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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래의 두 상징: ‘고가철교’와 ‘저항정신’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피니스테르의 관문, 모를래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브르타뉴 지방에서도 진정한 브르타뉴라고 할 수 있는 피니스테르 지역의 관문, 모를래(Morlaix)에 방문한 날은 볕이 좋은 여름이었다. 기차는 고가철교를 지나자마자 우리 일행을 모를래 역에 내려놓고 떠났다. 역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깎아지른 듯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이 골목길들은 정겨워서, 언제였나 싶게 금방 시내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었다. 

 

              ▲  모를래(Morlaix) 항구로 향하는 강가. 이 강은 영불해협(Manche)으로 이어진다.    © 정인진 
 

모를래는 양 옆으로 언덕을 끼고 그 사이 깊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계곡에는 쟈를로(Jarlot) 강과 끄플뢰뜨(Queffleuth) 강이 흐르고, 두 강이 만나 영불해협(Manche)으로 향하는데, 바로 그 강들이 만나는 자리에 모를래가 위치한다. 강 하구에는 모를래 항구가 있다. 이 항구는 옛날부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말린 생선들과 가죽, 종이, 보르도의 포도주까지, 북부 프랑스와 유럽으로 향하는 많은 배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깊은 계곡 사이, 모를래의 아름다운 ‘고가철교’

 

깊은 골짜기 때문에 모를래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은 프랑스 내륙으로부터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브르타뉴의 피니스테르 지역이 내륙과 연결될 수 있었던 건 1863년 모를래 언덕 사이에 화강암 고가철교(Viaduc, 비아뒥)가 건설되면서부터다.

 

이 철교를 만들기 위해 9백~2천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으며, 1만1천톤의 화강암과 7만4천톤의 모래와 흙, 43톤의 철이 들어갔다고 한다. 철교의 높이는 58미터에 길이 292미터로, 전체 6만5천830m3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이 고가철교 덕분에 파리와 브레스트를 잇는 열차가 달리게 되었다. 

 

                  ▲  언덕에서 보이는 '고가철교'와 모를래 시내 풍경.    © 정인진 

 

나는 브르타뉴를 소개하는 책자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깊은 계곡 사이에 연결된 거대하고 높은 모를래의 고가철교 사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다리가 진짜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며, 모를래를 구경하러 갈 꿈을 키웠다. 그런 만큼 모를래는 순전히 고가철교를 보기 위해서 방문한 도시였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모를래의 고가철교는 아름다웠다. 그 웅장한 위용에 압도되어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도시 어디서나 보이는 고가철교 덕분에 모를래 역시 매우 장엄한 느낌을 풍겼다.

 

아치 사이에 적힌 ‘철교의 역사’를 읽으며

 

이 철교도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독일군의 브레스트와의 연결을 끊기 위해 이미 1942년에 몇 차례 공격이 계획되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취소되었다. 그러다 결국 1943년 1월 29일, 두 개의 폭탄이 고가철교 위에 투하된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빗나가 근처 ‘천사들의 노트르담’(Notre-Dame des Anges) 유치원에 떨어져 교사를 포함해 39명이 사망하고 주민 30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사들의 노트르담 예배당’(Chapelle de Notre-Dame des Anges)은 당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이때 폭격을 당한 고가철교는 열흘 후에 수리를 마치고 다시 개통되었고, 1943년 3월에도 한 차례 공격이 더 이어진다. 그러다가 결국, 1944년 8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 벌어진 공격으로 고가철교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고가철교의 역사적 수난 과정은 철교 중간 층에 사람이 가로지를 수 있게 만든 육교 위, 아치 사이 사이에 잘 설명되어 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모를래 고가철교와 관련된 역사를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고가철교는 모를래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모를래 시 역시 중요한 역사적 상징물을 잘 관리하기 위해 애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람들이 고가철교를 거닐면서 철교의 역사를 읽게 된다면, 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과거를 잊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할 것 같다. 

 

         ▲  고가철교 위에서 내려다 본 모를래 시내.  길 가장 끝에 정면으로 있는 것이 모를래 시청이다.   © 정인진 
  

특히, 철교 2층 육교에서는 도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모를래의 전체 풍경을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다보이는 모를래의 풍경은 정말이지 아름답다. 관광책자마다 꼭 이 위를 가로지르며 모를래 풍경을 감상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그랑뤼의 9번지 뽕달레쯔 집’

 

철교에서 내려와 다시 시내로 돌아오려면 계단이 아주 많은 가파른 골목길들을 따라 한참 내려와야 한다. 시내는 계곡을 양 옆으로 두고 길게 자리잡고 있어, 주택가가 긴 골목으로 줄지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언덕에서 계곡으로 내려오는 비탈진 골목들도 아름답지만, 옛날에 지은 꼴롱바주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시내의 골목길들도 무척 아름답다.

 

모를래의 꼴롱바주들은 요즘 수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아르두와즈 돌편으로 철갑을 두르듯 건물 전체를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수리하고 있는 집들이 많았다. 알록달록한 나무 기둥들이 감춰진 것은 못내 서운하지만, 아르두와즈로 감싼 건물도 나름 멋이 있어 보였다.

