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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거리의 진보’를 묻게 하는 영화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 
 

 

 

▲  다큐멘터리 감독 황윤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다큐멘터리 감독 황윤의 전작 <작별>(2001)은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아픈 현실을 새끼호랑이 ‘크레인’을 통해 그려냈고, <침묵의 숲>(2004)은 두만강과 백두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호랑이 서식지를 찾아 다니며 개발과 관광으로 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의 현실을 조명했고, <어느 날 그 길에서>(2006)는 로드킬(road kill)로 희생당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삵 ‘팔팔이’를 통해 감동적으로 보여줬다.

 

특히 <어느 날 그 길에서>는 도로의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생태통로가 거의 쓸모가 없으며, 조금 더, 조금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인간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 이상 로드킬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줬다.

 

로드킬을 지도 위에 표시하자 그것은 곧 우리나라의 도로 지도가 되었는데, 인간에게 빠르고 편리하며 풍경까지 좋은, 넓은 도로가 동물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깨웠다. 우리는 이제 자동차가 마냥 반갑지 않고 곧은 도로, 긴 터널이 동물의 서식지를 단절시키고 파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간이 편리해지는 과정에서 약간의 조치를 취해 생태 환경도 보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편하지 않다. 그 조치를 취하라고 정부와 기업에게 요구하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생활방식 이면에 동물의 죽음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저 죽음을 망각하거나 외면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이 더 느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 길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죽음을 스크린 가득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는 영화였다.

 

영화 <P짱은 내 친구>와 만화 <은수저>

 

▲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 포스터 
 

위의 세 편이 모두 야생동물에 관한 것이라면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가축, 그 중에서도 돼지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인간 아이’ 도영이 ‘돼지 아이’ 돈수와 함께 우리를 응시하며 “엄마! 돈까스 말고 돼지가 좋아졌어요”라고 말하는 포스터는 일본영화 <P짱은 내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1990년 일본 오사카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6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아이들에게 생명과 먹을 거리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자 새끼 돼지를 키워보자고 제안한다. 아이들은 귀여운 돼지 P짱을 통해 돼지를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졸업을 앞두고 P짱의 처우를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되고, 팽팽한 대결 끝에 P짱은 식육센터로 보내진다.

 

TV다큐멘터리로 방영되고 책으로도 출간된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생명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 대한 열띤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돼지를 먹지 않는 입장에서 P짱의 결말이 흡족한 것은 아니지만, 돼지가 단지 돼지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임을 아이들이 직시하고 선택한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이러한 직시는 만화 <은수저>에서도 재현된다. 훗카이도 오오에조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는 비(非)농가 출신 하치켄은 학교에서 판매 목적으로 기르는 돼지에게 ‘돼지덮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애정을 쏟으며 돼지를 먹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이 만화에서는 빚을 갚지 못해 몰락하는 소규모 축산농가의 상황, 가축에 쏟는 농민의 애정, 가축들이 놓인 가혹한 처지, 가축이 공장의 부속품처럼 시스템의 일부가 된 기업축산농의 문제 등 모순처럼 보이는 여러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치켄 역시, 그러한 고민 끝에 ‘돼지덮밥’에게 애정을 쏟으면서도 돼지가 ‘고기’가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공장 스톨 속 돼지 vs 친환경농장의 ‘돈수’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위 두 작품과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출발점은 전염병 예방을 위해 수백만의 가축, 곧 생명을 산 채로 묻은 살처분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 살처분 장면은 매우 짤막하게 나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살처분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전염병이지만, 이 전염병을 일으키고 크게 확산시킨 이유는 ‘공장식 축산업’이기 때문에, 감독은 육식을 중단하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식 축산' 농장과 대안적인 농가를 찾아 다닌다.

 

▲   공장식 축산농, 스톨 안에 갇힌 돼지의 모습.   ©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  
 

공장의 촬영 허가를 받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겨우 허락을 얻어 촬영된 축사는 그나마 깨끗한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곳은 햇빛이 아니라 인공 조명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돼지들은 몸을 돌릴 수도 없는 스톨(철제 우리)에 갇혀 있었다. 커다란 주사기를 찔러 암퇘지를 인공 수정시키고, 새끼돼지들은 우리 너머로 어미 돼지의 젖을 빨다가 생후 3주만에 어미로부터 분리되어, 용도별로 사육된다.

 

새끼들은 태어나서 곧 마취 없이 송곳니와 꼬리를 잘리는데, 수컷 새끼들은 거세되어 먹고 싸고 자고를 반복하다가 6개월만에 도축되고, 암컷 새끼들은 스톨에 갇혀 어미돼지들의 운명을 반복한다. 공장 관리자도 여기가 바로 상품을 찍어내는 공장임을 씁쓸하게 인정한다.

  

반면 대안적인 농장은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생활협동조합과 연계된 축산농가들은 일반 농가보다 사육 공간의 넓이나 먹이, 항생제 이용에 있어서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 농가 수 또한 적지 않을 거라 짐작되지만 아마도 감독은 그보다 더 나은 곳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곳은 훈훈한 인상의 원중연 씨의 흑돼지 농가다.

