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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죽음연습] 두 말기 폐암환자의 ‘다른 선택’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은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 일다 www.ildaro.com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불치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어떨까? 이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우리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장의 일로 생각지 않고 살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막연한 미래일 뿐이다. 자기 몸의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하며 죽음을 예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개는 현대의학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죽음의 현실적인 무게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의사가 3개월이든 6개월이든 1년이든 환자의 한시적 삶을 내뱉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가 된다.

 

의사가 내게 ‘당신은 앞으로 3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죽어갈까? 나는 이 질문을 아주 오래 전부터 던져왔다. 30대까지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는 기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해서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발버둥쳤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어서일까? 그때보다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을 다스릴 여유를 가지면서 어떻게 죽어가야 할지 차분히 고민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상황 속에 정말로 처해지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죽음을 앞둔 글쓰기
 

▲이나츠키 아키라 <오늘부터 나도 암환자입니다>(2003) 
 

도서관에서 발견한 두 권의 책, 이나츠키 아키라의 <오늘부터 나도 암환자입니다>(소소, 2003)와 마리 드루베의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willcompany, 2013)에는 실제 죽음이 임박한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두 권의 책 모두 우연히도 폐암환자의 인생 마지막 기록들이다. 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받은 시술과 처방, 신체 변화와 심리 상태,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거기 있다.

 

일본인 내과의사인 이나츠키 아키라는 수술이 불가능한 비소세포폐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남은 시간 동안 홈페이지를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기로 한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현대 의학의 치료법에 의지해 투병하며 죽어가는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의사로서 대중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즉, 암과 암의 의학적 치료에 대한 지식을 쉽게 알려주고 민간요법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의사로서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전달한다. 그의 만 42세 마지막 10개월이 고스란히 담긴 홈페이지는 그의 사후에 책이 되었다.

 

프랑스 신문기자, 작가이자 섬유, 실내 디자이너인 마리 드루베는 만 56세에 폐암 1기를 선고 받고 수술을 받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로부터 16개월 후 암은 뇌로 전이되고 치료불가 판정을 받는다. 이에 마리 드루베는 프랑스에서 법으로 금지한 안락사를 통해 죽기로 마음먹고 안락사가 허용되는 벨기에에 가서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자신이 왜 안락사를 선택했는지, 프랑스에서 왜 안락사를 합법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지막 힘을 모아 글로 남겨 사후에 출간하기로 계획한다.

 

이들의 글은 특별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음도 몸도 고통이 없진 않았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의 분명한 목표 아래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쓴 글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도 아직 죽지 않은 이상 분명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 삶과 죽음이 칼로 자르듯 두 동강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기에 숨이 멈추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의학적 연명 치료냐, 적극적 안락사냐?

 

내가 주목했던 것은 두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나츠키 아키라는 치료도 수술도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현대의학에 의지해서 투병한다. 반면, 마리 드루베는 현대의학을 불신하며 더는 견디기 힘들다고 느낀 시점에 안락사를 택한다.

 

이나츠키 아키라가 의학적 치료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스스로 밝힌 바 있듯이, 의사로서 의학계에 진 빚을 갚고, 입원 치료를 받음으로써 생기는 수입, 즉 수당과 보험금으로 가족의 생계를 돕고, 수술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더라도 화학요법으로 오래 생존한 사례가 없지는 않으니까 생존 기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이다.

 

그는 화학요법에 방사선 치료까지 병행해서라도 만 43세 생일날까지, 적어도 1년 이상 살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는 않았다. 다들 그렇듯, 말기 폐암 선고를 받은 이래 10개월 정도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리 드루베는 이 일본인 의사와 달리 고통스러운 치료로 얼마 안 되는 생명을 연장하길 원치 않았다. 말기 암 환자에게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는 고통만 가중시킬 뿐,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녀가 알아본 의학적 치료의 진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말기 암 환자에게 시행된 화학요법의 4분의 3이상이 무의미한 치료였다는 것, 오히려 화학요법을 받지 않은 사람이 더 오래 생존한다는 것, 약물요법과 감마선, 방사선 치료와 같은 획기적인 암 치료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별 효과도 없고 의료계의 돈벌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외과수술 역시 무력하기만 한데, 폐암환자의 경우 수술 받은 환자 20%는 수술 받은 부위에 암이 재발하고 80%는 다른 부위로 전이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마리 드루베가 치료 불가능한 말기 폐암환자로 판정 받았을 당시, 프랑스에서 폐암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10달이고 5년 생존율은 20%에 불과하며 20년 전부터 폐암 완치율이 전혀 높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암정보센터의 자료에 의하면 폐암은 초기 진단도 어렵고 재발률도 높고 다른 암에 비해 사망률도 높으며 5년 생존율이 19.8%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마리 드루베는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말기 폐암환자의 목숨을 연장한다는 것은 삶의 양적 길이만 늘릴 뿐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뿐만 아니라 호스피스 요양병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그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고통이 심해지면 진통제의 도움을 받길 원했던 이나츠키 아키라와 달리, 마리 드루베는 모르핀(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해 환각 상태에 빠져 서서히 죽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2005년 4월 22일 ‘레오네티’ 법안이 시행된 이래 소극적 안락사만 허용하고 있다.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모르핀을 투여하다가 과다 투여가 되어 환자가 목숨을 잃는 정도는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치료 불가능한 말기환자라고 해도 환자를 독극물 주사 등을 통해 의도적으로 목숨을 빼앗는 적극적 안락사는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마리 드루베는 소극적 안락사 허용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오랫동안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것이 프랑스의 실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되는 벨기에를 탈출구로 삼는다. 물론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해서 안락사를 아무에게나 허락하는 것은 아니고, 그 절차가 간단하고 손쉬운 것도 아니다. 더는 회복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만이 안락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절차 또한 복잡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좀더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더라도, 낯선 타국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더라도, 안락사를 그토록 간절히 소망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

