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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포도밭에서 시작한다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새순이 돋는 봄

 

 

[작가의 말] 여라의 와이너리 리턴즈!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1의 두 번째 칼럼에 소개되었듯이, “여기-떠남-만남-즐김-다시 여기에”라는 밑그림으로 ‘고향’에서 시작해 길 떠난 칼럼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상 속에서 다시, 자주 만나요! 

 

▲ 서울에 돌아온 이듬해 봄, 모 와인아카데미에서 프랑스산 와인 포도나무 모종 두 그루를 얻어 마당에 심었다. ©여라  

 

현지사람들과 모습이 비슷한 쿠바의 한인들

 

20세기 초 쿠바로 이주한 한인들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멀리 이주하고 서너 세대 지내온 한인들을 보면, 그곳이 독일이든 카자흐스탄이든 하와이든 현지사람을 닮는다. 쿠바에서 살아온 이 한인들 역시 쿠바 현지사람들과 모습이 비슷했다. 엄밀하게는 그들이 이제 현지인이니, 쿠바사람이 쿠바사람처럼 생겼다는 건 하나마나 한 당연한 소리다.

 

이 영상물을 통해 만난 이들을 한인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도 딱히 이름(성)을 제외하고는 외모나 언어, 문화, 음식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은 아니었다. 부모님이나 더 윗세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자녀들이 새 땅에서 잘 적응할 수 있게 쏟은 교육열 같은 성질이었다. 그들에게 집은 어디일까. 살고 있는 곳이 집이라면, 모국의 의미는 무엇일까.

 

희미해져 가지만 그들을 동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사전에서 동포의 포, 세포 포(胞)라는 한자를 찾아보았다. 뜻밖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발을)구부리다, 세포(細胞) 혹은 포자(胞子), 배, 태보(胎褓) 혹은 삼(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 태의(胎衣: 태의 껍질), 자궁(子宮), 친형제(親兄弟) 혹은 동기(同氣: 형제와 자매), 숙수(熟手) 혹은 조리사(調理士), 부엌, 방울, 두창(痘瘡: 천연두) 혹은 종기(腫氣), 그리고 여드름.

 

이 많은 뜻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주머니다. 무엇으로든 우리를 한 주머니에 담을 수 있다면 -약간은 포스트모던하게라도- 동포로 볼 수 있겠다.

 

포도밭의 시공간

 

프랑스 루아르 밸리 지역에서 만든 상세르 와인, 캘리포니아에서 만든 퓨메 블랑 와인,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만든 소비뇽블랑 와인은 모두 같은 포도종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이들은 소비뇽블랑 동포다. 하지만, 저마다 자란 땅에서의 세월을 담고 있어 외양이 다르다. 세포가 담고 있는 유전자가 같긴 한데도 말이다.

 

신맛이 강해 깔끔하다는 정도가 이들이 지닌 비슷한 성질이겠다. 와인메이커가 여러 가지 기술로 재주를 부려도 와인 포도가 자라는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것이 아주 넓은 의미로 그 지역의 토양과 지형, 기후가 만들어내는 테루아(terroir)다. 

 

▲  10월 추수를 앞둔 스페인 리오하 알라베사 지역의 탐스러운 템프라니요 포도나무  © 여라  

 

밥 먹을 때 밥상에 오른 것들을 받으며 밭과 바다, 농부와 어부의 땀에 감사하는 일을 싸가지 없게도 자주 잊는 것처럼, 와인 마실 때에도 우리는 포도밭을 종종 잊곤 한다.

 

와인은 농산물 가공식품이다. 이 말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과 달리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하늘의 제약을 받고, 땅의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농산물 ‘가공’식품이라 수확 이후 우리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정과 변수와 공정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천지인이 잘 어우러져야 하니, 주어진 한계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즐거울 것 같다.

 

사람도 와인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나무는 돌아다닐 수가 없지만, 나는 여행도 떠나고 집에 돌아올 수도 있다. 원하면 오래 머물 수도 있고 자꾸 다닐 수도 있다. 바람에 너풀거리는 마음 따라 일상 속에서 리듬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돌아다니다 보면 나에게 잘 맞는 테루아(terroir)가 있을 것이다. 운명적으로 딱 하나뿐인 그런 곳(한계) 말고, 마음의 리듬, 계절의 흐름, 지형이나 문화가 잘 맞아 나의 기운을 잘 펼칠 수 있는 그런 곳(무한한 가능성) 말이다.

 

각자의 때를 기다리는 봄
 

▲  마당에 있는 포도나무에 새순이 돋는다.  © 여라 
 

봄이 특히 아름답고 고마운 이유는 우리에게 처음을 되새기게 해주기 때문이다. 처음의 모습과 각자의 시간, 공간을 매해 다시 보여준다. 겨우내 추위 속에서 꽃봉오리를 키워온 목련은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에게 먼저 자리를 내어주는 듯하다가 어느 날, 밤에도 달빛에 빛나는 영롱함으로 뭇사람을 홀리다 곧 처절하게 간다. 저의 방식으로 아름답다.

 

모두 같은 때에 새 순이 나고 꽃이 피었던 것 같았던 나무들은 봄이면 다 각자의 때를 기다린다. 순이 나와도 잎이 손바닥을 쫙 펼 때까지 걸리는 시간의 길이도 다 다르다. 꽃도 다 제각각 다른 때에 왔다가 모두 자기 방식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열매는 또 어떤가. 가을 단풍과 낙엽도 마찬가지다.

 

봄은 나의 시간과 때와 속도가 그리는 그림이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있음을 알려준다.

 

올해도 마당에 메를로 포도나무와 샤르도네 포도나무에 새순이 돋아나오고 있다.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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