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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눈 뜨거운 심장, 세상을 아우르는
“2015 SeMA Green: 윤석남 심장”전 

 

 

책을 펼칠 때면 책 날개를 슬며시 들춰본다. 환히 펼쳐서 정독하지는 못하고 속독 후 본문으로 들어간다. 전시 도록을 받아 볼 때에도 작품 한 점을 유심히 보는 시간만으로도 아까울 텐데 작가 이력에 눈이 간다. 세속적인 방식이라고 느끼면서도 그이가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게 되면 특별한 자취를 찾고만 싶다.

 

기어이 그 자취를 찾아내면 나의 평범함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는 다르게 살았으니까 지금 이목이 집중되고 존경 받는 건 합당하지.’ 만약 특별한 게 없어 보이면 간혹 실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의혹인 걸 알면서도 작품이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잔망스러운 관심이 실례겠지만 윤석남(76)은 대단히 특별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  “2015 SeMA Green : 윤석남 심장”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  ©김현주 
  

‘40세가 되어서야 작업실, 즉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을 갖고 비로소 미술에 입문’했다는 그녀에 대한 소개는 예술이 그리 범속한 게 아니라는, 일반의 이해와 요구에 제대로 정통한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우리가 예술의 범속함은 참지 못하면서도 그 예술이 내 세계 밖의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느낄 때엔 왜 예술이 어렵냐고 불평을 토로하기도 한다는 거다.

 

우리가 작품을 볼 때엔, 잘은 모르겠지만 내게 감동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가슴을 울렸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이런 이중적인 관심에 따른다면 윤석남은 또 한편 대단히 보편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40세가 넘어 작가의 세계에 입문한 윤석남은 1982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그녀의 작품 세계는 점차 여인들, 강아지, 물고기, 연꽃과 같이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은 대상과 세계를 품는다. 그리고 이건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람, 그러나 한편 보편적 존재로서 윤석남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2015 SeMA Green: 윤석남 심장”전은 미술관의 소개에 따르면 ‘한국 작가를 집중 조명하기 위해 격년제로 개최하고 있는 SeMA(서울시립미술관 Seoul Museum of Art의 약자) 삼색전(블루, 골드, 그린) 중에서 원로작가를 초청하는 ‘SeMA Green’의 두 번째 전시이다.’

 

참고로 서울시립미술관의 원로작가 초청전의 첫 번째 전시는 2013년에 개최된 김구림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한국미술 1세대 전위예술가로 평가 받는 김구림의 작품을 다루었다. 두 번째 전시로 초대된 윤석남의 전시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시립미술관 본관의 1층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전시는 쉽게 그러나 가볍지는 않게, 다채롭게 허나 견지하는 세계는 설득력 있게 펼쳐져 있다.
 

▲  “2015 SeMA Green : 윤석남 심장”전.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 2011.   © 김현주 
  

전시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는 <어머니-반에서 하나로>, 둘째는 <자연, 그리고 우주-하나에서 천으로>, 셋째는 <여성사-느슨하고 견고한 연대>, 넷째는 <문학-글을 그리다>이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기획하며 세심하게 조율한 부분이구나 느끼게 하는 지점은 어머니라는, 윤석남의 근원적 주제 의식을 살리되, ‘반에서 하나로’라는 우리 시대의 갈급에 대해서는 보는 이들이 스스로 그 필요성과 상황을 인식하게끔 하나의 방을 만들어서 헤아리게 하는 부분이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2011)을 거치고 나면 첫 번째 섹션의 주제인 <어머니-반에서 하나로>가 도출되었던 윤석남의 세계가 시대 의식이 반영된 전시 도록 자료와 언론 기사와 병렬되어 제시되고 있다.

 

<화이트 룸-어머니의 뜰>은 전시의 문을 여는 작업으로, 2009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고 만든 추모의 정원이다. 연꽃의 정원을 둘러싸서 벽을 채우고 있는 오려낸 한지 조각들과 한 벽에 넓지 않게 부착된 거울은 애도와 추모를 흰 빛으로 표현해 낸 작가적 해석이다. 혹시 생의 말기에 마티스가 오린 종이 조각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 방대한 종이 조각들이 지닌 단순한 집중에 숙연해질지도 모르겠다.