 

▲  친황경 농장에서 돼지들과 만난 윤과 도영.   © <잡식가족의 딜레마> 
 

여기서 만난 어미 돼지가 ‘십순이’고 십순이의 막내 아들이 ‘돈수’다. 원 아저씨는 돼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키우고 있었다. 햇볕이 들고 돼지들이 움직이기에 그렇게 좁지 않고 기분 좋은 꿀꿀거림이 있다. 하지만 십순이가 계속 임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어미와 새끼는 떨어져야 하고, 수퇘지인 돈수는 고기의 질감을 좋게 하기 위해 거세를 할 수밖에 없으며, 때가 되면 농장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농장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돼지들이 보리밭을 마음껏 뛰어 놀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평생 축사에 갇혀 우유를 생산하던 젖소들이 생애 처음으로 초원에 나가게 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초원을 보고 펄쩍펄쩍 뛰던 젖소들처럼 원중연 씨의 농가에서 돼지들은 빠른 속도로 보리밭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육식을 멈출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생에 즐거움 하나라도 누릴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 자유를 얻은 젖소들 유튜브 영상 보기 http://bit.ly/1i7FCFz

 

육식을 두고 갈등하는 가족

 

이 영화에 대한 한 가지 바람은 딜레마가 어느 한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라 제목처럼 ‘가족의 딜레마’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여성감독 윤은 야생동물 수의사인 영준을 만나 아들 도영을 낳았다. 윤은 육식을 중단하고, 먹는 것에 대해 영준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지만 영준은 관심이 없다. 황조롱이와 고라니의 상처를 아파하며 그 치료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밥도 챙겨 먹지 못하는 영준에게 가축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선택권이다. 또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친밀감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육식에 대한 물음은 알고 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  친환경 농장, 돼지와 놀고 있는 도영의 모습   ©<잡식가족의 딜레마> 
 

반면 도영은 윤을 따라 십순이과 돈수를 만나게 되고 돼지에게 짚을 넣어주고 함께 뛰어 논다. 때로는 돈수가 생각나고 때로는 돈까스가 먹고 싶다. 이렇다 보니 이 집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윤은 때로는 도영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고, 고기 없는 밥상에 불만을 가진 영준을 보듬어야 한다. 고기반찬이 빠지지 않는 어린이집 식단에 신경을 써야 되고, 혹시나 고기를 먹이지 않아 도영의 키가 남들처럼 자라지 않을까 혼자 마음 졸여야 한다.

 

그래서 제목을 좀더 솔직하게 ‘잡식인 윤의 딜레마’로 바꾸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 딜레마가 결국 세 사람이 가족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제목은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본다면 영준의 캐릭터도 꽤 귀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값싼 고기’를 위해 희생된 것들

 

먹을 거리의 진보, 먹을 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값싸면서도 더 간편하게, 먹고 싶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대이다. 주식인 쌀은 국내 생산량이 국내 소비량을 웃돌고 있고, 곡식이 많이 들어가서 특별한 날에만 해먹던 떡도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먹을 거리 부문에서 과거보다 더 나아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나아졌는지를 따져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분식집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1천5백원짜리 김밥을 보면, 이 김밥은 대부분 맛이 없다. 재료가 더 튼실하고 맛도 있으며 더불어 김밥 마는 노동자가 적절한 임금을 받으려면 김밥의 가격이 1천5백원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맛있고 좋은 음식은 대개의 경우 그 질을 유지하기 위한 정성과 재료만큼 비쌀 수밖에 없다.
 

▲ 소비자가 고기를 값싸게 먹기까지 희생된 것은 ‘동물의 삶’이다. ©<잡식가족의 딜레마>  

 

우리가 먹는 육회는, 치킨은, 돈까스는 이 김밥과 같다. 소비자가 고기를 값싸게 먹기까지 희생된 것은 ‘동물의 삶’이다. 더 넓은 공간에서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덜 고통 받으며 살아야 할 동물의 삶이다. 농민은 더 적은 동물을 더 넓은 공간에서 적정 소득을 받으며 키울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로 고기 값은 비싸져야 한다.

 

값싼 상품은 생산 과정의 착취를 의미한다. 상품이 싸지는 게 아니라 임금이 비싸져야 하는 것이다. 적은 임금으로도 값싼 고기를 더 먹을 수 있는 게 진보가 아니라, 많은 임금으로도 비싼 고기를 덜 먹게 되는 게 진보이고 민주주의가 아닐까 한다.

 

<잡식가족의 딜레마> 포스터를 다시 본다. 우리를 응시하는 돈수의 눈이 참 맑다. 풀을 먹고 꿀꿀대던 게 떠오른다. 한여름 물줄기를 맞고 땅바닥에 뒹굴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서 도영과 함께 우리를 응시하는 돈수의 눈은 불편하다. 왜 우리가 치즈돈까스에서 돼지의 전체적인 모습을 떠올려야 하는가? 왜 삼겹살이 누군가의 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가? 한때 그것이 나에게 먹이를 조르던 존재였음을, 어미와 떨어지기 싫어서 꽥꽥거리던 존재였음을 어찌하여 생각해야 하는가.

 

이 영화는 5월 7일 전국 9개의 극장에서 개봉한다. 영화 속에서 십순이와 돈수를 만나봤으면 한다.  길수 

 

<잡식가족의 딜레마> 예고편 보기: http://bit.ly/1FTgy2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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