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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 아이의 얼굴, 아이의 물건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여기, 한 아이, 한 아이의 방이 있다. 그 바다, 한 배에서 죽었지만 아이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한 아이 또 한 아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한 아이, 한 아이의 방을 사진작가가 찍고 그 기록을 지금 서울, 안산, 제주, 광주, 인터넷상에서 보여준다. 수학여행을 떠난 바로 그날의 방은 아닐지 모른다. 미처 정돈하지 못한 이부자리와 책상 위가 남겨진 게 아니다.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아이를 기다린 지난 1년 사이 어느 날의 기록이고, <416기억저장소>는 앞으로 1년에 걸쳐 이 프로젝트를 더 진행할 것이다.
▲ 단원고 2학년 2반 한세영 ©기록: 조우혜 (2015년 2월 27일)
사진작가들은 한 달에 이십여 일 아이의 방을 찾았고 가야할 방이 그만큼 남았다. 304명의 이름 하나 하나를 호명하고 아이의 방에서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그리고 않아야만 한다는 부모님과 작가들의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 형용할 수 없는 일이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것이다.
사진은 한 아이의 방을 담는다. 방의 전경, 아이의 모든 물건, 남긴 일기장 한 페이지까지 사진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건 모두 담는다. 그 기록이 한국 곳곳에 흩어졌다. 서울과 안산에 아이의 방이 있다면 제주에는 아이가 남긴 것이 있다.
모인 사진작가들은 방을 찍는 방식에 대해서 논의했다. 작가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누르고 대신 기록하는 사람으로 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방을 누가 찍었는지 전시에서 미처 헤아리기는 어렵다. 전시니까 사진 미학에 대해, 작가만의 스타일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가혹하고 지금 적절치 않다.
작가들은 아카이브를 위해 시간 내어 동참하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이들이 안산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눈물만 흘린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이들의 방 대신, 아이의 방이 여기에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이란 전시명으로, 길고 긴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지금까지의 일부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방 대신 아이의 방을 기억하자는 건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 얘기는 기획이나 의미의 상충을 따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기억저장소에서 이런 결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행동으로 우리에게 아이의 방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제안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사진이라는 매체와 예술 실천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이고, 더불어 4.16 이후 많은 이들이 절감하는 무력과 분노를 향해 있다.
▲ 단원고 2학년 8반 임건우 ©기록: 이재각 (2015년 2월 17일)
사진은 방을 동결시키지 못한다. 꽃다운 날 그 하루를 박제시키는 도구가 아니다. 사진에 드러나는 물건이나 사람의 표정과 동작에서 사회적인 약속과 메시지를 읽어낸다면 시민사회의 합의와 이행의 덕목에 대해 밝은 이들일 테다. 즉 상징적 기호를 잘 파악하는 거다. 그리고 이 기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사진이다.
사진은 약속을 물리적으로 인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무너지고 울먹이는 사람이 있다. 사진을 앞두고 무너지는 사람은 기호에 급습당한 게 아니다. 사진의 어딘가가 순간 나와 연이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가족이나 친구, 유년 시절의 한 시점일 수도 있고 상처나 고통 혹은 기쁨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문화철학자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사진에 대해 느끼는 ‘보통’의 감정, 거의 길들여진 감정을 스투디움(studium)으로, 이 스투디움을 파괴함으로써 발생하는 요소를 푼크툼(punctum)이라 불렀다. 그리고 푼크툼은 ‘주사,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상처’ 등의 의미로 ‘나를 찌르는 우연성’이라고 설명한다.
아이들의 방 대신, 아이의 방을 기억하자는 건 아이들, 유가족들, 상처받은 국민과 같은 집단의 이름으로 국가에게, 박근혜 정부에게, 경찰과 검찰에게 하는 호소의 필수불가결함을 내려놓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분노와 무력이 향하는 대상이 집단이고 거대하지만 허울뿐이라 여겨지는 것도 지금 상실감이 오는 이유이다. 사는데 삶 같지 않은, 아이의 삶 혹은 세월호에서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부지하고 있다는, 이 죽은 삶에 사회적 약속과 합의가 여전히 강제되고 있다는 데 의문을 갖기 위해서는 나를 찌르는 순간에 반응해야 한다.
분향소, 학교, 납골공원이라는 제도적으로 구획되고 만들어진 공간을 사진이 채운다. 안산합동분향소라는 거대한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 한 아이, 한 아이의 사진이다. 안산하늘공원과 그 주변 납골공원에 자리한 아이들의 추모 공간에도 네모난 공간 마다 아이의 사진이 있다. 하늘공원에는 28개씩 구획된 격자 마다 아이의 사진이 자리한다.
그리고 서울 광화문 광장, 사진위주 류가헌, 안산 416기억전시관, 제주 기억공간 re:born, 광주 아하갤러리, 오마이뉴스 웹전시 공간에 아이의 방과 아이의 물건이 있다. 이곳에서 보게 될 것은 사진들, 방들, 물건들이 아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리고 사진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그 하나 하나와 대면하고 하나 하나에 반응하기다.
▲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서울 광화문 광장 설치 장면. © 촬영: 신유아
사진과의 대면, 나를 찌르는 우연성에 반응하기
전시와 연동해서 4월 11일에는 세월호 문화예술 ‘연장전’이 주최하고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이 주관한 세월호 1주기 추모 사진 포럼 <재난시대의 사진-기록에 대한 강박과 애도의 갈림길에서>가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사진기획자 송수정의 사회로, 미학박사 양효실이 “은유로서의 난민, 난민으로서의 예술”을, 사진평론가 김현호가 “귀환하는 슬픔과 흩어져 사라질 슬픔”에 대해 발제하고,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과 사진가 노순택이 사례 발표를 했다.
