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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분수공원에서 가야금을 탄 그녀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 인터뷰 

 

 

빵, 쌤, 살롱 바다비, 씨클라우드. 인디 음악 공연 좀 보러 다닌 사람이면 다 알만한 이름, 바로 홍대 클럽들이다. 강렬한 사운드와 비트에 절로 고개가 까딱거리거나 통기타 선율에 마음을 빼앗길 것 같은 그곳에서 가야금을 타며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있다.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다. 

 

▲   2014년 10월 3일 밤, 팽목항에서 노래하는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   © 사진: 진승일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고 현재 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16명의 여성뮤지션이 함께 만든 앨범 <이야기해주세요>의 공연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가야금이라고 하면 ‘황병기’밖에 모르던 나는 당시에는 정민아를 그냥 스쳐 지났다. 정민아라는 이름이 다시 내 눈에 들어온 건 지난 5월이었다.

 

주말에 홍대 주차장 길을 걸어가고 있노라니 한 인디 뮤지션이 검은 옷을 입고 기타 치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작은 피켓에는 세월호 참사를 가슴 아파하며 분노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주차장 정자 밑에서 공연을 보다가 몇 미터 걸음을 옮기니 또 다른 뮤지션들이 우쿨렐레와 젬베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총 100여개팀이 홍대 거리 곳곳에서 버스킹(길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 형식의 1인 시위를 한 거였다. 이름하여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 정민아는 그걸 제안한 두 명의 뮤지션 중 한 사람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산하기관이 주최하는 많은 행사와 공연이 취소되었다. 처음에는 세월호 사고를 애도하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되었지만, 점점 윗선에 보여주기 위한 일방적인 축소 편성으로 이어졌다.” (‘공연전말기’, 국악 잡지 <LARA> 웹사이트 2014년 5월 13일.)

 

간단한 소모품 치워버리듯, 음악가들에게 ‘방구석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관료들에게 정민아는 노래로 애도할 수 있음을, 기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계속 거리에서 노래했다. 음악을 흥청거리며 노는 건 줄만 아는 이들에게 알려주고자, 똑바로 보라고. 신나고 흥겨워도 슬픔을 기억해주고 위로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음악은 이런 힘이 있다고” (‘공연전말기’ 중에서)

 

당돌한 선언은 매혹적이었다. 그 매혹에 이끌려 초가을의 어느 날, 청파동 숙명여대 안에서 정민아를 만났다.

 

가야금 만지던 ‘락키드’ 소녀
 

▲  ‘모던 가야그머’  정민아   © 일다 
 

안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한국무용을 하던 정민아는 4학년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집 앞에 가야금 교습소가 생겼다. 마침 집에 한국무용을 할 때 민요 몇 자락 부르기 위해 샀던 연습용 가야금이 있었다.

 

그렇게 가야금을 만지기 시작했고, 그 뒤 국악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다.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 가서 전공을 했다. 졸업 후에는 ‘국립국악단’에 들어가기 위해 7~8차례 시험을 봤다. 하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공연에 목이 말랐지만 설 수 있는 무대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락키드’로 홍대 클럽에 가서 음악을 즐겨 듣던 정민아는 그 즈음,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클럽에 갔다. ‘주말에 카운터를 봐 주면 연습실을 무료로 쓸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에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연습실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으니까 클럽 사장이 듣고 무대에 서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처음에는 가야금 산조를 연주했어요. 그런데 제 무대 앞, 뒤로 주로 메탈이나 펑크가 연주되는 걸 보고 아, 내 연주는 뭔가 안 맞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직접 작곡을 했고 그 다음에는 연주하면서 노래도 불러봤어요.”

 

직접 만든 곡으로 클럽에서 노래하는 ‘모던 가야그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낮에는 전화상담원, 밤에는 ‘홍대 선녀’

 

<애화>라는 타이틀의 EP앨범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지만, 클럽에서 간간이 하는 공연만으로 생계를 꾸리긴 힘들었다. 전화상담원 일을 시작했다. 홈쇼핑, 사교육 업체, 결제대행서비스 업체 등에서 일했다. 그렇게 4년 반을 낮에는 전화상담원, 밤에는 홍대 가야금 가수로, 주말에는 클럽에서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전화상담원을 하면서 만난 옆 자리 친구 이야기는 “은미 이야기”라는 곡에 실려 있다.

 

‘따르릉 따르릉 그녀의 아버지는

 따르릉 따르릉 어제 죽었지

 따르릉 따르릉 그녀의 오빠는

 따르릉 따르릉 술 마시고 싸우네

 따르릉 따르릉 그녀의 엄마는

 따르릉 따르릉 빚을 지고 집을 나가

 

 오늘도 은미는 전화를 받아요

 오늘도 은미는 전화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은미 명의로 빚을 지고 집을 나간 거예요. 엄마는 없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다니는데 첫 월급부터 차압을 당했죠. 그때 은미가 스물 네 다섯 살이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딱 3일장 치르고 다시 와서 전화를 받은 거예요. 항상 기괴하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 콜센터에서, 그렇게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을 제가 본 거죠.”

