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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죽음의 주인공이길
[이경신의 죽음연습]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은 까닭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은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 일다 www.ildaro.com
병원이 죽음의 장소로 적당한 곳인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 길 건너에는 장의사가 있었다. 그곳 문은 거의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문 밖에 걸려 있던 짚신에 대한 기억이 어슴푸레 난다. 가끔 열린 문틈으로 낯선 물건들도 보였던 것 같은데…. 모두 장례식에 필요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1970~1980년대만 해도 집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장의사가 동네마다 한 곳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 김형숙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뜨인돌, 2013)
어느덧 그런 시절도 휑하니 지나가고 지금은 추억 속에서나 끄집어내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부고를 받으면 어김없이 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다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병원 부속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당연시했다. 병원이 임종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제 도시인들은 생의 마지막을 환자로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맞이하는 것에 별 거부감을 못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환자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장소로 과연 적당할까? 나는 이 질문을 떨쳐낼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중환자실은 죽음의 장소로 적당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다. 지금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나 간호사에게.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냐고.
그동안 병원에서,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의사나 간호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경외과 중환자실 간호사로 19년간 근무했다는 김형숙만 해도 중환자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환자들처럼 죽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책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뜨인돌, 2013) 에서 속내를 풀어놓는다.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중환자실은 도대체 어떤 장소인가? 병원의 중환자실은 병세가 위중한 환자들을 돌보는 곳이다. 그러면 중환자실이 위중한 환자가 편안히 쉬면서 치료받을만한 곳일까?
“밤에 숙면을 취하기에 최악의 장소로 꼽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중환자실이다.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들, 독한 약품,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찰, 밝은 조명, 수술 후유증 등이 한데 뭉뚱그려져서 중환자실 환자들은 심각한 수면 부족 상태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중환자실은 숙면이 그 무엇보다 절실한, 병원에서 제일 위독한 사람들이 입원하는 곳이다.” -폴 마틴 <달콤한 잠의 유혹>(베텔스만, 2003)
그렇다. 환자가 너무나 시달리는 곳이 중환자실이다. 사실 환자에게는 스스로 회복될 기회가 필요하다고 한다. 실제로 아무 의료적 처치를 하지 않고 환자를 두고 지켜만 보았는데도 호전된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중환자실에서는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김형숙은 과거 중환자실 근무 때를 회고하면서 의료진들이 밥 먹고 화장실 갈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과중한 업무량에 짓눌리는 현실에 대해 들려준다. “‘용건만 간단히’ 주고받기도 벅찬 의료 현장에서는 자신의 업무로 명시되지 않은 역할을 스스로 생각하여 챙기고 환자와 보호자들의 심정을 미리 헤아려 돌볼 여력을 가진 의료진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휴식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공간, 바빠서 짬 내기도 어려운 의료진,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회복될 수나 있을지 염려스럽다. 더욱이 중환자실은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니, 끊임없이 환자가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김형숙은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던 동안 그곳 환경이 놀라울 만큼 바뀌었고, 예전이라면 중환자실에 입원할 환자도 지금은 일반 병동에 입원하는 형편이라고 전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중환자실 환자들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해서 인공호흡기 등 온갖 연명치료 기술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죽음을 막기 위해 애써 봐도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중환자실의 마지막 치료라는 것이 결국엔 “죽음으로 가는 통과의례”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환자실은 치료를 받는 곳이라기보다 죽음을 맞는 공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임종직전의 소생술…중환자실의 풍경
▲ 야마자키 후미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잇북)
비록 많은 환자들이 임종을 맞는다고 하지만, 중환자실은 엄연히 병원에 속한 공간이다.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곳이다. 그래서 의료진은 생의 거의 막바지에 이른 환자의 생명에도 매달리고 집착한다. 일분일초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의료진의 관심사다.
일본인 의사 야마자키 후미오가 고백한 ‘임종직전의 소생술’이 적나라한 사례가 될 것이다.
