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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존재, 할머니와 들꽃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5. 5. 10. 09:30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존재, 할머니와 들꽃
신혜원의 <들꽃의 노래> 원화전 

 

 

서울 연남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의미 있는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갤러리는 SI 그림책학교에서 운영하는 “some art and books”, 작가는 SI졸업생인 신혜원씨로 첫 그림책 <들꽃의 노래>를 출간하면서 본 전시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  신혜원의 <들꽃의 노래> 원화전   © 사진 제공:Somebooks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노트 크기만한 인물 드로잉이 벽면에 죽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는 기법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할머니 한 분 한 분을 담담하게 먹으로 그려놓은 것들이다. 같은 사이즈의 꽃 그림들이 할머니 바로 아래에 같이 걸려있다.

 

원화 전시 한 켠에 이번에 출간된 그림책 <들꽃의 노래>가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표지는 전통의상인 한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노방'이라는 옷감이라고 한다. 색색의 옷감표지 위로 작가가 손으로 하나하나 실크 프린팅한 들꽃들이 눈에 띈다. 슬쩍 넘겨보니 어라, 빈 페이지들뿐이다. 잘못 인쇄된 걸까 생각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불투명한 종이 위에 흰색으로 프린팅된 할머니들 얼굴이 보인다. 한 면은 할머니 얼굴, 반대면은 들꽃들이 흰색으로 프린팅되어 있다.

 

대체 이 할머니들은 누구인지, 이 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생존해계신 ‘위안부’ 할머니 수만큼 찍는 그림책

 

▲   신혜원의 그림책 <들꽃의 노래> 표지 
 

신혜원 작가가 <들꽃의 노래>에서 그린 분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그리고 할머니들과 함께 그린 들꽃들은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한 꽃들이다.

 

2014년 나온 그림책 초판은 당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중 생존해 계셨던 55분을 기리는 의미로 총 55부만을 출간했다. 당시 초판본은 한 권 한 권 표지 뿐 아니라 속지까지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올해 2쇄를 출간하기 전 두 분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2쇄본은 53부만을 출간하였다. 그래서 내년에 3쇄가 나오게 된다면 과연 몇 부를 찍을 수 있을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이 책의 총 작업 기간이 5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묻어있는 책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작업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손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업기간 동안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과정이 힘들어서 친구에게 하소연했더니, 친구는 ‘네가 이런 식으로라도 할머니의 아픔을 나눠가지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작가 본인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작가의 문제 의식이 단지 말뿐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졌다.

 

전시를 보며 여러 가지 떠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신혜원 작가를 만나 인터뷰했다.

 

▲  <들꽃의 노래> 작가 신혜원 씨.   © SIpicturebook 
 

-이번 작업을 기획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특별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재로 삼게 된 개인적인 배경이 있는지요?

 

“작업의 시작은 ‘검정’이었습니다. ‘검정’이라는 것도 단순하지 않고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서, ‘검정’이 갖는 모순적인 의미들 중 슬프지만 아름다움을 간직한 존재라는 면에 집중하여 고민을 해봤어요. 그러다가 떠올리게 된 것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의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화였습니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것입니다.”

 

-<들꽃의 노래>가 다른 그림책들과 다른 지점, 작가가 생각하는 작업의 의의를 말해주세요.

 

“제 책 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림책은 많이 있습니다. 이 책이 다른 그림책과 다른 지점은 멸종 위기의 들꽃들과 할머니들의 사라져가는 느낌을 온전히 그림의 감정만으로 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편하고 까다로운 책일 수도 있지만, 소중한 것은 조심스럽게 다룰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량 인쇄가 아닌 (현재 생존해계신 할머니들의 수만큼만) 수작업으로 만든다는 것도 다른 지점이겠지요.”

 

-작업 기간이 5년이면 긴 편인 것 같습니다. 작업 기간 동안 특히 힘들었던 점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주제 자체가 어둡고 무거웠고, 시작 지점이 ‘검정’었던지라 처음 작업은 검은 바탕에 어두운 그림이 나왔어요. 계속 무겁게 슬퍼하면서 갈 것인지, 축제처럼 갈 것인지(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위해 오히려 떠들썩하게 노는 것처럼)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흰 종이에 흰색으로 찍자는 결론이 나오는 과정이 힘들어요.

 

작업을 시작한 때로부터 출판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네요. 그 기간 동안 내내 이 작업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잠시 미뤄둘 때도 있었지만, 이 책을 완성하지 않으면 이후에 다른 작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죠. 다른 작업을 하다가도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신혜원의 <들꽃의 노래> 원화전  © 시로 
 

-작업을 하는 동안 혹은 작업이 끝난 후 아쉬웠던 점이나 고민이 되는 점이 있다면요?

 

“여러 제약 사항이 있어서 현재 책에 실린 할머니들은 모두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도 매우 많은 할머니들이세상을 떠나셨고, 초판에서 2쇄를 찍은 1년 사이에도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표지부터 제본까지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이라 힘들 때도 많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손을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작업적인 부분은 계속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아쉬운 지점은 없고요. 이 책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얼마 남지 않은 살아계신 할머니들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 지가 제일 고민되는 부분이죠. 다만 잊지 않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이것이 어떤 행동을 만들어낼 때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할머니들을 기억하는데 이 책이 손톱 하나 정도라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티스트로서, 또는 그림책 작가로서 지향하는 작품의 방향이나 기획하고 있는 향후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할머니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오셨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고통을 받지 않기를 바라며 세계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나비기금’을 만드셨습니다. 할머니들을 보면 볼수록 시야가 열리고 배우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의 제 작업도 여성, 그리고 고통 받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는 5월 21까지 SI 그림책학교 본관 1층 썸 그림책 갤러리에서 열린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23길, 8 수요일 휴관. 문의: 010-4428-4408) 그림책 <들꽃의 노래>는 갤러리 옆 북샵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53권이 모두 판매되면 2쇄는 더 판매되지 않는다. <들꽃의 노래>를 출판한 <somebooks> 대표 조선경씨는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에 깊이 공감하며, 책 판매 수익 중 출판사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께 기부한다고 말했다.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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