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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들 ‘일-가정 양립은 공허한 구호뿐’
‘운’ 좋아야 경력단절되지 않는, 성차별 구조 개선하라
“20년 동안 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운이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연한 기회에 잡지사에 들어갔고, 인맥과 인연으로 일을 해왔던 것 같아. 친정엄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 첫째아이는 엄마가 전적으로 돌봤고, 지금도 엄마가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어.” <44세 여성. 남편과 자녀2명. 잡지사(15년) 거쳐 현재 프리랜서>
“저는 뭐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고, 직장과 육아를 병행할 때 아주 남다른 고통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고, 남편도 육아를 잘 분담해줬고, 이모님도 경제적인 수입이 필요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사례비를 조금 드리고, 이모님께서 애를 맡아서 키워주고.” <48세 여성. 남편과 자녀1명. 비영리단체(9년) 거쳐 모 공공기관에서 15년차>
위 두 여성은 임신이나 출산,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는 경험 없이 20년 넘게 일을 지속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 사진: 주병수
올해 2월, 정부는 ‘일하는 여성을 위한 생애주기별 경력유지 지원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여성 고용률을 높이고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해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육아휴직을 쓰는 대신 주당 15~30시간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이와 비슷한 취지의 시간 선택제 일자리를 활성화하겠다는 것. 그리고 보육서비스의 질을 높이겠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이처럼 정부는 ‘임신과 출산, 육아’를 여성 경력 단절의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여성이 아이를 잘 키우면서도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방안을 늘리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그럼에도 위의 여성들이 자신이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은 이유가 이러한 정책 덕분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였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기① 입사 때부터 ‘남성과 다른’ 업무 배치
지난 11월 7일, 서울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여성노동정책은 없다!”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가 공동 주최한 것으로, 여성노동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여성들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강선미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는 임신이나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경험하지 않고 일을 지속하고 있는 30~40대 여성 스무 명을 심층 면접한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거의 쉼 없이 일해 온 스무 명의 여성들에게도 경력이 단절될 뻔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위기는 시작된다. 남성 입사동기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채용이 된다고 해도 일단 여성에게 맡겨지는 업무의 성격이 다르다. 남성은 더 중요하고 발언권이 강한 업무에 배치되고, 여성은 주로 남성을 보조하는 ‘잡다한 행정 업무’와 ‘자료조사’ 등의 업무를 맡게 된다. 주요 업무를 맡는 남성과는 달리 보조적인 업무를 하는 여성들은 더 잦은 인사 이동을 하게 되며, 이러한 업무 배치는 승진과 호봉에도 영향을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여자 임원은 딱 두 명밖에 없어. 두 명의 성격은 분명해. 이 여자 두 명과 나머지 여자들로 나눠지는 거야. 한마디로 나머지 여자들은 주어진 일만 하는 거야. 회사 인식으로는. 나머지 두 명은 가정을 내팽개치고 일하는 사람들인 거야. 며칠째 지방 출장 가 있고 야근을 계속한다거나 가정생활을 할 수 없는 수준의 업무를 하는 그 두 명만 인정을 받는 거야.” <34세 여성. 남편과 자녀1명. 신문사, 학원 등에서 논술 관련 업무를 했고 현재 육아휴직 중>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을 내팽개치고 일하는’ 여성만 인정받고 임원이 될 수 있다. ‘남성처럼’ 일하는 것에는 장시간 노동 강도를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인맥’, ‘술자리’, ‘사적인 관계 맺음’ 등의 방식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이러한 직장생활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 여성들은 자진해서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기도 했다. 유리천장의 장벽 앞에 승진이 가로막혀 자진 퇴사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한 사례도 있었다.
잡지사를 다섯 군데 넘게 다니다가 현재 기획디자인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47세 여성은 “욕심을 버리는 게 오래 일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나 전문직이 아닌, 주변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일을 지속하는 비결이라면서, 자신은 연봉 인상을 주장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경력이 단절 되지 않은 여성들은 소위 ‘잘 나가는’ 여성들이 아니었다.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성차별적인 구조 속에 놓여있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포기하고 차별로 인한 좌절감을 감내하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위기② 불안정한 일자리로 잦은 이직
▲ 11월 7일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여성노동정책은 없다!” 토론회.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주최. ©일다
일을 지속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고용 안정’이다. 강선미 활동가는 “그러나 비정규직의 상당수가 여성노동자로 채워져 있는 현실에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면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면접참여자 중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42세 여성은 계약직이기 때문에 회사를 여러 번 옮겨 다녔으며, 지금도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계약만료가 되면 자동적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는 현실” 에 처해 있다.
