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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와인이 숙성된다는 것 

 

 

지난 글에서 와인이 동굴 안에서 숙성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와인이 숙성된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말일까?

 

김치가 익고 장이 익듯, 와인도 익는다. 시간이 지나면 변화를 거친다. 레드와인은 검붉은 빛이 벽돌색으로 옅어지고, 화이트와인은 볏짚색으로부터 점점 진해져 꿀색을 담게 된다. 신맛의 날카로움이 덜 사나워지고, 까칠 탄닌도 둥글둥글 부드러워지고, 단순한 과일이었던 맛과 향기도 복잡미묘하게 여러 층을 지니게 된다.
 

           ▲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 스털링 빈야드(Sterling Vineyards)   © 여라 
  

과일이 지닌 신선한 맛과 향을 그대로 지키고 싶으면 와인메이커는 발효를 마친 와인을 스테인레스통에 담지만, 숙성시키기 위해서는 장독처럼 숨쉬는 오크통에 와인을 담는다. (요즘은 고대 관습으로 돌아가 장독같은 암포라에 담기도 한다.) 이왕이면 참나무가 지닌 향과 탄닌이라는 질감도 더한다. 와인의 과일맛과 균형을 이룰 무게와 질감을 더하는 거다.

 

샴페인이나 까바는 발효 과정을 마치고 남겨진 효모찌꺼기를 그대로 남겨두어 그 향과 맛을 와인에 담는다. 와인을 오크통에서 병으로 옮겨 담은 뒤에도 10년 20년 혹은 더 오래 숙성시킬 수 있다. 숙성시킨 와인은 뭉근한 불에 오래 달인 탕약처럼 맛이 한데 어우러진다.

 

잘 숙성시킨 와인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1분만 보고 있으면 피로가 몰려오는데도 계속 보게 되는 먹방 요리채널처럼 잘 숙성시킨 와인을 표현해볼까.

 

아~ 너무 근사해요! 후추향 가득한 살라미 향이 나요!! 어떻게 포도로 만든 와인에서 이런 향이 날까요? 맛은 어떻구요! 처음엔 검은 자두 콤포트 같은 맛이 펀치 날리듯 입안 하나가득 터지더니 (침이 꼴깍), 향신료, 아까 그 살라미맛도 나고, 이런이런, 숲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가죽향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아요! 목 넘김은 프랑스 최고급 실크스카프가 휘감은 것처럼 부드러워요. 삼키고 나서도 뒷맛이, 아 이 입안에 남는 맛 어떡해요! 끝도 없이 이어져요. 아~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  우리 집 마당의 포도나무. 꽃대가 쑥쑥 자라 포도송이 모양이 되더니 꽃이 피었다.   © 여라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숙성시킨 와인과 나의 관계는 이러한 느낌적 느낌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중에서

 

돈에 눈이 벌겋게 된 사기꾼은 숙성시킨 와인을 더 비싸게 팔 궁리만 하겠지. 물론, 오크통에 들었든 병에 들었든 와인을 숙성시키기 위해 보관할 때 필요한 공간도, 시간도 돈이다. 비용을 잘 계산하려면 잔대가리 많이 굴려야 한다. 그에게 예술이란,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여 이득을 크게 남길 수 있는 지점을 찾는 일이겠다. 얼마나 뒀다 내다 팔까? 아예 사실보다 오래되었다고 뻥치자. 다른 와인을 라벨만 바꿔 붙여서 비싸게 팔아먹자, 하며. 있지도 않은 시간을 와인에 담았다고 사기 치겠지, 흥.

