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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죽음을 낳은 사형제도
[죽음연습]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달 17일 새정치민주연합의 유인태 의원이 ‘사형제도 폐지와 그 대안’을 주제로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19대 국회는 과연 사형제도를 폐지시킬 수 있을까?

 

유 의원은 2004년에도 절반이 넘는 국회의원(17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 혜진.예슬 살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법안이 휴지 조각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사형제도를 유지하길 원하는 여론

 

사실 사형제도 폐지 법안은 15대 국회 때부터 계속해서 상정되어 왔다. 종교단체, 시민단체, 법철학자 등은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럼에도 사형제도가 지금껏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까닭은 무얼까?

 

법조인들도 사형제도 존치를 고집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국민적 정서, 여론이 사형제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영철 연쇄살인으로 분노하던 2007년도 여론 조사에서는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 무려 80%를 훌쩍 넘었다. 그러다가 찬성 입장이 50%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후 또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2012년 여론 조사 때에는 70%에 이르렀다.

 

어린 자녀를 둔 30대 여성들이 사형제도 존치를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이 여성들은 사형제도가 어린 자녀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어린이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범인을 사형으로 단죄해야 한다 여긴 것일까?

 

분명한 것은, 사형제도 찬성 여론은 흉악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들썩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법정도 여론을 의식한다는 인상을 준다.

 

사형제도가 있어야 흉악 범죄가 줄어든다? 

 

▲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Guillotine. 1957) 
 

사람들이 사형제도를 지지하는 데는 사형제도가 흉악 범죄를 줄인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믿음을 견고하게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사형제도 지지자는 사형제도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연구를, 반대자는 흉악 범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연구를 내놓기도 한다. 각자 유리한 연구 결과를 취하고 있으니 어떤 연구를 신뢰해야 할지 난감하다.

 

연구 결과가 어떻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처형을 실시하는 중국에서 흉악 범죄가 끊이지 않는 다는 현실만 보더라도, 사형제도가 흉악 범죄를 억제하고 예방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살인 사건이 대체적으로 충동적으로 벌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단두대에 대한 성찰>(1957)을 쓴 알베르 카뮈는 사형제도가 사형수를 떨게 할 수는 있어도 잠재적인 살인범의 흉악 범죄를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을 지적한 바 있다. 사형제도는 범죄를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소심한 사람에게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사형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희생자 유가족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유가족이 사형집행 후 상처받은 마음을 진정으로 회복할 수 있었을까? 사형으로 실제 도움을 받은 유가족도 있다지만, 모든 유가족이 사형집행 이후 마음의 치유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선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더불어, 사형제도가 유가족의 복수와 마음의 치유를 위한 제도라고 할 때, 과연 민주적인 법제도로서 합당한지 물어볼 수 있다. 미국 변호사 스콧 터로는 자신의 저서 <극단의 형벌>(교양인, 2003)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 민주적 법제도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역사상 사형제도가 공동체에 어떤 이득을 안겨주었는지 쉽게 답하긴 어렵다.

 

오히려 사형제도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민주적인 장치로 작동해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제도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박정희 정권 시절,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여덟 명이 사형을 당한 사건. 이들은 사후에 재심을 통해 2007년 무죄 판결을 받음)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 판결이 내려진 지 18시간 만에 여덟 명이 처형을 당했다.

 

또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심 판결 하루 만에 사형된 ‘조봉암 사건’(이승만 정권 시절, 당시 대통령 유력 후보였던 죽산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함)도 사형제도가 악용된 대표적인 ‘사법 살인’의 사례다. 이번에 사형제도 토론회를 연 유인태 의원만 해도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 기소됨)으로 사형을 언도 받은 적이 있다.

 

분단 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상, 사형제도는 언제든 악용될 수 있다.

 

오심 가능성, 억울한 죽음을 낳는 제도라면… 

 

▲  스콧 터로의 <극단의 형벌>(교양인, 2003) 
 

사형제도 지지자가 반대자에게 흔히 던지는 질문이 있다. ‘네 사랑하는 가족이 참혹하게 살해당한다면 사형제도를 반대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사형제도 반대자는 지지자에게 ‘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다면 사형제도를 찬성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원초적 감정, 복수심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죽음이 양산되는 마당에 어찌 사형제도를 그대로 둘 수 있을까?

 

우리의 사법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 어떤 법조인들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문이나 강제에 의한 자백, 허위 증언 등으로 인해 살인범으로 몰리는 사람이 나올 수 있는 현실을 무시할 수 있을까? 단 한 명이라도 억울한 죽음이 있을 수 있는 데도 사형제도를 유지할 명분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억울하면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도 되는 걸까? 누군가를 희생양 삼으면 그만인가?

 

사형을 지지하다가 반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미국 변호사 스콧 터로는 말한다. 잔혹한 연쇄살인마를 처형할 수 없는 것은 정말 속이 상하지만, 사형제도가 죄 없는 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 죽일 수도 있는 허점을 알고 있는 마당에야 사형제도를 찬성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바로 오심 가능성이야말로 사형제도를 반대해야 할 핵심적인 이유로 보인다.

 

국가와 사회는 흉악 범죄에 대한 책임이 없나?

 

생명의 신성함을 믿는 종교인들은 법과 제도가 인간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할 자격이 없다고 믿기에, 제도적 살인인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으며, 아무리 지은 죄가 무겁더라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며 죄인을 용서해야 한다고 한다.

 

누구나 흉악무도한 범죄자를 용서할 넓은 아량을 가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범죄의 책임을 순전히 범죄자 개인에게만 전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 합리적 판단을 할 수는 있다. 흉포한 범죄자 대부분이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라 할 때, 국가, 사회, 공동체는 범죄자를 양산한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박삼중 스님이 묶은 <사형수들이 보내온 편지>(태일, 1994)는 우리에게 사형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알고 보면, 이들도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순간의 실수나 무지, 열악한 사회적 상황, 절망, 소외 등으로 사형수로 전락했더라도 그렇다. 이런 사형수를 곁에서 지켜보다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사형집행인의 심리적 고통도 적지 않으리라.

 

책을 읽다 보면 이들을 사형시켜서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솔직히 의문이 간다. 희생자의 유가족이 복수를 원하지 않고 용서할 때조차, 사형수가 자신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을 때조차 사형을 강행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2014년 9월 기준으로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한 국가는 98개국,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58개국이라고 한다.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는 58개국 가운데 실제로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국가는 35개국인데, 우리 나라가 여기에 속한다.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 집권 말기에 스물세 명을 한꺼번에 처형한 후 지금까지 사형이 유보된 것이다. 하지만 2010년에 흉악범의 사형 집행을 강행하려 한 적이 있단다. 외교적 이미지 때문에 중단한 것이라고.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형 집행 광경을 직접 지켜본 후에도 사형을 찬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밀실에서의 사형 집행은 억울한 죽음, 부당한 죽음을 숨기기 위한 것은 아닌지, 제도의 빈틈을 드러내지 않고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 법 권력의 자기 방어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여론을 등에 업고 사형제도를 고수하는 비겁함은 이제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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