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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야학’이 존재하지 않을 그 날을 위해
노들야학의 스무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쯤, 특수학교 초등 과정을 졸업할 날을 앞두고 있던 장애소녀의 부모님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무리를 해서 보낸 특수학교였다. 다행히 학습 능력에는 문제가 없어 6년 만에 교과 과정을 마쳤지만, 문제는 이 학교에는 상급 과정이 없다는 것. 소녀의 부모님은 일반 중학교에 보내는 모험을 선택할 것이냐, 멀리 있는 특수학교 기숙사로 보낼 것이냐를 몇 날 며칠 고민했다. 그리고 같은 졸업동기 14명 중에 3명밖에 안 되는, 일반 중학교 선택 명단에 딸의 이름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장애소녀는 그렇게 중학교로 진학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장애를 극복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끝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 소녀는 20년이 지난 후, 가까스로 잡은 직장에서 고달픈 밥벌이를 이어가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이 이야기가 나의 얘기라는 것을 짐작하셨을 것이다. 혹자들이 장애인이 공부를 하고 밥벌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아주 찝찝하다. 그저 남들처럼 공부를 하고 싶었고, 남들처럼 학교생활을 해보고 싶었고, 무사히 졸업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남들과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조금 다른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교육’이라는 당연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한 장애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장애인 당사자인 나로서도 시간이 좀 걸렸다.
한국부모 ‘교육열’이 무색한 장애인 교육의 현주소
내가 얼떨결에 특수학교를 벗어난 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굉장히 높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여러 학원과 엄청난 학습지에 둘러싸여 큰다. 좋은 학벌을 가져야 하고, 자격증 몇 개는 기본으로 하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회. 그럼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장애인들은 과연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한 달에 몇 백만 원을 들여 사설학원에 보내고, 비싸다는 과외를 시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부모들도 많다. 영어교육을 위해 가족들이 흩어진 ‘기러기 아빠’들도 흔히 볼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는 데에는 ‘우리는 힘들게 살았지만 너만은 엘리트가 되어 잘살라’, 혹은 ‘내 자식이 이 정도는 되어야 얼굴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장애를 지닌 자식들에게는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장애아 교육에 대한 소홀로 이어져왔다. 집안에 비장애인 형제가 있는 경우는, 장애아에게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더 빨리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돈이 많이 들고, 부모의 인내심과 노력을 더 많이 요구하는 한국의 ‘특수교육’을 장애가 있는 자식이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애가 없는 자식에게 그만큼의 투자를 더 하고 그들에게 장애가 있는 자식의 먼 미래를 부탁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장애아는 많이 배워봤자 현실에 나서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꽤 있었다.
개중 집에 돈이 어느 정도 있는 부모들은 한국 사회에서 교육시키기를 포기하고 외국으로 가는 경우도 보긴 했으나, 그것은 주로 경증인 남자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여자아이, 그것도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기숙사가 있는 특수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히는 사례가 더 많았다.
초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게 ‘자연스러웠던’ 풍경
생각해보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교육에서도 차별이 존재했다. 내가 특수학교에 다닐 때는 열 살 넘어서야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생일이 빨라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간 나는, 약 2년 동안 그 학교 전체에서 제일 어린 학생이었다. 평균 열 살, 아주 늦으면 열세 살. 내가 다닌 학교는 소아재활원이기 때문에 열다섯 살 이상은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보지 못했지만, 다른 특수학교에는 열여섯 살에 초등 과정에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다. 활동보조 제도가 없었던 시절이라 장애학생들의 뒷감당은 부모님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친구들이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는 상황을 보면서, 어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일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오다가다 엄마들의 한숨 섞인 하소연을 들으며 ‘저 언니오빠들은 몸이 많이 불편해서 멀리 있는 여기까지 오기 힘드니까 학교에 늦게 들어온 것이겠지’ 혹은 ‘저 친구는 엄마가 늘 붙어 있었는데, 엄마가 바빠지셔서 이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특수학교는 드물었고, 있는 곳마저 접근성이 좋지 못했다.
주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먹으면 학교에 다니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 나서고, 일상을 살아간다. 그 평범한 생활을 ‘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장애 때문에 집안에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친구 삼아야 했거나 깊은 산속에 있는 시설에 보내졌던 이들이다. 책을 읽고 싶고, 글을 쓰고 싶고, 돈을 벌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지만, 사회는 격리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격리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 사람들
▲ 홍은전 기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2014)
노들 장애인야간학교(이하 ‘노들야학’)는 그런 비슷비슷한 사연을 가진 수많은 재가(在家) 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삶을 함께하고 있다. 장애인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암초들을 뛰어넘고 부수어가며 살아남은 기록이, 노들야학 20년을 기념한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홍은전 작가, 까치수염, 2014)에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노들야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만큼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노들야학을 거쳤던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은 장애인권활동가가 되기도 하고, 사회 곳곳에서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기도 했으며, 이론으로 그쳤던 장애운동에서 한발 나아가 이동권이나 활동보조인 제도 등과 같은 정책 변화를 일구기도 하였다.
