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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페미니즘으로 읽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5. 7. 8. 09:30

유토피아는 없다, 망한 데서 시작하라
페미니즘으로 읽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필자 마정윤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한 편의 영화에서 ‘페미니스트 사유의 궤적’ 읽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감독, 호주, 2015)는 SF액션영화다. 사막을 질주하는 차량,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OST는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한다. 시리즈물답게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각종 분석글도 넘쳐난다. 그 가운데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임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아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액션영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 미국 개봉시 남성들이 맥스의 분량이 퓨리오사보다 적다는 이유로 보이콧하기도 했다. 
  

영화는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 ‘보지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를 깨고 성적 욕망을 다양하게 표출한 연극)의 작가 이브 엔슬러에게 여성캐릭터에 대한 자문을 구한 것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과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탈출시키는 여성전사의 존재만으로도 페미니즘 영화로 읽힌다. 미국 개봉 당시 ‘남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남성들이 맥스의 대사량이 퓨리오사보다 적다는 이유로 매드맥스가 “페미니즘의 프로파간다”라며 ‘매드맥스 안보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강인한 여성리더를 보여준다거나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점 때문에 여성주의 영화라고 읽기보다는, 이 한편의 영화에 ‘제2의 페미니즘 물결’ 이후 전개되었던 페미니스트 사유의 궤적들이 곳곳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영화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여성을 더 이상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하지 않는 세상을 고민했던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된 영화로서 말이다.

 

정치경제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세상을 조직하는 새로운 운영 원리를 의미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실현되어 보지 못한 ‘과정 중인’ 운동이다. 이 영화는 이른바 급진적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과 같은 페미니즘 조류를 두드러지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여성 존재’의 모습들이 전반에 배치된다. 페미니즘의 고민은 이미 젠더화된 사회에서 여성성은 남성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었다. 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재미있는 것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가부장적 남성권력의 도구로 길러지는 남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것도 종교적이며 맹목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어린 남성들로. 발할라로 자신들을 인도해줄 것이라고 추앙을 받는, “태양을 사로잡은” 임모탄 조는 신이자 메신저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자다. 생명을 키우는 태양보다 생명체를 중독시키는 크롬을 숭배하는 이들의 세계관은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상식을 파괴하고, 삶에 기본적인 요소이자 보편재인 물과 작물을 독점한다.

 

이렇게 임모탄 조의 세계는 여전히 지속 가능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지속 가능할 수 없음을 인지하였음에도 그러한 세계의 시스템을 지속시키는데 일조한 이들은 맥스처럼 미치거나 퓨리오사처럼 구원을 꿈꾼다.

 

여성의 몸, 복잡한 ‘전장’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 역의 배우 샤를리즈 테론. 
 

시스템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들의 몸은 그 자체로 전장이 된다. 남성인 맥스의 몸은 피주머니가 되고 여성인 퓨리오사의 몸은 보다 복잡한 전장이 된다. 망가짐을 불사하며 시스템을 견뎌낸 퓨리오사의 몸은(퓨리오사는 한쪽 팔이 없다) 마치 현대 사회의 ‘명예남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몸은 그 시스템을 견뎌왔기 때문에 힘이 있다. 무엇보다 퓨리오사의 몸에서 가장 힘이 있는 곳은 그녀의 눈빛이다. 견뎌왔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덤덤한 그녀의 눈. 그래서 퓨리오사의 명대사는 이렇게 등장한다.

 

“여기선 누구나 다 아파.”

망가진 세상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감내하며 사고와 죽음 앞에서도 그냥 뚜벅뚜벅 걸어갈 뿐 퓨리오사는 섣부르게 좌절하지 않는다.

 

또한 다섯 아내, 성노예들의 몸은 가부장에 종속당하고 유린당한 몸이자,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적극적인 무기로 활용되는 몸이기도 하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심리 상태를 보여줬던 치도와,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생식 기능과 여성성을 전복시켜 무기로 활용한 스플렌디드의 몸이 그러하다. 이것은 모성과 여성성을 찬양했던 급진적 페미니즘의 한 조류를 보여준다.