 

마주한 사람들, 두 손 잡은 인물, 웃고 우는 얼굴, 일상의 양식으로서의 밥, 노동하는 손, 꽃, 새, 산, 심장…. 이중 우리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는지 한번 살펴 볼 법도 하다. 단순한 놀이일 수도 있을 종이 오리기가 닿은 세계는 너도 나도 아는 일상다반사이다. 그 일상을 비추고 있어서 더 깊숙이 여겨지게 만드는 거울상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이 바로 그 일상에 하얗게 꽃 피우고 있다. 이 사후적 작업이 도드라지지 않는 건, 바로 그 벽 뒤에 펼쳐진 오랜 숙고와 문제 의식의 발로 때문이다.

 

“반(半)에서 하나로”는 왜 제기되어야만 했는가

 

아직 작가를 모르는 이들에게 윤석남을 보이고, 윤석남에 대해 얘기하려면 몇 가지 넘칠지도 모를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 첫 번째 섹션을 이루는 <어머니-반에서 하나로>는 지금으로부터 30년 가량을 거슬러 올라 전시된 1986년 “반(半)에서 하나로”전을 언급해야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
 

▲   “2015 SeMA Green : 윤석남 심장”전 첫번째 섹션 <어머니-반에서 하나로>    © 김현주  

 

1970년대 말, 현실비판적 예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그 기류 속에 민중미술이라고 불리는 미술의 격랑이 대두되었다. 미술이 삶에 어떤 영향력을 고민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발언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각고의 고민이 반영되었던 민중미술의 흐름은 미술 그 자체의 새로운 양식을 고민하던 이전까지의 흐름과는 분명 다른 문제의 표방이었다.

 

사회의 첨예한 쟁점에 대해, 분단된 국가 상황과 민족에 대해, 자본주의의 폐해와 계층(혹은 계급)의 차별에 대해 현실적 발언을 예술로서 해야 한다는 의식과 작가로서의 의무의 발로를 고민하던 민중미술이라는 큰 흐름은 1980년대 한국미술의 주된 궤를 이루었다.

 

그러나 국가, 자본, 계급, 민족과 같은, 당장 해결될 수 없어 보일 정도의 거대한 문제 앞에 가정, 노동 안에서의 성차별, 여성, 소수자와 같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던 목소리는 토로의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남의 “반(半)에서 하나로”전은 ‘우리’에 대한 반성이 머무르려고만 하던 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누구인지에 대해 작품으로, 전시로 두드린 것이다.

 

미술사가 오진경이 <한국 여성주의 미술과 몸의 정치학>에서 거론하고 있는 원동석의 민중미술에 대한 지적인, 1980년대 들어 등장한 동인들이 ‘기존미술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우리의 삶의 실체를 모색한다는 공통점을 취하고는 있으나, 나와 이웃을 포함한 ‘우리’라는 기반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맥락은 그러므로 중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윤석남의 등장은 의미심장했다.

 

1980년 김영자, 김진숙과 함께한 “소묘 3인전”, 1982년의 첫 개인전과 그룹전 “인간전”, 1985년의 김인숙,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전”을 가지고 난 후, 이 “시월모임전”의 두 번째 전시로 꾸린 것이 “반(半)에서 하나로”였다. 이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이 <손이 열이라도 Too Busy>(1986)이다. 열 개의 손이 달린 어머니의 상을 그린 작업으로, 39세에 홀로 6남매를 기르기 시작했던 어머니에 대한 복합적인 마음이 반영되었다.

 

<손이 열이라도>에는 부양과 양육이라는 부모,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부여되어 온 과업이 생존이라는 또 하나의 절명과 맞닥뜨리며 빚는 고단함과 강인함 모두가 투영되어 있다. 초기작과 나란히 제시되고 있는 당대의 신문 기사에는 ‘주부 화가’, 혹은 ‘여류 화가’, ‘가정주부’인 이들이라는 지칭이 화석처럼 붙어 있고 ‘남성중심 화단선 「여류」인식 색안경’과 같은 헤드라인이 붙어 있다.