포럼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송수정은 ‘살아남은 자들이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물으며 ‘사진이 아무런 쓸모가 없거나 파급력이 적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셔터를 눌러야 할 때, 그 대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를 1주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앞으로 고민해야함을 제기했다.
양효실은 발제에서 국가나 제도라는 근대적 폭력에 은유적으로 저항하는 언어이자 이름으로 ‘난민’을 들며, 416과 416 이후의 난민-되기라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무기, 도구, 자리를 잃는 기이한 실천’이 국가주의에 맞서는 ‘탈주선’임을 강조했다.
김현호는 사진 찍기라는 행위와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지니는 시각적 잔혹함을 염두하면서도, 지금 우리가 남기는 416이라는 슬픔의 이미지에 혹여 잔류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른 연민이나 감상은 배격해야 한다는 태도에 대해 거론했다.
이희훈은 사진기자에게 현장이란 곳은 그곳에 미처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고 향하는 곳으로서, 성숙한 존재이고 싶으나 제도적으로 부딪히는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노순택은 아해(AHAE)라는 이름의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유병언과, 기쁜 날 남긴 사진 한 장이 영정 사진이 되어야 하는 역설에 대해, 또 발언의 현장에서 채증을 가하는 경찰 사진과 같이 세월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진에 대한 소회를 나누었다.
이 날에 대한 스케치에서 생각이 멈추는 지점이 있다면, 포럼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질문이 거의 없었다는 것. 그 침묵이 모두에게 너무나도 두텁고 버거웠을지 모르겠으나, 세월호와 사진이라는 주제 앞에 던지는 질문이 왜소하고 값싸게 느껴지는 증인의 공감대가 그곳에서 형성되었던 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 본다.
▲ 사진위주 류가헌 전시 2관,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 김현주
사진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할 것들에 대하여
4월 11일 밤 광화문 전시를 찾았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광화문 광장 북단에는 경찰의 확성기로 들리기에는 ‘집회참가자’들이 ‘불법’으로 ‘도로’를 점령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폭력’시위는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겠고 경찰은 차분히 잘 대응하고 있으며 폭력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채증’하여 색출해 내겠다는 경고가 수차례에 걸쳐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로를 점령하는 사람은 없고 광화문 광장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광화문을 에워싸서 교통을 통제하는 국가 권력이 ‘여러분’이라고 부르는 자는 누구였을까.
또한 법에 따라 엄중히 다스리겠다는 경찰의 확성기와는 달리 이들이 주고받는 교신에서는 ‘유가족’은 연행하지 말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캡사이신을 맞고 하나둘 끌려나오는 시민에게 경찰이 하는 행위는 자신들이 찍은 채증 사진과 대조하는 것이었다. 영화제 레드카펫에서나 봄직한 카메라의 세례가 그곳에 있었다.
사진이 지닌 힘이 세월호 앞에 너무나도 작고 무력함을 느끼는 사진작가, 사진기자, 사진 관계자들의 포럼이 있던 날 밤의 광경은 홀연 낮을 잊게 만들만큼 강력했다. 국가 권력이 행하는 사진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고 적법하기만 하다.
돌아와 읽은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이다. ‘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 사람 하나가 와서 문지기에게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시골사람은 법 앞에서 기다리다 임종에 임박해서 묻는다. “모든 사람들이 법을 얻고자 노력할진대... 이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문지기가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다른 누구도 입장 허락을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겠소.”
이 짧은 소설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다. 문은 이미 열려 있기 때문에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마시모 카치아리)는 설명이 있지만, 법 앞에서 죽어간 시골 사람에 주목하여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가 목숨을 대가로 행한 것이 ‘법의 문을 영원히 닫히게 만들 수 있었’고(조르조 아감벤) 그렇기 때문에 닫힌 문은 이제 열 수가 있다.
아이의 방에서 너무 멀리 왔을지도 모르겠으나 시골 사람의 보잘것 없지만 인내심 있던 행동이 다른 실행의 계기를 마련한다. ‘난민’이기에, 힘이 없기에 행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의미 없음의 의미가 만드는 꿈이 있다고 얘기해야겠다. 사진과 예술의 쓸모없음이 국가와 법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조적이다.
▲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포스터
*전시명: 416 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 1. 아이들의 방
*주최: (사) 416가족협의회
*주관: 416기억저장소, 기억공간 re:born, 류가헌,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 오마이뉴스
*후원: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아름다운재단, 안산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일시 및 장소
◇ 안산- 416기억전시관
2015년 4월 2일 (목) - 5월 31일 (일) 오전 11시 - 오후 7시 (개관식 4월 2일 오후4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661-3 3층
◇ 제주- 기억공간 re:born www.facebook.com/20140416yellow
2015년 4월 16일 개관, 2015년 상설전시.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3982
◇ 서울-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장 뒤편
2015년 4월 11일 - 4월 19일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
사진위주 류가헌 전시 2관 www.ryugaheon.com
2015년 4월 7일 - 4월 19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6시 30분(월요일 휴관)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7-10
◇ 광주- 아하갤러리 blog.naver.com/ahhagallery 광주시 동구 금남로 3가 15-1. 3층
2015년 4월 14일 - 5월 27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 웹 전시 오마이뉴스 www.ohmynews.com 2015년 4월 15일 오픈
※ 필자 소개- 김현주: 철학, 미술이론, 영상문화학을 공부했으며 예술의 상품 가치 대신 선물과 증여 가치에 대해 고민 중이다. 정체성을 폐업 큐레이터에 두고 있으며, 일이 있을 때에만 잠깐씩 개업하고 일이 있을 때만 글을 쓴다. ahwu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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