 

그렇게 낮에는 이 시대의 수많은 은미와 함께 노동하면서 밤에는 뮤지션으로 부지런히 발품을 판 덕분에 2006년, 한국콘텐츠진흥기금에서 지원금을받아 첫 정규앨범 <상사몽>을 냈다. 당시 1만장이 팔렸고, 2008년에는 원더걸스, 윤하와 함께 한국대중음악상 신인상 후보에도 올랐다. 고맙고 기특한 녀석 <상사몽> 덕분에 정민아는 전업 뮤지션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이후 2집 <잔상>(2008년)을 냈다.

 

그렇지만 보릿고개는 다시 찾아왔다. 누군가 주먹밥을 팔아 대박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이번에는 호기롭게 주먹밥 장사를 시작했다. 주먹밥을 만들어 광화문역으로 나가서 첫날에 30개를 팔았다. 하지만 맛이 없었는지 갈수록 판매량은 떨어졌고 결국 장사를 접었다. 4kg의 김 가루와 2천개의 나무젓가락만 남긴 채.

 

이 이야기는 3집 <오아시스>(2011년)에 “주먹밥”이라는 노래로 담겨있다.

 

‘인생의 최고의 기회다 하고 만든 주먹밥/ 쉬울 줄 알았지 편할 줄 알았지/ 돈 벌기 쉬웠으면 전국민이 주먹밥 하게/ 대한민국 지하철 출구마다 주먹밥만 팔고 있게’

 

경쾌한 노래처럼 정민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하다. 인터뷰를 할 때도 정민아는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가 또 특유의 입담으로 빵빵 터지게 만들었다. 자칭 ‘홍대 선녀’(홍대 여신이 아니라)의 매력이다.

 

1년간 전국을 순례하며 곡을 줍다 

 

▲  올해 1월 발매된 정민아 4집 <사람의 순간> 
 

3집까지 내고는 한참 곡을 못 썼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집안에만 박혀 있어서는 곡이 써질 것 같지 않아 ‘가사를 주워볼까’ 하는 마음에 도서관을 갔다. 서울에 있는 도서관부터 순례를 시작했다. 어느 날은 입고 나온 옷 그대로 충동적으로 버스를 탔다. 순천, 부산, 전주에 있는 도서관에 갔다. 찜질방과 도서관을 전전하며 하나 둘씩 모티브들을 주웠다.

 

어린 시절 살던 집 근처 찜질방과 도서관에도 갔다. 아홉 살에 엄마와 함께 갔던 곳 ‘수리산 한증막’. 지금은 찜질방이 된 그곳에서 쓴 곡이 “서른세 살 엄마에게”이다.

 

“그 당시 한증막은 여자들만 가는 곳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맞고 멍 빼러 많이 갔어요. 신들린 여자, 몸 파는 여자들도 와서 둘러앉아 얘기를 나눴고 저는 그 옆에서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보살님(신들린 여자)이 노래를 한 자락 하시면 진짜 끝내줬어요. 아줌마들은 그 옆에서 방귀 끼고. 하하. 재밌는 곳이었죠.

 

9살 때 제가 느낀 건 엄마의 쓸쓸함이었어요. 애라서 힘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혼자 가기 싫었는지 꼭 저를 앞세우더라고요. 몸에 멍이 들었으니까 혼자 가기 쪽 팔리고, 그래도 나랑 같이 가면 사람들이 ‘저 애를 키우느라 참고 사나 보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애 셋을 키우고 생계도 꾸리고 남편의 폭력도 감내해가면서 살았던, 그 시절 그녀의 삶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여성으로 살다 보니 여성의 삶에 관한 곡을 많이 썼다. “부정한 여인”이란 곡에서 정민아는 성매매 여성에 대해 말하며 우리가 통상 갖고 있는 고결함과 불결함의 이분법을 깨뜨린다.

 

‘비루한 웃음을 파는 너의 입매는 고결하다

 헐떡이며 사는 너와 나와 그들은 무엇이 다르냐

 참고 참아도 끝내 토해지는 나의 불결한 피를

 너의 치마폭에 오롯이, 오롯이 담아다오’

 

이 곡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보름 동안 머물면서 쓴 곡이다. 찜질방과 도서관 외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부산의 ‘아지트’(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스)에서 머물렀다. 올해 1월 발매된 4집 <사람의 순간>은 그렇게 1년 동안 전국을 방랑하면서 만든 앨범이다.

 

“제가 이야기하려는 게 뭔가 봤더니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그때그때의 반짝이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아서 ‘사람의 순간’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었어요. 사람의 순간이기도 하고 또 사람인데 사람인 줄 모르고 살다가 문득 알게 되는, ‘사람’인 순간을 뜻하기도 해요.”

