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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남성성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읽기 
 

 

관계에서 상처는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아프지 않고는 타인을 만날 수 없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내 자리를 내어주고, 또 내 공간으로의 침입을 용인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공간이라는 말은 추상적이기도, 심리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물리 법칙만큼 실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사실은 관계 맺음에 있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폭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근거여야 한다. 즉, 내가 다가가고자 하는 ‘그/녀’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 없이, ‘그/녀’의 기꺼운 환대 없이 다가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침범이다. 그러니 ‘너는 왜 나를 받아주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최소한 ‘어떻게 하면 나를 받아주겠니’는 그나마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말 모두 다가가는 사람만 ‘말’을 한다. 정작 말을 해야 할 이는 누군가가 다가오길 꺼리며, 몸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서려는 ‘그/녀’가 아닐까. 꺼리는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다가오지 말라는 말, 왜 우리는 그 말조차 듣지 못하는 걸까.

 

그러니 관계에서의 상처란 동등하게 배당되지 않는다. 목소리를 잃은 누군가가 짐을 질 가능성이 훨씬 크다. 최소한 그 상처의 배당을 납득할 수 있고 또 온당할 때,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는 말로 옮겨 적을 수 있지 않을까.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과 직면하는 용기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울림연구소 역, 미디어일다, 2015). 이 책의 미덕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자들의 말을 경청했다는 데 있다. 한 번도 자신이 겪은 일을 ‘강간’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거침없이 말의 사용권을 넘겨주었다.

 

자신에게 성행위를 강요한 사람이 아는 선배, 친구, 동료, 데이트 중인 사람 등 통칭 ‘아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그녀들의 강간 피해는 고작해야 남성이 적극적으로 요구한 데 ‘가담’한 정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이를 마지못해 한 경험 정도로 봉합하고 있었다.

 

“가해자가 아는 사람일 경우는 (…) 자신이 경험한 게 강간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동시에 상대방이 얼마나 크게 자신의 믿음을 배신했는지, 또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는 힘이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모두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58p)

 

관계의 친밀성은 개인성의 경계를 최대한 양보하고, 또 반대로 나의 개인성에 대한 자리를 인정받고 배려 받으면서 쌓아온 상호 신뢰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개인성이 완전히 무시된다면 이는 이미 ‘관계’라고 할 수 없다. 특히 개인성의 마지노선인지도 모를 몸을 침해 당한다면, 그/녀는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갈 힘을 상당히 잃게 된다. 그러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경험을 ‘강간’이라는 명징한 용어로 명명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성이 무참히 손상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직면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애인, 커플, 파트너, 부부와 같은 단어들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하나의 쌍, 대칭의 모양새를 그리기 쉽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가 관계 속 개인들을 가로지르는 권력을 지운다. 만남과 동시에 그 둘의 관계가 대칭이 되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타자에게 다가가기 전에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볼 최소한의 배려를 잊기 쉽다.

 

성관계를 둘러싼 ‘선택’과 ‘동의’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피해여성들의 ‘안 돼’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처참히, 손쉽게 묵살되었는지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피해여성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지 않았거나, 명백한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한 번 보자.

 

“제 옷을 벗기기에 저는 ‘잠깐, 그만해. 난 이거 싫어’라고 했는데 (…) 소리 지르고 때리고 밀쳐내도 그는 그냥 제 반응을 즐겼어요. (…) 그가 ‘좋았던 거 다 알아’라고 하더군요.”(33p)

“울면서 ‘안돼 안돼 안돼’라고 외치면서 (…) 어느 순간부터는 울어도 소용이 없고 뭘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53p)

“어느 순간 저도 도자기 그릇을 집어서 그 사람 머리를 있는 힘껏 내리쳤어요. 피가 사방으로 튀었는데도 그는 움찔하지 않더군요.”(56p)

“계속해서 안돼 라고 말하며 몸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190cm의 큰 키를 이용해 (…) 쉽게 제압했어요. 저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65p)

“그는 ‘네가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했는데 (…) 그는 무시하고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155p)

 

그러니 관계의 파탄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와 자리를 무참히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다가간 사람에게 있다. 중요한 것은 친밀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친밀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가에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상호간의 믿음을 확인시켜주거나, 스스로에 대한 점검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친밀함이란 그저 형식일 뿐이다. 어느 순간 관계라는 허울 속에서 목소리를 뺏겨 상처를 온전히 감내해야만 하는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침범이 아니라 만남이 되려면, 타인의 경계를 타인의 의지에 맡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그 사람의 자리와 목소리도 남지 않으면 대체 누굴 만나러 다가가는 것일까.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선택’ 혹은 ‘합의’, ‘동의’와 같은 단어들을 곱씹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례들과 통계 자료를 찬찬히 읽고 있다 보면, 피해자들은 죽느니 그냥 한번 해주고 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주기’로 한 것은 하나의 결정이고, 그 여성은 선택을 한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이 흔하다. 여성들은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한다. ‘내’가 따라갔는데, ‘내’가 술을 마셨는데, ‘내’가 키스를 했는데, 전에도 ‘나’는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내’가 좋아서 사귀는 사람인데…. 그래, 내가 좀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어. 내가 잘못된 거야.