“환자의 입에서는 기관 튜브가 천장을 향해 튀어나와 있었다. 입술에는 삽관할 때 잇몸이 다쳐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그로 인해 겨우 20분 전에는 평온했던 환자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기타자와는 그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 환자의 얼굴보다 한번 정지했던 심장을 15분 동안이나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만약 인공호흡기를 장착해 놓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야마자키 후미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잇북, 2011)
임종 직전에 있는 고령의 말기암 환자에게 기도 삽관과 심폐소생술을 시도한 의사는 생명을 연장했다는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할 수 있다? 끔찍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라면, 또 그 현실 속의 불행한 죽음이 내 것이라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야마자키 후미오는 ‘이미 손쓸 도리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고 본인조차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말기 암 환자에게 시행하는 소생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고 되묻는다. 이런 잔혹한 일을 1990년대 후반 일본 병원에서 벌어진, 남의 나라 과거사로 치부해도 될까?
유감스럽지만, 말기 환자에게 기도 삽관은 물론이요, 인공호흡까지 시도하는 것, 이 ‘과도한 소생술’이 우리나라 병원 중환자실 풍경이기도 하다. 죽어가는 환자에게는 무의미한 의료처치일 뿐이지만 1분이라도 환자의 목숨을 더 연장할 수 있다면 의사는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도 삽관하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환자는 진정제나 근육 이완제 때문에 가족, 친지, 친구들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고통만 겪다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고 전직 간호사는 안타까워한다.
환자를 더는 치료할 방도가 없다면, 1초라도 목숨을 더 연장해서 죽음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여줘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의료진의 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스스로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도록 환자를 내버려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생명집착적 치료를 고집하는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환자라면,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도록 세심하게 배려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라매 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 이후
오늘날의 ‘연명치료’는 정말로 병을 낫게 하는 치료도 아니지만 환자의 편안한 죽음과도 무관하다. 목숨을 양적으로 연장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다. 김형숙에 의하면 오늘날 연명치료는 장기간의 생명 연장이 충분히 가능할 만큼 발달해서, 의사가 어디쯤에서 환자의 의료적 검사나 처치를 중단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자는 삶의 질도 보장되지 않는 목숨을 연장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보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보라매 병원 사건’은 죽어가는 환자의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했다. 보라매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응급뇌수술을 받은 후 뇌부종이 생겨 호흡곤란을 겪는 환자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해야 했다. 보호자는 경제적 이유에서 퇴원을 요구했고, 만류하는 의사에게 ‘환자의 죽음에 대해 병원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남긴다. 집까지 구급차로 실려 간 환자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하자 5분 만에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보호자는 물론이요, 담당의, 수련의도 모두 살인죄로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이전에는 말기암 환자처럼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퇴원 조치하는 것인 관례였다. 병원에서 ‘객사’시키지 않고 집에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보라매 사건 이후로는 중환자실에 침상이 부족하지 않는 한, 소생 불가능한 환자도 퇴원시켜주지 않게 되었다. 의사들이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 것이다.
‘보라매 사건’의 여파로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관행처럼 되어 버린 상황에서,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이 벌어진다. 폐암조직검사로 인해 빚어진 과다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한다. 자녀들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지만 병원 측이 거부한다. 결국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라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을 때야 비로소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법적 소송이 없었다면 의료진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끝도 없이 했을 것이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비록 ‘김 할머니 사건’으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중환자실에서 비참하게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다.
작년 ‘연명치료’가 ‘연명의료’로 이름을 바꾸고 ‘무의미한 연명의료 결정 제도화 관련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연명의료’는 중환자실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전 의료 지시서’가 ‘사전 의료 의향서’로 이름을 바꾼 것만 보더라도, 환자의 자기결정권보다 소위 ‘전문가’라는 의사의 결정이 더 우위에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자유가 없어 의사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의사의 의지대로 생명을 꾸역꾸역 연장하다가 죽음을 맞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이 맞을 죽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죽는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을 훌륭히 닫아야 합니다. 죽음의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은 주인공은 죽음을 향해 떠나는 우리 자신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엇인가가 주인공 역할을 빼앗아갈지도 모릅니다. 우물쭈물 지내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사가 내 죽음의 주인공이 되고, 나는 소도구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죽음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일까요.” -소노 아야꼬, 알폰소 데켄 <죽음이 삶에게>(리수, 2012) “데켄 신부의 다섯 번째 편지”
데켄 신부가 말하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인간다운 죽음’을 실현하려면,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위즈덤하우스, 2012)의 저자 나카무라 진이치가 이야기한 ‘구급차를 부르지 말라’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조언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구급차를 타는 순간, 연명의료를 포함한 현대의료에 나를, 내 죽음을 맡긴다는 뜻이라는 그의 말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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