  

▲ 마리 드루베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2013) 
 

“카프카 소설 <유형지에서>의 유죄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꼼짝 없이 침대에 누워 수혈 받는 내 모습을 나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죄수의 살갗에 죄목을 새기고 강제로 죽을 먹이며 말을 못하도록 입을 막고 배변조차 할 수 없도록 침대에 묶어두었다.” -마리 드루베, <내가 죽음을 선택한 순간>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죄수가 겪는 고통이 너무나 끔찍해서 소설을 읽어 내려가기가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마리 드루베는 말기 암 환자가 의학적 연명 치료를 통해 겪는 것이 바로 그 죄수가 겪는 고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의학적 연명 치료 대신 적극적 안락사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이나츠키 아키라도 마리 드루베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도 ‘고통이 적은 마지막을 맞고 싶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 인격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심해지면 진통제를 투여해주길 원했다. 또 의학은 암환자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침과 같은 대체의학을 동원하더라도 통증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에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폐암이 그 어떤 암보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게다가 결국엔 뇌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한 의식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몸이 마비되는 등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 뻔하다. 마리 드루베는 죽음을 맞기 직전 충분히 뇌기능 장애가 잃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에 앞서 죽음을 맞길 원했고, 이나츠기 아키라는 진통제로 자신을 잠재우길 원했던 것이다.

 

비록 죽음을 맞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죽기 전까지는 삶의 질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 90% 이상이 고통스럽게 죽길 원치 않기에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 투병을 하는 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자식도 다 필요가 없더라. 그냥 자살하고 싶더라고.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면 안락사를 택할 것 같아” 라고. 사실, 고통스러운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죽음에 직면해 어떤 죽음 방법을 선택하건, 누구나 고통이 덜한 죽음, 삶의 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인생의 마지막을 원하리라.

 

생의 마지막에도 개인의 선택이 존중 받아야

 

적극적 안락사를 향해 도덕과 종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반대할 수 있다. 혹은 연명 치료에 매달리는 노인을 보고서, 발악을 한다며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살아온 대로 생의 마지막에서도 개인의 선택이 존중 받길 원한다고 해서 특별히 놀라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간섭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을까?

 

죽는 그 순간까지 연명 치료를 받건, 인격이 붕괴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적극적 안락사를 선택하건, 그 선택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싶다. 어차피 우리의 삶 자체가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도 않은 마당에 죽음만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할 까닭도 없다. 아니, 도덕적이기 어렵다. 각자의 죽음은 각자의 삶과 닮아 있을 따름이다. 제 삼자는 도덕적 삶, 도덕적 죽음을 조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맞다.

 

법은 도덕이 아니니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죽음의 선택을 포함한) 개개인의 행복한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는 선에서 만들어지면 적당하다. 존엄사, 안락사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논쟁을 바라보다 보면 누구를 위한 논쟁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실제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죽어가는 각자의 선택에 맡겨두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리 드루베는 자신이 선택한 대로 벨기에에서 안락사를 받기로 결정한 다음, 오히려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느라, 오히려 우울한 기분이나 감상이나 격정에 휩싸이지 않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바로 그 생각들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며, 유언장을 쓰고, 성에 딸린 부속 건물의 설계와 장식을 끝내고, 황량한 겨울에도 산책하기 좋도록 정원 오솔길을 설계해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쓸 납골묘를 고르고 장례절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머물 장소를 정하는 일에 몰두했다.” -마리 드루베, <내가 죽음을 선택한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타인들은 그녀가 선택한 죽음에 대해서 갖가지 의견을 내놓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이나츠키 아키라 역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죽어갔을 것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선택했고 선택한 대로 죽어갔기에, 죽음에 대해 큰 두려움 없이 죽어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떤 죽음을 바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들의 선택한 죽음은 내가 바라는 나의 죽음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도 아니다. 그럼에도 고통이 적은 죽음이길 바라는 마음은 이들과 동일하다. 현재 나는 마리 드루베처럼 적극적 안락사도, 이나츠키 아키라처럼 의학적 연명 치료도 원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일 모르겠지만, 의술에 끌려 다니거나 의료적 처치가 개입한 죽음이 아니라 최대한 자연스러운 죽음이길 바란다.

 

그럼에도 내 죽음이 어떤 식으로 내게 다가올지 알 수 없으니 여전히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은 있다. 지독한 고통이 나를 덮친다면 적극적 안락사, 아니 의사 조력 자살까지도 갈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이 코앞에서 내게 ‘오라’ 손짓하면 오히려 부자연스런 연명 치료에 매달려서라도 삶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지금껏 죽음을 고민하고 생각해 왔듯이 평정심을 가지고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최고의 죽음이 되리라. 비록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죽음이 무엇이건 내가 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런 죽음을 죽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죽음은 되지 않겠나 싶다. ▣ 이경신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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