 

세상에, 이토록 주체적일 수가. 마지막까지도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인식하려는 이 각고의 노력이, 사실은 그/녀가 심각하게 개인성을 침해 받았음을 반증하지는 않을까. 강간한 남성은 여성의 유혹에 넘어간, 스스로를 발기한 성기에 굴복시킨 나약한 존재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기 일쑤인데 말이다.

 

선택. 동의. 주어진 선택지가 다음과 같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가.

맞을래? 벗을래? 얻어터질래? 사귈래? 죽을래? 한 번 할래?

 

이 책에서 여성들은 하나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없었다’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합하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때의 선택은 ‘자기결정’인가? 이런 식의 막무가내로 선택을 요구하는 남성은 없다고? 그런 남성은 사이코패스거나 미친놈일 것이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래서 이 책이 필요한 이유이다.

 

성취하고 정복하는 관계, 타자의 자리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선택이나 동의라는 협소한 구도 아래서 오독하지 말도록 하자. 결정이라는 것은 주어진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를 권한에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선택지 자체를 구성할 권한과 권력이 요구된다.

 

불과 몸무게 몇 kg만 더 나가도 쉽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이가 제시한 극단적 선택지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방어적으로 고른 행동이 ‘선택’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오로지 그 ‘동의’를 구해 ‘합의’에 이르고자 압박하기 바쁘다.

 

“그는 그녀와 소통하려 하기보다 단지 동의를 얻어내고자 그녀를 압박하려 든다. (…)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허락할 때마다 그는 작은 승리를 얻어낸 기분에 빠진다. 반면에 상대방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일 때면 그는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려주려고 한다. 사실 그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그는 애초부터 여성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기에 (…) 그녀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해도 남자는 이를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 이렇듯 소통이 완전히 무너지면, 남자는 상대 여자가 언어적 신체적으로 저항하는 상황에서 강간하고도 강간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다.”(160p)

 

사례 속의 남성들은 섹스를 일정 기간 ‘참아주면’ 이미 상대를 존중해줬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연애나 성관계를 오로지 전진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저녁식사, 키스, 애무, 섹스. 그러니 키스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다음 단계에 대한 예비적 동의를 구했다고 오판한다.

 

관계를 이렇게 게임이나 스포츠처럼 생각하면, 관계 맺음에 있어 타자의 자리를 마련해두기 어렵다. 타자는 오로지 이겨야 할 대상, 성취하고 정복해야 하는 사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오로지 자신 스스로하고만 관계 맺는 이런 자폐적인 관계는 사랑이 아니다.

 

데이트가 강간으로 변질되는 사회적 구조를 보라

 

그러니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는 그 누구보다도 남성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에서 나온 말처럼 “폭력은 생물학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170p)임을 이해해야 한다. “강간은 남성성의 본질이 아니며, 다만 폭력적으로 사회화된 남성들이 자신의 성적 자아를 표출하는 방법”(170p)이다.

 

실제 강간은 남녀에게 부가된 사회적 역할 구도를 수용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성역할에 충실한 남녀의 데이트란 “굉장히 다른 기대를 갖도록 사회화된 두 사람을 은밀한 영역에서 애매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44p)이며, “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데이트가 어찌하여 쉽게 강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44p) 알 수 있게 한다.

 

책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강간 후 피해자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며 곧 연락하겠다고 말하거나, 심지어 사랑을 고백하며 앞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자고 제안하고, 다음 날 화를 내고 욕을 하는 피해자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말하며 의아해하는 가해자들의 태도는, 그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남성들이 폭력적인 성관계를 ‘연애’ 혹은 ‘사랑’이라고 상상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씁쓸하다. 이 책은 남성들이 스스로를 점검할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무려 26년 전에 발간되었다. 이런 시간 간극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것들이 많다. 시간 차를 생각하면 무기력함과 분노감이 밀려올 수도 있다. 그러다 문득 한국어 제목이 새로운 장면을 선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제는 “I never called it rape”였지만 한국어 제목은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라고 살짝 변주를 주었다. 부정문의 제목을 읽고서는 자연스레 들러붙을 만한 ‘그럼 뭘까’라는 물음에 답을 하자니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원제에서 힌트를 얻어 ‘강간이다’라고 심플하게 답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26년이라는 시간 차와 한국과 미국이라는 공간 차가 답변을 주저하게 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강간이지만, 이 단어를 설명할 맥락을 고민하다 보면 현재 한국에서의 문제들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벌어진 데이트 폭력에 대한 잇단 고백들을 접하면서 고민했던 문제들도 이에 덧입혀 본다. 이 사건에서도 과거로부터 오는 기시감을 떨칠 수는 없지만, 그런데도 상당히 다른 측면들이 존재한다. 그런 다른 측면을 깊게 응시해야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역사, 경험, 상황, 심정, 그리고 몸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26년 전 미국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면서 좌절하기보다는 차이점을 찾아냄으로써 현재 우리를 어떻게 설명하고, 명명하고, 그것을 유통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면 좋을 것 같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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