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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새를 지켜본 날
[죽음연습] 데스 마스크, 죽은 이의 초상화, 사후 사진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죽음의 순간
어느 해 여름날, 프랑스 여행 중 길을 걷다가 한 작은 마을 샘터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뤼네르 성인(St. Lunaire)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곳에는 주물 격자문이 달린 작은 돌집이 있었다. 샘물이 갇혀 있는 것이 신기해서 안을 기웃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땅바닥에 눈길이 갔다. 그 순간 내 발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작은 새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하마터면 새를 밟을 뻔했다.
▲ 샘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는 미니악-수-베슈렐의 뤼네르 성인 샘. ©이경신
한 걸음 물러나서 가만히 새를 바라보니, 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깃털에 윤기도 없고 새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5초 정도 지났을까? 새는 경련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름 모를 새가 내가 바라보는 동안 이 세상을 떠났다.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난 새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미처 감지 못한 멍한 눈을 잠시 동안 들여다 보았다.
어떤 생명체가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사람의 임종을 지킨 적도 없다. 그나마 암 말기의 중년 여성이 죽어가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본 것이 유일하다.
그 여름날 오전, 새의 죽음은 내게 잊히지 않는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새의 죽어감도, 새의 주검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포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영상으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았고, 처음 목격한 죽음의 순간을 그냥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나는 죽은 새가 청소부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샘 뒤편,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옮겨두고는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마지막 얼굴을 담은 석고상, 초상화, 사진
만약 이름 모를 새가 아니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 마지막 얼굴을 담아두고 싶을까?
최근에 상영된 두 편의 다큐멘터리 <목숨>(이창재. 2014)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진모영. 2014)에서는 임종한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다. <목숨>은 담도암 말기의 40대 주부가 생과 사의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생생히 포착했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는 임종한 98세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두 편의 영화 덕분에 죽은 이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원할 때면 언제나 떠나간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죽은 사람의 마지막 얼굴을 여러 방식으로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데스 마스크(death mask)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베토벤의 데스 마스크를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왜 죽은 베토벤의 얼굴을 본떠 데스 마스크를 만들었을까?’ 궁금했었다.
데스 마스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 밀랍이나 석고로 그 얼굴을 본떠서 만든 안면상으로, 15세기 이후에 등장해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남기거나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쓰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시신이 되는 순간, 바로 죽은 직후의 얼굴 모습을 담아 생생한 초상화를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으로부터 개인성을 영구히 지키려는 몸짓으로 데스 마스크를 이해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재현해서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죽은 사람을 이 세상 속에 잡아두려는 시도로 보인다.
필립 아리에스의 분석에 의하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나의 죽음보다 타인의 죽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여전히 데스 마스크를 뜨고 임종 직후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사진이 등장하면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사진에 남겨놓으려 하는 움직임이 생겨난다. 부유한 사람들은 아끼는 사람이 죽으면 사실적인 무덤 입상을 세우거나 초상화를 그려서 추억해 왔지만 서민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서민들은 사진으로 사라진 사람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 사진은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했다. 당시 가정에서는 임종 직후의 얼굴 사진을 가족이 가장 아끼는 가보로 여겼다고. 그러고 보면 프랑스의 렌 박물관에서 열렸던, 19-20세기 브르타뉴인의 일상적 삶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죽은 사람의 사진들이 여러 장 전시되어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결국 데스 마스크, 죽은 사람의 초상화나 임종 사진 등은 우리가 죽음으로 잃어버린 타인을 붙잡아두고 추억하고 기리려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죽음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죽은 아이들을 추억하는 사후 사진
19세기 중반은 아이들의 사망률이 특별히 높았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유럽에서 아이들의 묘지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생겨난다. 당시 부르주아 가정에서는 그 어떤 죽음보다 아이들의 죽음을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다. 이들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달래고 죽은 아이를 내내 기억할 방도가 필요했다. 사진이 등장하자 죽은 아이들의 사진 찍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 프랑스 렌(Rennes) 동쪽 공동묘지 안에 있는 어린이 묘지. © 이경신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는 조각이나 그림으로 죽은 아이의 기억을 담았다. 죽은 아이를 조각이나 그림으로 재현해낼 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는 집에서는 브르타뉴의 우에쌍(Ouessant) 섬에서처럼 죽은 아이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보관하는 것으로 아이의 기억을 붙잡았을 지도 모르겠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우에쌍섬 사람들은 세례 받은 아이는 죽어도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 확실하니까 어린 아이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유물함에 아이의 머리카락과 장례식장의 꽃을 보관해 두는 것으로 위로를 삼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의 죽음이 흔했던 19세기 후반,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이들의 영혼이 구원받으리라는 확신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던 것 같다. 어린이의 무덤을 비장하게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죽은 아이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죽은 아이의 사진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얼굴 사진이 사라진 이유
19세기 말, 사후 사진 찍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20세기에도 동유럽에서는 사후 사진을 계속해서 찍었다고 하지만 확실히 서유럽에서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 베아테 라코타 글, 발터 셸스 사진, 장혜경 역 <마지막 사진 한장> (웅진지식하우스. 2008)
베아테 라코타는 <마지막 사진 한 장>(웅진 지식하우스. 2008)에서, 집에서 임종하는 것이 흔한 일이던 시절에는 누군가 집에서 죽으면 가족이 사진사를 불러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고 쓰고 있다. 죽은 사람을 추억하면서 그 사람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보관하는 것은 일상적 관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임종하게 되면서 그런 풍습은 사라졌다고 평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서 임종한다 해서 그 사람의 사후 사진을 찍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굳이 이미지로 죽은 모습을 남겨두고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억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베아테 라코타가 지적하는 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게 되어서 죽은 사람의 얼굴을 남기거나 재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죽어가는 사람을 기피하는 행위만큼이나 죽음을 부정하고 무시, 은폐하는 우리 시대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도 같다.
아이의 수태와 출산 과정, 성장 과정을 담은 사진은 난무하지만, 죽어가는 과정, 임종의 순간, 임종 직후의 얼굴을 담은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에서조차 죽은 사람이 건강할 때 찍어 둔 영정 사진을 둔다. 죽은 존재가 내 죽음을 연상시켜 그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야기,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베아테 라코타는 발터 셸스가 찍은, 호스피스에서 죽은 사람의 얼굴 사진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의 얼굴이 평화로운 것이 위안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정말로 발터 셸스의 사진들을 들여다 보면 죽은 사람이 큰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혹시라도 죽어가는 동안 힘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죽은 후에는 분명 평온을 찾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난 그 사진들을 계속해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어떤 거부감이 느껴졌다. 왜 그럴까?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얼굴이었다고 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샘물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뤼네르 성인의 샘 앞에서 만난 새의 죽음은 나의 감긴 눈을 뜨게 해주려 한듯하다. 그러나 내겐 주검이 아직도 불편하니, 내 속에 깊이 틀어박힌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눈을 완전히 뜰 수 없도록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불어 ‘죽으면 사라지는 것이 맞다’는 또 다른 생각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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