 

오래된 와인이라고 다 좋은 건 아냐

 

하지만, 오래된 와인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와인은 저마다 전성기가 있다. 마냥 기다리다 전성기를 지나치면 아끼다 똥 되는 격이다. 게다가 그저 그런 와인이 동굴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하여 좋아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철이 들고 어른 되는 게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동굴에서 시간을 오래 지내고 훌륭해질 조건을 가진 와인이 있다. 맛의 집중도와 산미가 적당히 강하며 당도, 알코올 등과 이루는 구조가 탄탄한 어린 것이 동굴의 세월을 버틴다. (물론 사람은 사람 나름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오래된 와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와인의 진가를 잘 알고 즐기는 이도 늘 오래된 와인만을 찾는 것도 아니다. 와인의 나이는 어려서 좋은 와인도 있다. 예를 들어 보졸레 누보는 햇와인이니 싱싱할 때 한 해의 수확을 감사 드리는 맛이 있다. 마트에서 구입하는 대부분의 와인은 2-3살이다. 대량생산되어 가볍게 소비되도록 시장에 나온 와인이다.

 

그러니까, 모든 와인은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나이를 붙일 필요가 없는 와인도 있다. 빈티지(와인을 만든 포도를 수확한 해)를 섞은 non-vintage(너는 빈티지, 나 말고…) 와인은 몇 년 도에 태어났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때론 이런 저런 규정에 맞추기 어려우면 차라리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보르도 와인이 비싸서 못 마신다고?

 

보르도는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지기는 너무 어려운 상대이지만 시간의 덕을 톡톡히 보는 와인이다. 그 병 모양처럼 어깨에 힘을 잔뜩 쥐고 있고, 라벨에 그려져 있는 샤토처럼 찾는 이들에게 문을 닫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가서기 어렵고, 즐기는 방법을 익혀야 하고, 시간을 보내며 공을 들여야 한다.
 

           ▲   스페인 리오하 보데가스 이시오스(Bodegas Ysios)  © 여라  

 

그런데 눈 튀어나오게 비싸 가끔 뉴스에 나오는, 유명짜한 샤토 몇 군데(물론 그들은 굉장히 많은 와인을 만든다)에서 만든 그 ‘보르도 와인’은 보르도 전체 와인 생산의 5% 이하라고 한다. 보르도 와인이 비싸서 못 마신다고 하는 건, 자기와 상관이 있을 확률이 거의 없는 이들이 증세는 무조건 나쁘다며 부자증세에 반대하여 게거품을 무는 것이나 비슷하다. 억지를 쓰자면 그러하다.

 

보르도 지역은 세계 와인 생산량으로 이탈리아와 1, 2위를 엎치락뒤치락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와인 생산지다. 와인평론계 여왕이시며 와인 관련 백과사전을 여러 권 펴내신 잰시스 로빈스 님의 웹 사이트(jancisrobinson.com)에 의하면, 보르도에서 와인을 1년에 대략 9억병을 생산한다. 9억병이 얼만큼이냐고? 세계인구가 70억이고 750ml 와인 한 병을 다섯 잔 정도로 치고, 15세 이하인 19억명 정도를 빼면- 얼추 ‘위 아더 월드~’ 와인 한 잔씩 나눠먹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체 보르도 와인의 1/4는 한 병에 3유로 이하(유럽에서의 가격입니다. 미안~ 국내 소비자 가격은 만원 단위로 곱하기 3, 크게 할인하면 곱하기 2?)로 판매되고, 15유로 이상 되는 와인은 전체의 3% 정도란다. 그러면 위로 아래로 빼고 대략 중간 70% 정도가 한 병에 소비자 가격 3-15유로에 판매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르도 와인은 양으로 보나 액수로 보나 프랑스 와인 수출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된다. 그러니 숙성시켜야만 진가를 뽐내는 그런 보르도 와인 말고도 마셔줘야 할 괜찮은 나이, 괜찮은 가격 보르도 와인이 많다. 내 나이가 어때서~ 즐기기 딱, 좋은 나이인데.

 

와인이 숙성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때, 가장 온전히 그리고 적절히 자신을 드러내어 만족스런 때에 가까이 가는 여행이다. 오크통에 담긴 와인은 자기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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