또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여성들의 상당수가 일하는 소규모 영세업체들은 사업 자체가 불안정하다 보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장을 자주 옮기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잡지사는 여러 군데를 거쳤어요. 잡지사는 잘 휴간하거나 폐간돼요. 신문사에 소속된 큰 잡지사로 가지 않는 이상 자의적인 선택하고 상관없이 직장이 바뀔 수밖에 없는 게 시스템이에요. 그래서 나는 꽤 여러 군데 잡지사에 있었어요. 1년, 2년 이내에요. 잡지사 수명이 그것밖에 안 돼요. 직업적으로는 정규직이지만 불안정하죠.” <44세 여성. 현재 프리랜서>
이처럼 여성들이 일을 지속하려 할 때 찾아오는 ‘위기’는 임신, 출산이나 양육만이 아니다. 회사가 폐업을 하거나, 부서를 없앤다거나, 만들던 잡지가 폐간되어 일을 중단한 경우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공백이 생긴다.
위기③ 개인과 가족에게 떠넘겨진 ‘양육’ 책임
강선미 활동가는 심층 면접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여성으로 일을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기 때문에 차별적인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를 ‘운’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운’이란, 특히 가족 내에 보조양육자가 있는 것이다. 면접 참여자의 절반이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돌봐주었다고 말했다.
“엄마가 1층에 살고 제가 2층에 살았거든요. 아빠도 퇴직을 하고 집에 계실 때였고. 퇴직하고 나서 딱히 할 일이 없으시잖아요. 보통 아침에 제가 출근시간이 8시반 이었나 이랬는데 7시 정도에 애들을 깨워요. 애들 다 씻기고 옷 입혀서 1층으로 데려다 놔요. 그러고 출근을 하고 애들은 9시부터 10시 사이에 유치원 차가 오거든요. 그러면 그때 엄마가 애들 보내고. 끝나서 애들이 집 앞에 내리면 엄마가 데리고 있고. 그러면 제가 집에 오면 애들 데리고 다시 올라가서 씻기고 챙기고. 애들은 9시면 자니까 자는 거 보고. 그런 생활을 몇 년 했죠.” <43세 여성. 남편과 자녀2명. 공기업 등을 거쳐 현재 속기사 8년차>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양육에 대한 가족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일을 지속하기 힘들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한 경우에도, 이것으로 다 채우지 못한 시간에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김으로써 겨우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말한 여성도 있다. 문제는 양육의 책임을 개인과 가족이 오롯이 떠안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8월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에서 발행한 <서울시민이 희망하는 노후 생활>(e-서울통계85호)에 보면, 60세 이상 남녀가 노후에 하고 싶은 활동 중 손자녀 양육 활동은 ‘희망하지 않는다’가 34.7%, ‘그저 그렇다’가 37.1%로 나타났다. 다른 활동에 비해 손자녀를 돌보는 일은 노후에 가장 하고 싶지 않은 활동으로 꼽혔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정부는 정책을 통해 양육의 몫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있다. 지난 해 여성가족부에서 확대하겠다고 한 ‘손주돌보미’ 사업이 이에 해당한다.
손주돌보미 사업은 손주를 돌보는 친할머니나 외할머니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서초구와 강남구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여성가족부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인지 검토 중이다.
강선미 활동가는 이 정책에 대해 “친정어머니가 육아를 도와주는 사례가 많은 현실에서 당장은 반가운 정책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사회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양육을 가족 단위에 일임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성차별 구조 개선 없다면 ‘위기’는 계속된다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은 현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일-가정 양립 정책으로는 이러한 여성노동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박진경 인천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그동안 일-가정 양립 정책이 남녀의 평등한 가사, 육아 분담과 평등한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혼자서 어떻게 일과 가사, 육아를 양립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강선미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카트>(부지영 감독. 2007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에서 주인공(염정아 분)이 “반찬 값 벌려고 나온 거 아니다. 생계를 위해 나온 거다” 라고 말한 장면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면접 참여자들을 통해서도 여성은 더이상 생계보조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은 여전히 여성의 주요한 역할을 ‘양육’으로 보고, 여성을 생계보조자 취급하며, 저임금의 임시적인 일자리로 내몰고 있다.”
또 “정부가 임신, 출산 양육을 이유로 한 경력 단절만을 고려하고 있어서, 경력 단절 자체를 막기 위한 정책보다 경력 단절 이후의 재취업 방안만 고심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제의 초점을 경력 단절이 아닌 ‘노동 지속’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
강선미 활동가는 이어서 “노동의 전 과정에 걸쳐있는 성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에게 위기 상황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성학자 김원정씨도 “정부 정책은 육아기에 경력이 단절되고 이후에 재취업하는 것을 여성의 생애 모델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여성을 주변화된 노동력으로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나랑(김지현)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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