 

매 순간 마음을 강인하게 먹어야 했을 서른세 살 엄마, “길가의 풀처럼 작고 작게” 살고 싶었던 위안부 할머니, 울다가 웃고 웃다가 또 울었을 전화상담원 은미. 정민아는 이들의 빛나는 순간을 노래한다. 그건 주목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기 반짝이는 사람이 있다고, 사람은 누구나 빛나는 순간을 갖고 있다고, 정민아는 깊게 읊조린다.

 

사라지려는 음을 흔드는 ‘농현’ 주법처럼

 

정민아의 음악을 언뜻 들으면 처음엔 반주가 통기타인지 가야금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유튜브(youtube.com)에는 정민아의 곡을 기타로 연주한 동영상이 올라와있다. 나도 정민아의 팬 카페에서 악보를 다운 받아 기타로 쳐 본 적이 있다. 코드는 어렵지 않았지만 기타 반주로는 2프로 부족했다. 원곡이 가진 ‘맛’이 나지 않았다. 애절하지만 질척거리지는 않는, 때로는 담백하고 경쾌하면서도 또 그윽한 그 ‘맛’의 정체는 무엇일까.

 

“동양 악기들은 구슬픈 정서를 갖고 있어요. 똑같은 현악기라고 해도 하프는 맑고 청아하고 듣기에 아름답죠. 이에 견줘 가야금은 조금 어둡고 조금 둔탁하고 약간 애절해요. 국악기는 ‘농현’이라는 주법을 쓰거든요. 현을 눌러서 흔드는 것인데 현을 희롱한다고 해서 ‘농현’이라고 해요. 사라지려는 음을 흔드는 거죠.”

 

사라지려는 음을 흔드는 것처럼 정민아는 요즘 사라지려는 목소리를 흔들어 더 멀리 멀리 보내기 위해 노래한다. 세월호 참사 후 “이것은 국가가 아니다” 라는 제목의 공연을 했다. 세월호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의 북 콘서트에 참가했다. 지난 추석에는 동료 뮤지션 사이와 함께 한복을 입고 청와대 분수공원에 가서 가야금을 타고 상소문을 읽는 퍼포먼스를 했다. 

 

▲  지난 추석 정민아는 동료 뮤지션 사이와 함께 청와대 앞 분수공원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정민아 트위터   

 

인터뷰를 하면서 정민아가 움직일 때마다 스카프 사이로 언뜻 언뜻 노란 리본이 보였다. 외출할 때마다 노란 리본 목걸이 다는 걸 잊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마음일까.

 

“다음은 내 차례다, 이 마음이에요. 바로 뒤에 있는 단면인데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요. 다음엔 내가 당할 사고고,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서 해줄 수 있나. 아주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내가 안 죽으려고 하는 거야, 이 마음이에요.”

 

6월초에는 고정희 시인 추모기행에 참가했다가 해남 미황사에서 공연을 하고 다음날 주지스님과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 그리고 10월 3일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천 명의 시민들과 함께 팽목항에 다시 갔다. 시커먼 밤바다를 앞에 두고 가야금을 탔다.

 

“그때도 이번에도 바다가 진짜 무심해요. 6월에는 낮에 갔는데 정말이지 아름답더라고요. 진도 앞바다에 섬 몇 개 조그맣게 떠 있고 물결 잔잔하고 하늘은 파랗고. 그런데 노란 리본은 붙인 걸 또 붙이고 또 붙이고 그래서 색이 바랠 대로 바래있고 거기에 희생자 이름이 쓰여 있고.

 

이번엔 밤에 갔어요. 시커먼 바다에 달이 하나 떠 있는데 달이 밝기도 하지. 바다에 달 그림자가 예쁘게 떠 있었어요. 바람이 엄청 셌지만 밤바다는 너무 아름다웠죠. 모인 사람들 다 같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 열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어요. 누가 답을 하겠어요? 억울한 목숨들은 답이 없죠. 팽목항이 무슨 잘못이며 바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아주 무심하고 아름다운 곳인데.”

 

정민아는 음악을 끝내는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명감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만 지금 제일 잘하는 것과 돈을 버는 방법이 음악일 뿐이다.

 

“언젠가부터 생의 목표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됐어요. 왜 태어났지? 왜 살고 있지? 계속 생각하다 보니 결론이 홍익인간이더라고요. 더불어 잘 살려고, 그러다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살고, 그 한 켠에서 음악을 계속 만들 거예요.”

 

오는 10월 18일 저녁 7시, 홍대 근처 씨클라우드에서 열리는 세월호 북콘서트 “지금이 골든타임”에 가면 이 홍대 선녀를 만날 수 있다. ▣ 나랑   
 

* 정민아 팬카페 http://cafe.daum.net/gayagumer

* 세월호 북콘서트 “지금이 골든타임” 정보 http://cafe.naver.com/ccloudcs/2731 

* <상사몽> 수록곡 “무엇이 되어” 유튜브 영상 http://bit.ly/1s8SL6D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영문 기사 사이트> 가기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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