에 전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다시피 하고, 수십만 명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운집해 구호를 외치는 광경을 이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침부터 퇴근 시간도 지켜지지 않은 채 야밤까지 일을 하거나 피 터지게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도 오직 살아남기나 하면 다행인 무한경쟁의 상황 또한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형적인 호주사람의 이미지는 바닷가에서 슬리퍼를 신고 한 손에는 맥주를 든 채 유유자적하게 걸어 다니면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곳에도 경쟁은 존재하고 예전에 비하면 삶의 여유가 줄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한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았던 치과의사의 길을 가보겠다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늦게나마 호주에 왔기 때문에 이런 도전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이곳

  

▲ 브리즈번에서 열린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집회.  ©싸냥 
 

어느덧 한국 나이로 서른다섯이 되었다. 소위 남들은 다 직장에서 자리 잡고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 안에서 아이 한 둘은 이미 낳아 키우는데 너만 아니라는 나이. 희한하게도 정작 내 주위에는 그렇지 않은 남들이 더 많은데도 그 기준은 너무 공고해서 한국을 떠나 있는 나에게까지도 그 압박감이 전달 될 지경이다.

 

부모님은 평생 쓸데없는 짓만 할 것 같던 딸이 이제라도 실용적인 공부를 한다고 하니 안도하시면서도 조금만 어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신다. 나 역시 그저 언제까지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지낼 수 있을 것 같던 나이가 더 이상 아니어서, 그럼에도 아직도 하고 있는 공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순간도 있어서 조급함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간호대를 다니던 시절에 내 윗학년이었던 멘토도 이미 다 커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딸을 둔 5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졸업해서 바로 신규 간호사로 취직을 했고, 나이에 따른 위계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 간호사들과 어울리며 일을 했다. 이곳에서는 결혼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은 친구도 있었고, 애인 가족과 여행을 떠난 친구도 있었으며, 동성애인을 예고도 없이 집에 데려가 가족들에게 소개한 친구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일’이나 사회적인 낙인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도 어떤 가능성처럼 들렸다. 나 또한 결혼하지 않고 애인과 그냥 살거나, 아이를 낳게 되면 혼자 키워도 나쁘지 않고, 내 애인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간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삶을 이곳에서 꿈꿀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변수가 많은 이주의 삶 속에서

 

고향이라는 개념은 늘 나에게 어려운 것이었다.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은 없었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으며, 사춘기를 보낸 곳에는 애정이 없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고부터는 더더욱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호주에서 보내고 있지만 정착했다고 하기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

 

세계 어디에서나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싶어 간호를 선택하기도 했으니 십 년 뒤에는 또 다른 나라에 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언젠가는 오랜 그리움을 더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항상 조금은 극단적이고 대체로 과했던 이전의 기억을 안고서라도.

 

하긴 변수가 많은 이주의 삶 속에서 앞일을 내다보려는 건 어쩌면 주제 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때그때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마음을 나눌만한 사람들만 있다면, 함께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  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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