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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빈곤, 슬픔에 움직인 마음을 따라서…
<케테 콜비츠 Kathe Kollwitz> 전, 북서울미술관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케테 콜비츠 전] © 김현주
1944년 7월, 케테 콜비츠는 그의 자녀들과 며느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은 남겼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죽음을 1년 앞두고 남긴 말로, 콜비츠는 1945년 전쟁이 끝나기 2주 전에 사망했다. 긴 불행과 고통을 감내하며 끝내 종전을 보지 못한 삶. 어쩌면 전쟁이 끝나도 끝나지 않을 이후를 예감했던 것일까.
하지만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는 콜비츠의 말 대부분은 틀렸다. 2015년, 일본 오키나와 발(發) <케테 콜비츠 전>이 한국에 온 것으로도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담담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도상이 그림 속에서 나와 우리에게 각인된 것으로 충분하다. 미술사로 좁혀 얘기해 본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현대미술이 작품으로 자기 갱신을 거듭해 온 미술의 역사라면, 콜비츠의 입지는 좁다. 새로운 형식의 조형 언어를 찾아 분투해 온 아방가르드의 역사에 콜비츠의 자리를 마련하기는 다소 요원하다. 그러나 미술로 소급하여 역사를 기술하는 게 아닌, 미술이 매개가 되어 쓰인 민중의 역사를 좇아본다면, 1930년대 노신이 주도한 중국 목판화 운동이나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서 콜비츠의 자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슬픔은 사회적인 불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두 개의 회랑에서,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 전과 그 후의 작품을 나누어 다룬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1522년부터 1525년까지의 독일 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침머만(Wilhelm Zimmermann)의 <대농민전쟁사개설>를 읽고 이에 자극 받아 제작한 <농민전쟁 Peasants' War> 연작과, 1893년에서 1897년까지 전개된 독일 직조공들의 봉기를 모태로 한 극작가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의 연극 <직조공들 Die Weber>을 관람하고 제작한 <직조공 봉기 A Weavers' Rebellion> 연작이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주요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작품은 콜비츠 당대의 전쟁과 죽음을 주제로 다룬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모두의 불행임을 의심할 수 없지만 콜비츠에게도 통렬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전시장 한 켠에 간략히 서술된 연표를 통해 짐작된다. 콜비츠에게는 두 명의 소중한 페테(Peter)가 있었는데, 삶에서 이 둘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1903. 동판화 17*19cm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14년 10월 10일에 임관한 18세의 둘째 아들 페테가 전사한 날은, 떠난 지 12일 후인 10월 22일. 전사통지서가 날아온 것은 10월 30일이었다. 이날 콜비츠의 일기장에는 단 한 줄의 문장이 씌어졌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서 페테라 지은 첫 손자는 1940년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1942년 동부전선에서 전사한다.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나고 자라났으며 의사인 칼 콜비츠와 결혼한 케테 콜비츠(1867~1945) 이력의 외양만 보면, 혁명과 노동자 계급의 삶, 반전과 빈곤을 평생 다루고 영예로운 예술가의 삶의 순간도 국가로부터 박탈당해야만 했던 개인사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일찍이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외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인간애에 대한 영향과 당시 진보적인 사상으로 전파되던 사회주의에 눈뜬 아버지로부터의 교육은 인간 자유와 존엄에 대한 신념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게를 깨우쳐줬다. 남편 칼 콜비츠는 다른 나라보다 일찍 자리 잡기 시작한 의료보험 제도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손수 베를린 노동자 거주 지역에서 의료 행위를 펼치던 인물로, 케테 콜비츠의 작업 세계를 고무하고 격려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콜비츠 작품 전반에 드리우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프로파간다로 정치선동 미술의 전선에 있다거나 투철한 계급 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보다 건강한 이들과 보다 건강한 삶에 대한 관심과 연대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추모 Im Memoriam Karl Liebknecht>는 정치적 해석과 이해 관계는 달랐지만 국가에 의해 살해당한 혁명가 리프크네히트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슬픔은 사회적인 불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개인의 삶에 드리우는 빈곤과 억압을 표현하고 널리 알리려고 했던 콜비츠에게, 유화나 수채화와 같은 단 한 점으로서의 개별 가치를 갖는 작품보다 여러 장을 제작하여 보급할 수 있는 판화라는 매체는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일지 모른다.