책에도 소개된 것처럼, 처음 교사가 되어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야학의 일상을 시작할 때는 낯선 몸을 한 사람들과 생활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수업은 물론이고 즐거워야 할 모꼬지도 ‘일’이 될 수밖에 없고, 장애학생의 활동보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남몰래 기도 드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들의 수업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철학 공부를 하고, 인권 강좌를 듣는다. 연극을 하며 자신들만의 표현 방식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자립생활을 하기 위한 준비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을 통해 노들야학의 사람들은 지금도 함께 ‘지지고 볶는’ 생활을 하고 있다. 20년 동안 이어져왔고 또 앞으로도 이어나갈 ‘노들의 사람들’이 했던 모든 활동들은 결국, 차별 없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격리되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아니었을까.
함께 살기 위해 노들의 사람들은 무수히 싸웠고, 그 기록은 이 책 곳곳에 소개되어 있다. 장애인은 ‘집 아니면 시설’이라는 생각이 정답처럼 받아들여지던 때에, 노들의 활동가들은 지하철을 막아서고, 버스에 올라타고, 한강 다리를 아무 보장구도 없이 맨몸으로 건너고, 서울시장과 복지부 장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건물을 얻기 위해 한겨울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했고, 사회보장 제도의 맹점으로 인해 희생되는 생명이 더이상 나오게 하지 않기 위해 노숙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한 활동이 있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저상버스가 들어왔고,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시설을 벗어난 생활을 꿈꾸게 되었다. 장애아동이 학교에 다니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하나씩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배우고, 일하고, 투쟁하고, 사랑을 하는 공간
책 속에서 등장하는 노들의 학생 중에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집에만 있다가 처음 바깥으로 나오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나의 친구 역시, 중학교 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집안에 방치된 채 생활하다 노들야학을 알게 되면서 공부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생활시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장애인권활동가들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고 시설에서 벗어나 자립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하나씩 모이고 또 뭉치다 보면, 배우고 싶어도 편의시설이 안 되어 공부를 못하는 상황들이 없어질 것이고, 30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나들이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실력은 좋지만 장애가 심해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말도 사라질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노들야학은 여러 고비를 넘기고 20년을 지내왔다. 국가 지원 예산이 깎이거나, 활동가들이 구속되거나, 옆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되는 상황들을 넘어야 했다. 장애인 당사자이긴 하지만 야학 외부에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민들도 많았을 것이다. 스무 해를 지내면서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힘든 활동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활동가도 있고, 투쟁을 하는 분위기가 싫어 떠난 교사들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노들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못하고 행사 때면 달려오는 지원군으로 남았다. 이 많은 지원군들은 노들야학이 어떤 한 영역으로 치우치거나 매몰되지 않고 사회에서 노들야학만의 정체성을 유지해나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스무 해의 삶을 기록할 수 있었던 노들야학은 어느새 야학 사람들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 된 것 같다. 일하고, 배우고, 싸우고, 사랑을 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로 한쪽에 있는 노들야학에서는 오늘도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꽉 채워져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죽을 듯 살 듯 장애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면서도 여전히 수업은 계속되는 것이 노들의 힘 아닐까?
장애인 교육을 위한 야학이 필요 없어지는 날까지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요즘에는 많이들 활동보조인의 보조를 받지만, 그럴 수 없는 아이들은 지금도 엄마의 보조를 받거나 할머니의 보조를 받아 병원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사실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좀더 아이의 몸 상태를 좋아지게 하기 위해, 등에 업거나 휠체어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오는 엄마들의 모습에 그 옛날 먼 학교까지 일하다 말고 나를 데리러 왔던 우리 엄마 모습이 겹쳐 보인다.
나는 장애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더 이상 지친 한숨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짓눌리지 않는 풍경을 보고 싶다. ‘노들야학은 없어져야 한다’고 얘기했던 초기 노들 교사들의 말처럼, 좀더 가까운 미래에 더 이상 장애인 교육을 위한 야학이 필요 없어졌으면 좋겠다. 야학은 그저 즐기고,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 이희연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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