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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의 삶을 ‘다시’ 기억하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집중해서 듣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쪽 자리에 앉아있고 난 이쪽 자리에 앉아있으니 주도권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에 불과합니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난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주인공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이 음산한 기운의 취조실에 앉아 형사를 향해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감독 모튼 틸덤)이 시작된다. 

 

          ▲  앨런 튜링의 삶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중에서. 
  

무채색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형사와 마주 앉아 ‘그쪽 자리’와 ‘이쪽 자리’를 언급하는 이 영화의 첫 대사는 <이미테이션 게임>이 담고 있는 갈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인을 전쟁의 부품으로 사용한 뒤 필요가 다하면 내다버리는, 당대의 규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존엄성을 파괴해버리는 국가(법)와 소수자 개인의 갈등 말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은 영웅

 

<이미테이션 게임>은 실존 인물인 앨런 튜링의 삶에 대한 전기 영화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인 앨런 튜링은 전쟁에 대한 핵심 정보를 담은 독일군의 암호체계 ‘이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를 개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전쟁 종료를 2년 이상 앞당기고 1천4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구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국가는 동성애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엄중한 외설 행위’라 문제 삼으며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고 호르몬 치료를 받을 것을 강요한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마흔두 번째 생일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미테이션 게임>이 전제하는 시대상은 어두울대로 어둡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한없이 무거운 비극인 것만은 아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레이어(layer)는 앨런 튜링 팀이 ‘이니그마’를 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추리영화를 보듯 긴장감을 유지하며 흥미로운 방식으로 제시된다. 

 

          ▲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감독 모튼 틸덤)  중에서. 
  

두 번째는 학창 시절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닫게 되는 소년 앨런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그가 이후에 개발한 기계에 첫사랑의 이름(크리스토퍼)을 붙였다고 설명하며 애잔함을 남긴다. (이는 이야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 기계의 실제 이름은 ‘Bombe’였다고 한다.)

 

마지막은 앨런 튜링 자택에서 발생한 강도 사건을 계기로 경찰이 그의 집에 들이닥친 이후의 이야기인데, 이는 영화의 러닝타임 중 적은 분량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의 전기 영화이지만 그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담고 있다기보다 ‘이니그마’를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고 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전쟁 영웅’으로서의 그의 성취에 방점을 찍고 있다. 앨런 튜링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선택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다름’의 의미를 긍정하며, 그의 삶을 다시 기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Stay Weird, Stay Different”

 

“저는 여러분들 앞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 있지만 앨런 튜링은 결코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요. 저는 16살에 내가 남들과 너무 다르고 아무데도 속하지 못한다는 좌절감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다르다고 느끼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이 코멘트를 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속하는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남과 다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세요. 그리고 당신의 차례가 와서 무대 위에 서게 되면, 같은 시기를 건너는 다음 사람에게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을 전해주세요.”

 

오스카 각색상을 수상한 작가 그레이엄 무어의 수상 소감은 <이미테이션 게임>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앨런 튜링이 영국 왕실에 의해 사후 사면되고 공을 인정받았듯이, ‘다른’ 자신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면 모든 것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 긍정적인 메시지 말이다. 앨런 튜링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삶은 역사에 남아 다시 기억된다. 

 

          ▲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감독 모튼 틸덤)  중에서.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는 영화는 이야기가 이미 알려져 있다는 부담(risk)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에 중점을 두고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명확한 메시지를 지닌 재미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한 사람의 생이 가지는 이야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맛깔 나게 살려내지는 못했다.

 

다소 밋밋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의 공이 크다. 앨런 튜링 역의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앨런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의 긴장과 성취의 쾌감부터 범죄자 낙인으로 삶이 무너진 뒤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모습까지, 그의 삶의 복잡한 측면들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한다.
 

앨런 튜링의 좋은 파트너, 조안 클라크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는 결혼하지 않고 직장 일을 하며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뚫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여성노동자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암호 해독을 담당한 ‘블렛츨리 파크’에는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이 사실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진 영국 드라마 <블렛츨리 서클>은 <이미테이션 게임>과 연계해서 볼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로, 여성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앨런 튜링의 삶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  앨런 튜링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의 성취에 방점을 찍고 있기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호르몬 요법을 강요 받으며 존엄을 파괴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많은 부분 축소되어 그려진다.

 

영화는 그의 생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부분인, 앨런 튜링이 호르몬 요법을 시작한지 1년 후인 1954년 6월 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엘리자베스 2세가 2013년에 앨런 튜링에 대한 사후 사면을 허가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는 사실, 그의 연구가 컴퓨터 개발의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 등을 마지막 장면 위에 자막으로 전달한다.

 

전쟁 이후 그의 삶의 중요한 국면들을 축소해 표현하거나 자막으로 생략해버린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이야기들은 앨런 튜링의 생에 대해 말하기 위해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정보부의 책임자는 보안을 이유로 들며 암호 해독팀의 모든 자료를 태워버릴 것을 명한다. 영화는 ‘이니그마’를 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앨런 튜링 팀이 그들의 활동 흔적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 장면은 국가와 사회의 낙인으로 인해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앨런 튜링의 삶의 고난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와 차별의 목소리가 지루한 돌림 노래처럼 계속되는 한국 사회에, 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주는 메시지가 무겁다.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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