 

모를래의 아름다운 골목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라 그랑뤼’(La Grand’rue)이다. 이 골목에는 15세기 앙코르벨망식 꼴롱바주 건물들이 여러 채 있다. 이런 꼴롱바주 집들 가운데 특히 ‘뽕달레쯔 집들’(Les Maisons a Pondanez)은 특색 있기로 유명하다. 이 집들은 부유했던 마직물 상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파사드(건물 정면)에는 성인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뽕달레쯔 집들 가운데서도 9번지에 있는 집은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되어 시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 집은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가 층층이 나눠져 있지 않고 1층부터 4층까지 훤하게 뚫려 있다. 또 가장자리에 있는 방들이 나선형 계단으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런 건물은 ‘안느 공작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과 함께 모를래에 딱 두 채 존재하는데, 프랑스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유일하다고 한다.

 

               ▲  문화재로 지정된 그랑뤼의 9번지 뽕달레쯔 집 실내. 위층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정인진 

 

내가 방문한 날은 마침 ‘안느 공작의 집’이 쉬는 날이라 방문하지 못했고 ‘그랑뤼의 9번지 뽕달레쯔 집’만 구경할 수 있었다. 이 ‘뽕달레쯔 집’ 역시 파사드에는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고, 1층 로비에는 건물 전체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화강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집을 둘러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나무 대들보와 계단들이 모두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는 데다가 집의 구조뿐 아니라 창문, 천정 할 것 없이 개성 있는 기술들이 총동원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집을 보아도, 당시 브르타뉴의 마직물 산업이 얼마나 번창했을지 짐작이 갔다.

 

집 실내에는 옛날 모를래에 부를 창출해 준 아마 직물산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 자료들은 이 고장은 물론, 브르타뉴의 마직물 산업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계속되는 ‘저항’

 

모를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가지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저항’과 관련한 역사이다. 모를래에서는 지난달 19일에서 20일 밤 사이에 세무서가 시위대에 의해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금 강제집행에 대항한 행동이었다. 농산물의 생산과잉과 그로 인해 판로가 막힌 브르타뉴의 농민들이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에 분노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행동이 브르타뉴에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오랜 전통 속에서 프랑스 정부에 대항한 저항 세력들이 존재했고, 그 중심에 늘 모를래가 있었다. 모를래의 국가에 대한 저항은 1675년 <빨간 모자들>(les bonnets rouges)이라고 불리는 저항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이 빨간 색의 ‘보네’라고 불리는 챙이 없는 헝겊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시위를 벌여 “빨간 모자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61년 6월 8일에는 1천5백여명의 농부들이 2백여대의 트랙터를 이용해 도시를 포위하고, 모를래 도청을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지난 9월, 모를래 세무서를 불태운 사건과 매우 닮아 있는데, 당시에도 생산과잉에 따른 유통의 붕괴가 원인이었다. 

 

               ▲  모를래의 상징, 고가철교(Viaduc).  도시 어디서나 이 철교가 보인다.  © 정인진 
  

1970년대에는 브르타뉴 지역이 ‘프랑스의 식민지’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투쟁이 이어졌다. 실제로 브르타뉴는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농산물을 제공하는 식으로, 프랑스 내륙에 있는 식민지적 역할을 오랫동안 담당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프랑스에 합병된 이후, 중앙 정부는 브르타뉴가 경제력을 지닐 수 없도록 중요한 산업들을 조직적으로 파괴시켰다. 오랫동안 근대화되지 못한 채 농업에만 종사해온 브르타뉴가 산업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전히 브르타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육류가 프랑스 전역에 제공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1974년에는 브레스트의 경찰서와 법원이, 1975년에는 깽빼흐의 농업센터와 세무서가 시민들에 의해 공격 당한다. 1980년대에는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있다가, 다시 1999년 모를래의 세무서와 법원이 공격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지난 2013년 <빨간모자들>이 다시 등장하는데, 바로 환경세(ecotaxe)를 걷겠다는 정부에 대한 반응이었다. 환경 오염물을 많이 생산하는 생산물에 환경세를 매기겠다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었는데, 그것에 반대해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등 강력한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모를래의 파산한 Tilly-Sabco 회사의 노동자들이 앞장서 모를래 도청 울타리를 부수는 일이 발생한다. 프랑스 안에서도 덜 근대화된 브르타뉴의 산업 구조로 인해, 브르타뉴 지역이 이 환경세의 가장 큰 적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사건들이 다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또 최근에 발생한 시위가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공권력에 쉼 없이 저항하고 싸우는 모를래의 시민들이 나는 한편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저항정신을 잃는 순간 그들은 정말 식민지 백성이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를래의 저항하는 행동 속에서 브르타뉴의 정신을 본다. 이 저항하는 사람들 모습은 튼튼하고 장엄한 모를래의 고가철교를 닮았다.  ▣ 정인진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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