 

전쟁기계인 워보이들의 세상을 “총알은 죽음의 씨앗”이라는 어록으로 표현한 스플렌디드는 다섯 아내들을 사상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인식은 “누가 세상을 망쳤지?”로 전개되면서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대립하여 세상을 치유할 힘으로 여성성을 내세우며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금융위기 때에도 그 원인으로 남성들의 공격적인 투자 성향 등을 들며 여성들이 불안정한 금융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경제 고치기? 여성들의 몫”(Fixing the Economy? It's Women's Work)이라는 2009년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는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를 위해 여성들이 금융 분야에 진출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글로벌 금융위기, ‘리먼시스터스’도 별 수 없었다?”(머니투데이, 2013년 4월 3일자)에서 보듯이, 당장의 위험만 사라진다면 다시 남녀의 자리만 대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여성성과 모성이 수행해온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으로 페미니즘은 발전해왔다. 어머니들의 땅인 그린플레이스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퓨리오사는 스플렌디드의 죽음으로 가슴은 아프지만, 지체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감독, 호주, 2015) 스틸컷 
  

8기통의 전투차량, 여성의 ‘역량’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인물들만큼 중요한 것은 전투차량이다. 다채로운 차량 추격전과 전투씬을 가능하게 만든 다양한 전투차량 중에서 단연 중심이 되는 것은 8기통의 전투차량이다. 식량, 기름 등을 넉넉히 실을 수 있고, 사막과 진흙밭을 횡단하며 모래폭풍도 돌파한다. 어떤 이는 8기통의 전투차량에서 다섯 아내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내고 워보이 눅스마저 변화시킨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궁’으로 은유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8기통은 워보이들마저도 숭배한다는 점에서(워보이들이 손깍지를 끼며 머리 위로 올리는 포즈가 8기통을 숭배하는 의식이다)보면, 8기통 전투차량은 수단이자 역량(capability)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퓨리오사는 “지금이 바로 탈출할 때야. 누구나 전투차량을 모니까”라고 말하며 자신이 때를 기다려왔음을 이야기한다. 이 때는 자신의 능력이 무르익었을 때, 다섯 아내가 탈출하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가 된다. 다섯 아내 중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수행하고자 하는 이의 이름이 케이퍼블(capable)이란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녀평등을 추구함에 있어서 ‘권리’를 강조하던 사고에서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개해왔다. 권리는 추상적 개인들에게 누구나 주어지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계몽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역량은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마사 너스봄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근본적 요건으로써 역량을 강조한다. 그리고 역량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핵심적 인간 역량 목록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신체적 건강, 상상력, 감정, 관계 등이 포함된다.

 

8기통은 그 속에서 어머니들의 땅 그린플레이스에 대한 (상상적) 공감을 통해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통해 관계를 만들어가는 동안 각각의 캐릭터들은 성장해간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감독, 호주, 2015) 스틸컷 
  

무엇을 희망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할 것인가

 

무엇보다 이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는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선적 세계관의 실패와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 분리주의의 한계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이 에코페미니즘의 메시지가 던져지는 곳이다. 자연과 인간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주장하는 에코페미니즘은 분리주의로 인한 게토화는 인류 전체의 재앙 혹은 전면적 자연재해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다시 소금사막을 건너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가려는 퓨리오사 일행에게는 “망쳐버린 세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라는 맥스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정신 없는 속도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만이 진정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워보이들의 “기억할게”, “나를 기억해”라는 대사는 그래서 공허하지만, 워보이 눅스가 임모탄 조를 배신하고 여성들과 함께하며 “이렇게 의미 있는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완전 멋진 날이야”를 중얼거릴 때 비로소 눅스는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여성들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우는 페미니즘 영화이지만,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남녀는 모두 같은 문제에 봉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세상을 대입해보면,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로 만들어지는 소비중심의 세계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한계에 봉착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며, 더 많은 시장과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과 제3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감독, 호주, 2015) 스틸컷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이 세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를 상상하고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회조직 원리에는 반드시 여성이 수행해온 ‘재생산의 영역’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씨앗전승을 통한 먹거리 재생산과, 세대와 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가치 평가가 새로이 이루어져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재생산’과 그러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여성들은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할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탈출을 가능케 하는 ‘희망’은 결코 저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섯 아내가 품었던 ‘희망’은 퓨리오사에 의해 부추겨졌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이 실현되기를,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했지만, 희망은 박노해 시인이 노래했듯 “이미 우리 안에 와있는”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에 있다(아직과 이미 사이). 이미 우리 안에 와있는 것은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고 할 수 있는 우리 역량의 크기이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상상력이다.   마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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