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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얻는 “고마운 선물” 
<죽음연습> 부모의 마지막을 동행한 이야기 둘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내 인생의 가장 첫 번째 의미심장한 교훈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해 보살펴주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 그리고 성장>(이레, 2010)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었다. 나는 유학을 잠시 중단하고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다. 낯선 타국생활과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 있던 때였다. 나로서는 그 어떤 탈출구도 없었고 오직 직면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어머니 곁에 머물렀던 동생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병으로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어머니는 돌아온 나를 반기셨다. 앞을 거의 보지 못하셨던 어머니께는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진심을 다해 어머니의 손발이 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나는 어머니를 끝까지 돌보지는 못했다.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떠맡기고 나는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후, 어느 겨울날 어머니는 이 세상을 영영 떠나갔다. 여름 방학마다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를 도와드리긴 했지만 어머니 곁을 내내 지키지는 못했다. 내가 어머니를 끝까지 보살피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몸도 피로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어머니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나약했다.

 

아버지를 보살핀 아들, 어머니를 돌본 딸      

 

▲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어머니를 돌보며> 
 

하지만 내가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이상운의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문학동네, 2014)와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의 <어머니를 돌보며>(유자화 역, 부키, 2007)에서 저자들은 부모님의 임종까지 그 곁을 지켜낸다.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어머니를 돌보며>에서는 딸이 어머니를 돌보며 느끼고 겪고 생각하고 배운 실존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노쇠하여 자리에 누운 80대 후반의 아버지는 아들이 4년간 돌보았고, 평소 소망했던 대로 살던 집에서 인생을 끝낼 수 있었다. 또, 70대 후반에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해 치매로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는 마지막 7년을 딸의 도움을 받았다. 이 어머니는 처음에는 집에서, 마지막 5년은 요양원에서 지내다 죽음을 맞았다. 책 속의 주인공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배우자가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배우자들이 다들 늙고 지친 80대 노인들이었기에 이들에게 전적으로 기댈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자식 누군가가 죽어가는 부모를 보살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자식은 젊은 자식대로, 나이든 자식은 나이든 자식대로 병들어 죽어가는 부모를 한결같이 보살피는 일은 여러 이유에서 힘겹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모를 모신 저자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존경심을 느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불침번”

 

우리나라 노인은 죽기에 앞서 평균 7년을 병석에서 누워 지낸다 했던가.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만큼이나 그 사람의 곁을 지키는 가족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이상운 작가의 지적은 옳다. “어머니의 꺼져가는 삶이 얼마나 오래 계속 될지 알았더라면 이 일을 하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라고 오언스가 자문했듯이, 미리 알고는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낯설 것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게도 그 상황이 얼마나 낯설겠나.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경험하면서 날마다 배워나갈 수밖에 없다. 난처하고 당혹스럽고 어려운 일이 고비 고비 기다리고 있다. 이상운도, 오언스도 부모님을 돌보면서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걸음마 하듯 하나씩 배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만만한 배움은 아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동반하는 일은 한 순간만 견디면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당황스럽고 때로는 힘겨운, 적지 않은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그저 떠내려가듯’ 이라는 오언스의 표현이 마음에 와 닿는다.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떠내려가는’ 것과 닮은 것이 바로 죽어가는 자의 곁을 지키는 사람의 일상이다. 그렇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불침번’이다. 오언스는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언제 끝날지 그냥 알고 싶을 뿐이다. 이상운 역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주는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한다.

 

희망이 없어 더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롭다. 우선 몸이 고달프다.

 

열병을 앓은 후 나타난 아버지의 ‘섬망’(delirium, 대수술이나 감염, 전신마취, 중독질환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뇌기능 장애. 불면, 초조, 안절부절못함, 소리지르기 같은 과다행동이나 환각hallucination 등이 자주 나타나는 데 수술직후나 감염 직후의 섬망은 원인이 제거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짐)이 만들어낸 신음소리, 파킨슨 병으로 인한, ‘집에 침입자가 있다, 뱀이 있다, 독가스가 쏟아진다’는 어머니의 ‘망상’(delusion, 병으로 인해 생기는데, 시각적 이상만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이야기 구조가 더해진다는 점에서 환각과 구별된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이야기를 주관적 확신을 가지고 고집하는 것이 특징) 앞에서 아들과 딸은 당혹감에 사로잡히고 밤잠을 설친다.

 

밤잠을 설치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변을 치우는 것도 힘들지만, 돌보는 사람은 마음이 부대껴서 더 지친다.

 

“병든 아버지 옆에서 동행하는 나의 내면은 팽팽한 풍선과 같다. 이 풍선 속에는 분노, 슬픔, 연민, 좌절, 죄책감, 훗날 내가 겪게 될 마지막 날들에 대한 상상적 불안,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장수하더라도 종내에는 이런 식으로 육체와 정신이 허물어지면서 마감되게 마련인 인생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모든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보겠다는 의지 등등이 고밀도로 가득 차 있다.”(이상운, ‘개인적 체험’ 중에서)

 

이상운은 죽음을 향해 퇴락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연민, 혐오, 슬픔, 분노, 급기야 공허감에 이르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맛본다.

 

게다가 ‘폐허더미 아래 갇힌 어머니’, ‘마음이 없어져가는 아버지’로 저자들이 표현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황폐해가는 부모를 직면해야 한다는 고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언스는 치매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미 어머니를 잃었다고 적고 있다. 더는 내가 지금껏 알고 있는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얼마나 난감할까?