▲ 케테 콜비츠 전쟁 연작_6 <어머니들> 1922-1923. 목판. 34x40cm
전시에 포함된 목판화, 석판화, 동판화는 각각이 판화기법 상 특징적인 지점을 갖는다. 목판화는 나무에 새겨서 양각과 음각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세부 표현은 다소 투박하나 흑백의 대비와 강조에 적합하다. <전쟁 War>(1921-1922)과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1925) 연작이 목판화로 제작되었고, 메시지의 긴박함과 명료성을 전해야 할 때 목판화가 주로 선택됐다.
목판화에 비해 세밀한 세부 묘사에 적합한 동판화(에칭, etching)는 <농민전쟁>과 같이 고발해야 할 기록에 수반되었다. 콜비츠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작품들은 석판화로 제작된 작품들일 것이다. 수채화와 같은 색조를 지니면서도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석판화는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관조적인 깊이를 자아낸다. 사랑과 유대, 슬픔이나 절망의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 주로 석판화가 이용되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사랑 받는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1924)와 <전쟁은 이제 그만>(1924)이 석판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오키나와에서 온 작품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출품작은 모두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사키마 미술관 소장품으로, 이 전시는 평화를 염원하는 사키마 미술관과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의 지속적인 교류와 유대를 바탕으로 성사됐다.
흔히 전시를 볼 때 작품을 가장 눈여겨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마음에 드는 작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전시 감상을 한층 더 즐길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를 덧붙여본다면 그건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의 주요 교전지로 전쟁으로 주민의 4분의 1이 희생된 곳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오키나와에는 미군해병대 비행장인 후텐마 기지가 들어섰는데, 사키마 미술관은 바로 이 후텐마 기지 옆에 들어선 사립미술관이다. 미술관에서는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설파하기 위한 일환으로 반전과 인간애를 주제로 한 콜비츠의 작품을 다수 수집했고 이 소장품이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서울에 온 것이다.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케테 콜비츠 Käthe Kollwitz 전] 2015년 2월 3일~4월 19일. © 김현주
작품의 소장 출처와 더불어서 콜비츠와 같은 판화의 경우 또 한 가지 눈 여겨 볼 게 있다. 작품을 보다 보면 하단에 작가의 서명 이외에 숫자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에디션(Edition)이라고 부른다. 에디션은 작가가 계획한 작품수가 몇 개이고, 그 중에서 이 작품이 몇 번째로 제작된 작품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5/100이라고 표시되어 있다면 100개 제작되기로 한 작품 중 5번째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판화나 사진,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작품과 같은 경우, 복제가 가능한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몇 개의 작품까지를 제작할 것인지를 정해둔다. 물론 판화라고 해서 전부 여러 장의 에디션을 갖는 것은 아니며, 마네의 어떤 석판화의 경우에는 세상에 단 한 장만이 존재한다. 판화, 사진, 비디오 아트 작품이 아닌 경우에도 에디션이 있는 경우도 있다. 서울 플라토 갤러리(久 로댕 갤러리)에 있는 로댕의 청동 <지옥의 문>은 전 세계에 7개의 공식 에디션이 있으며 그곳에서 함께 볼 수 있는 <칼레의 시민>도 12개의 에디션 중 하나다.
전시를 관람하는 동선의 마지막에 만나는 작품은 <피에타> 상이다.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중심인데, 종교적인 의미만큼 아들의 죽음에 비탄해 하는 어머니라는 보편성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얼굴에 콜비츠 자신을 대입한 <피에타> 상을 보며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앞에 끝날 수 없는 고통 앞에 있는, 한국의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린다. 콜비츠가 “슬픔은 사회적인 불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듯, 지금의 불행과 고통에 통감하고 함께 기억하는 그 한 사람이 아쉽다.
며칠 전 한 장의 사진을 봤다. 운동장에 도열하여 대기하는 십여 대의 푸른 버스를 교실 창문을 통해 찍은 사진이다. 일자는 2014년 4월 15일.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내온 단원고 학생의 사진이다.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고 젊음의 달뜸만이 있었을 그 날 한 장의 사진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한 장의 기록이 됐다. 4월 16일은 다가오고 일 년 간 한 뼘의 진전은 아쉽고 관심은 점차 식는 건 아닐까. 이번 전시는 4월 19일까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계속된다.
[케테 콜비츠 전] 2015년 2월 3일(화) – 4월 19일(일) 평일 오전 10시-오후 8시, 매주 월요일 휴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노원구 동일로 1238 (T. 02-2124-8800) 관람료 무료
▣ 필자 소개- 김현주 : 철학, 미술이론, 영상문화학을 공부했으며 예술의 상품 가치 대신 선물과 증여 가치에 대해 고민 중이다. 정체성을 폐업 큐레이터에 두고 있으며, 일이 있을 때에만 잠깐씩 개업하고 일이 있을 때만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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