 

“어머니의 눈”에서 시작해 더 너른 세계로

 

이때까지 윤석남의 작업이 회화로 평면에 한정되었다면 1993년 두 번째 개인전인 “어머니의 눈”은 이번 전시까지를 아우르는 조각 설치 작업의 시작이었다. 목재의 결을 살리거나 버려진 나무판이나 빨래판을 조합하여 만든 어머니상들은 그림에 담겨있는 것만으론 아쉽거나 그림이 채 다 살리지 못할, 사물과 세상의 결을 작품 안에 녹여 들이기 시작했다.
 

         ▲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없이> 2008.   © 김현주  

 

더불어 나무 패널에 유채와 같은 전통적인 기법을 구사하는 듯 보이지만 윤석남이 다루는 나무 패널은 그림을 위한 평면의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삶에 대한 언급으로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2차원으로 판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이 아닌, 나무 그 자체의 모양과 결이 투박하면서도 쓰임 있게 작품이 되었다.
 

2008년 학고재 갤러리에서 윤석남의 <1,025: 사람과 사람없이>(2008)를 본 이들에게는 반가울 수 있는 작업인,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거두어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목재 유기견 작품의 일부가 이번 전시에 들어왔다. 999개의 목녀상이 제 각각의 빛과 몸체로 <999-빛의 파종>(1997)이라는 제목으로 펼쳐져 있다.

 

바로 이 <자연, 그리고 우주-하나에서 천으로>라는 섹션은 어머니라는 보편적인 주제로부터 출발한 작가의 작품 세계가 필연적으로 보고 걸은 더 너른 세계를 시사하고 있다. 이를 모성으로 축약해버린다면 윤석남이 거쳐 온 길을 너무 간단히 직선으로 포장해 내는 것이 될 것이다.

 

소홀히 다뤄진 역사 속 여성들에게 주목하다

 

2010년을 넘어오며 윤석남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여성의 이야기들이다. <여성사-느슨하고 견고한 연대>에서 담고 있는 인물은 허난설헌, 김만덕, 이매창과 같이 재능이나 심성의 비범함에 비해 역사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여성들이다.
 

조선 중기 시인이자 작가, 화가인 난설헌의 비애를 다독이고 그녀의 예기를 기리기 위해 나무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붓을 가슴에 한아름 안긴 작품 <허난설헌>(2014), 정조 시대 기근이 들었을 때 재산을 쌀로 바꾸어 제주도민을 살린 거상 김만덕의 얘기를 핑크빛 심장으로 구현한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 그리고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 이매창의 문기를 분홍빛 곽에 한아름 담아 재구성한 작품 <이매창>(2015)은 <여성사-느슨하고 견고한 연대>에 묶인 작품들이다.
 

         ▲  “2015 SeMA Green : 윤석남 심장”전. <허난설헌> 2014  © 김현주  

 

윤석남은 이들과 손을 맞잡는 목조 자화상의 늘어진 팔과 어우러져, 강인한 결속이나 다짐은 아니지만 관심과 애정을 한 사람의 증인으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160여점의 드로잉이 벽면과 좌대에 위치하여 윤석남의 일상의 결은 어떠한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멀게만 느껴지던 작가라는 존재도 그 특수함이 작품으로 빛나기까지 가족을, 감정을, 일을 어떻게 다스리고 분투하는지, 담담히 적고 있는 메모와 간략한 드로잉을 통해 접근해볼 수 있다.

 

이쯤 되면 40세가 되어서야 미술에 입문했다는 그녀의 이력만이 호기심 어린 시선에 의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부당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마흔에 시작했다는 그 사실만큼 칠순을 넘기고 팔순을 앞둔 그녀가 누군가를 외롭게 두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역사의 대척되고 편향된 시각과 끊임없이 토닥여 온 족적이 이번 전시이다. 누군가에게는 친절한 전시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찡하게 와 닿을 전시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숙제를 짊어지게 할지 모른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페미니즘 문화 잡지 <IF>를 창간하고 발행한 이가 윤석남이다.  김현주

 

• “2015 SeMA Green: 윤석남 심장”전

   2015년 4월 21일-6월 28일.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평일 오전 10시-오후 8시, 주말과 공휴일 오전 10시-오후 7시(월요일 휴무)

   관람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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