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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웃을 수 있길
<이경신의 죽음연습> ‘호스피스’에서의 삶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2014) 포스터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이창재 감독, 2014)을 보고 왔다. 우리말 제목으로는 영화 내용을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The hospice’(호스피스)라는 영어 제목을 보면 금방 호스피스에서의 삶을 담았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거론하는 ‘호스피스’. 임종기 환자들이 겪는 육체적 고통을 줄여주고 정신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라고 수없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곳에 직접 가본 적은 없다. 생각해 보면,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호스피스를 마지막 삶의 터전으로 이용한 사람도 없다. ‘호스피스’라는 단어에는 익숙하지만 솔직히 호스피스라는 실제 공간은 내게 낯선 곳이다.

 

그래서 바로 상영관으로 달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은폐하고 무시하고 무화시키는 우리 사회 속에서 죽음이 제 모습을 훤히 드러내는 특별한 자리, 호스피스 병동. 그곳을 엿보고 싶었다.

 

완화 의학과 함께 하는 ‘호스피스’

 

원래 호스피스는 ‘숙소’를 뜻했다. 중세시대 유럽의 순례자들이 숙소로 이용했던 가톨릭 교회를 가리켰다. 순례 길에 병이 나면 그곳에서 치료도 받고 간병도 받았다. 교회 성직자는 병든 신도를 정성껏 보살폈다. 여기서 현대적 의미의 호스피스 정신, 즉 헌신과 환대를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덜 수 있도록 돌봐주는 곳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호스피스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전 세계로 확산시킨 것은 오히려 영국이다.

 

특히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사이며 사회사업가였던 시슬리 손더스(Cicely Saunders)가 1967년 런던 외곽에 세운 세인트 크리스토퍼 호스피스 병원의 운영 원칙은 오늘날 전세계 호스피스 병원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고 한다. 시슬리 손더스는 병이 아니라 환자를 중심에 놓았고, 또 신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고통을 모두 포함한 ‘총체적 고통’(total pain)을 완화시키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호스피스에 어원을 둔 현대 병원, ‘hospital’은 호스피스 정신을 망각했다. 환자보다는 질병에 주목하고 환자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보니,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오히려 비인간적인 고통을 가중시키기에 이르렀다.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고 질병의 치료가 목적인 병원이 임종기 환자에게 적합한 공간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2014)  중에서. 호스피스로 향하는 길. 
 

1980년대부터 의학의 전문 분야로 자리 잡은 완화 의학(Palliative Medicine)이 호스피스 정신을 껴안았다. 임종기 환자뿐만 아니라 불치병 환자를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이 완화 의학의 목적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삶 속에서나마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배려를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치료 중심 의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완화 의학과 함께 하는 현대의 호스피스 병원은 단순히 박애 정신에 기대지 않고 전문적이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보살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초기 호스피스의 발전된 형태로 보인다. 종교적 기원에서 출발한 호스피스이니만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몸을 보살펴주는 사람들, 특히 자원봉사자들의 역할이 호스피스의 핵심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유럽에서 진행 중인 호스피스 운동은 완화 의료와 결부된 호스피스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자가 원하면 입원도 가능하지만, 환자가 병동에 머물러 있길 원하지 않고 여건이 허락되면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환자뿐 아니라 환자 가족에 대한 사회적, 심리적, 정신적 지원까지 포함하는 것이 완화 의학이 추구하는 호스피스 관리다.

 

프랑스에서 본 완화 의학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한 할머니가 집에서 고통 완화 의료적 처치뿐만 아니라 딸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과연 우리나라 호스피스 개념도 유럽에서처럼 병동에 갇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일까?