 

죽어가는 사람이 달라지면 돌보는 사람도 달라지고,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돌보는 사람도 고통스럽다. 죽어가는 자와 돌보는 자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돌보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지 않음에도 곁에서 겪은 간접적 경험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해, 즉 “대리외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에 돌보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슬비에 젖듯’ 젖어든다는 말에 공감한다.

 

어머니를 정성껏 돌봐주었던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견딜 수가 없다”시며 간병 일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회복될 수 있는 환자를 간병하는 일과 달리 죽어가는 사람을 동반하는 일은 희망이 없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돌보는 사람은 그야말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나동그라진다.

 

“내면 어딘가에서 ‘돌봄’을 쥐어짜내야 한다”

 

▲ 이상운 저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문학동네) 
 

다른 자식이 있었음에도 저자들이 부모 간병을 도맡아야 했던 것에는, 이상운이 책에서 밝힌 것처럼 이들의 직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저자들은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가’였다. 아들과 딸이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흔한 오늘날, 부모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부모를 가까이서 보살피는 일이 쉽지 않다. 서울에 살던 이상운은 간병을 위해 부모가 살고 있는 포항으로 내려가야 했고, 오언스도 자신의 집에서 무려 890km나 떨어져 있는 고향을 오고 가야 했다. 이들은 부모의 생활을 존중하며 부모의 생활근거지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직업이 좀더 자유롭다고 해도 죽어가는 사람의 동반을 전적으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면 어딘가에서 ‘돌봄’을 쥐어 짜 내야 한다. ‘돌봄’이 나오는 자리는 심장처럼 부드럽기보다는 못이 박힌 발바닥처럼 딱딱할 것이다. 할 수 있든 없든 간에 돌보아야 하고, 그 일을 하면서는 언제나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오언스, ‘잠들지 못하는 밤’ 중에서)

 

이토록 ‘돌봄’을 쥐어 짜 내야 하는 시간 동안, 유감스럽게도 병원도 의사도 간호사도, 소위 전문가들이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동행해야 할지에 대해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닌데,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저자들처럼 다들 놀라고 분노하다가 급기야 체념한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과 더불어 동반하는 사람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 고독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상운은 작은 호의에도 고마워하고 일상적 무관심에도 좌절했다 한다. 그만큼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일이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운도 오언스도 생면부지의 타인들에게서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집에서 환자를 홀로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간병인의 도움이 절실하다. 동생들도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간병인이란 낯선 사람의 손길에 의지해야 하는 환자도, 사적인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가족도 불편하겠지만 달리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간병인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뜻이니 최악은 아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동반’한다는 것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를 보살피는 사람이 꼭 혈연부모가 아니어도 되듯이, 그 기간 동안 죽어가는 자를 동반하는 사람이 혈연가족이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충분한 관심과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적어도 그 시기에 죽음 직전까지 함께 해줄 사람이 누구라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인생의 마지막 동행을 혈연가족의 일로 가두지 말고 사회 속으로 좀더 열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알지 못하는 타인과도 친밀감과 연대감을 충분히 형성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에게 또래 나이의 간병인은 친구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어떤 점에서는 자식보다도 더 의지하는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 간병인이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이 오히려 아쉬웠을 따름이다.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던 간병인이 떠날 때마다 어머니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시간을 지속적으로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동반’의 핵심일 것 같다.

 

“죽어가는 인간은 육체의 온갖 고통과 더불어 깊은 고독과 두려움도 겪게 된다.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허무한 고독과 공포에 대해서는 별로 약이 없어 보인다. 그저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는 수밖에 없다.”(이상운, ‘한밤중의 춤’ 중에서)

 

비록 죽어감 자체는 철저히 개인적인 몫으로 남지만 그 곁을 지키는 누군가가 있고 없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철저히 홀로 죽길 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어가는 동안 누군가가 곁에 있길 바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생의 마지막 기간 동안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 누군가에게 기대면서 시작했듯이, 마무리도 의존하면서 끝내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독립적으로 인생을 꾸려온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자신이 누군가의 손길을 빌어 삶을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동반’의 개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사람을 최후의 순간까지 동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언스도 이상운도 사랑하는 부모지만 부모가 마지막 가는 길을 동반하는 일이 인내심을 시험하는 힘겨운 일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더불어, 그 쉽지 않은 동반, 동행을 통해 이들이 얼마나 큰 선물을 받았는지, 그 선물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도 우리에게 들려준다. 아직은 살아 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신 부모님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자식들은 죽어가는 부모를 동행함으로써 자신의 노년과 죽음을 사색하고 성찰할 수 기회를 얻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 소중한 선물을 선사받을 기회를 영영 놓쳤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죽어가는 어머니 곁을 끝까지 지킨 내 동생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인생을 동반하면서 인생 최고의 선물을 기쁘게 잘 받아 안았을까? 나는 그 힘겨운 시간을 동생들과 끝까지 나누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동생들에게 동반의 경험에 대해 지금껏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제 시간을 내서 동생들에게서 그 ‘동반’의 이야기를 나눠듣고 싶다. ▣ 이경신 (작가와 함께하는 죽음 워크샵 참여하기 http://www.ildaro.com/bbs.html?Table=ins_bbs2&mode=view&uid=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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