 

호스피스 병동 안 다양한 사람들의 ‘다른 삶’

 

영화 <목숨>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는 말기 암 환자들의 삶을 담았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호스피스 병원은 말기 암 환자를 위한 곳으로, 노인병 환자, 말기 불치병환자, 만성질환자에게 열린 공간은 아니었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호스피스 병원의 수는 전국적으로 불과 54 곳에 불과하다. 암환자조차 원한다고 호스피스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을 수는 없다. 그만큼 시설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호스피스는 주로 가톨릭이라는 특정 종교와 연관되어 있어,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외국의 경우, 호스피스 병동에 머무는 환자들의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 호스피스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각자가 원하는 종교 생활을 적극적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만약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숨>(2014) 
 

영화 <목숨>에서 개개인은 죽는 그 순간까지 가능한 한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치병 말기 암 환자도 각자의 생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먹을 수 있다면, 비록 몸을 다칠지언정 짜장면을 먹기 위해 외출을 불사하는 박진우 할아버지, 가족들을 위해 호스피스를 포기하고 일반 병원을 찾아 항암 치료를 받고 생명 연장을 시도하는 사십 대 가장 박수명 씨, 자살을 기도하고 호스피스에 보내졌지만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의지를 되찾는 외로운 쪽방촌 사람 신창렬 씨,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렵사리 마련한 내 집을 둘러보고 죽어가는 김정자 씨.

 

죽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살아온 방식이 달랐듯이 죽어가는 방식, 죽음 직전의 삶을 꾸려가는 방식도 다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스피스 전문의 염창환이 쓴 <한국인 죽기 전에 해야 할 17가지>(21세기 북스, 2010)에서도,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의 책 <감동을 남기고 떠난 열 두 사람>(21세기 북스, 2010)에서도, 베아테 라코타가 쓰고 발터 셀스가 사진을 찍어 만든 책 <마지막 사진 한 장>(웅진 지식하우스, 2008)에서도, 국적을 막론하고 호스피스에서 생을 마감한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은 제각기 달랐다.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그대로 죽어간다. 죽음 앞에서 체념한 사람은 미리 삶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마지막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 죽기 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죽는 그 순간까지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내적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조심하면서,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면서 삶의 마무리를 정갈히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생의 마지막 현장에도 ‘웃음’이 있다는 것

 

죽어가는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해도, 마지막 기력을 잃는 순간까지 인간답게 살다 죽고 싶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이다. 호스피스가 탄생한 까닭, 호스피스가 주목 받는 까닭이 바로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살 권리’에 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서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잖아요. 살아 있다면 누구나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떠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요.” -오츠 슈이치, <감동을 남기고 떠난 열 두 사람>

 

오츠 슈이치 의사의 말대로, 누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는 살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인간답게 죽는다는 것에서 여러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웃을 수 있다는 것,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목숨>에서 특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도 바로 ‘웃음’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공간인 만큼 자칫하면 우울해질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웃음꽃이 핀다. 의료진도, 죽어가는 환자도, 그 환자의 곁을 지키는 가족들도 웃는다. 호스피스 병동도 삶의 현장이다.

 

오츠 슈이치 의사가 들려주는 신장암 말기 환자 K 이야기가 생각난다. K는 늘 자신도 웃고 다른 사람들도 웃겼다. K는 병원 스텝과 병문안 온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병실 벽에 붙이는 것으로 입원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병실은 늘 웃음으로 넘쳤고 사람들을 웃게 하기 위해 폭탄머리 가발을 쓰고 음악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무리 심각한 상황, 죽음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도록, 비록 죽음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호스피스 운동은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로 보여진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덜어진다면 말기 환자가 자살이나 안락사, 의사 조력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도 분명 줄어들 것이다. 비록 호스피스가 100%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스피스 운동이 호스피스 병동에 갇혀서는 안 될 것이고, 맹목적 치료, 무조건적 생명 연장에 대한 의학적 반성,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사람도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며, 호스피스 관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광범위한 사회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말기 암 환자가 돼서 집에서 임종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면 호스피스를 선택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슬픔, 어쩌면 특정 종교를 강요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게다가 호스피스의 처치로는 해결되지 않는 통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등으로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웃음을 잃지 않는 마지막 삶이 정말로 가능할 수 있을까?  ▣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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