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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당시 나의 인생은 즐거웠다. 우리 회사는 말이 전문직이지 월급은 동종 업체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취직을 했다는 것이 기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엔 일을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집에 와서도 일을 손에 놓지 않고 열심이었다. 내 사수(직장에서 해당 분야의 일을 전수해주는 직원)는 나보다 4살 정도 많은 남자직원이었는데, 내가 일을 빨리 배운다며 기특해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 후, 실장이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 끼어들면서 나의 즐거움은 끝이 나버렸다. 사수에게 일을 배우기만도 급급했던 시기가 지나고 내게도 좀더 중요한 역할이 맡겨졌을 때, 우리 부서는 자리배치를 달리했다. 나야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까 좋은 자리는 꿈 꿀 수 없는 형편이었고, 결국 가장자리에 앉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팀원 중에 여자가 나뿐이라 그렇게 배치한 것 같다.)

그 자리는 실장의 사무실 바로 앞 자리였다. 그 때부터 실장의 호출이 잦아졌다. 사실 업무는 팀을 이뤄서 하고 나는 팀장도 아닌 일개 팀원일 뿐이니, 과장급인 실장이 나를 직접 불러서 상의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실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불러서 회사 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지, 집안환경은 어떤지,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물어보았다.

처음엔 그저 친절한 상사라고 생각하고 나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했는데, 나중엔 점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실장은 자기 사무실로 나를 불러들이는 것 외에도 화장실을 가는 등 들락거릴 때엔 꼭 내 자리에 와서 이것 저것 얘기를 시켰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았다. 아내가 어떻다, 자식들이 어떻다, 이런 사생활들에 대해서.

그리고 얘기하는 도중에 우연인 듯 내게 몸을 기대왔다. 등을 만지거나 어깨를 스치는 일은 예사였다. 나는 그 때까지도 ‘성희롱’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실장의 행동이 불편했던 이유는 첫째론 일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고, 둘째론 내가 일하는 것이 못 미더워 감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셋째론 다른 동료들의 눈에 좀 이상하게 보일까봐 창피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말겠지 하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실장은 날이 갈수록 나를 귀찮게 했고, 내가 화장실에 다녀올 때면 아예 내 자리에 앉아 있기까지 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설마하니 아버지 뻘 되는 사람이 내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고, 저렇게 친절한 표정을 짓는 상사에게 “이러지 말라”고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두렵기만 했다.

결국 나는 팀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나의 사수에게 실장의 행동과 관련해 운을 뗐다. 그러자 그는 눈에 띨 정도로 긴장을 하면서 “야, 그냥 귀엽고 이뻐서 그런 거지. 딸 같으니까….” 그렇게 얼버무리곤 즉각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이러니지만 그의 오버하는 태도를 보고 나는 실장의 행동이 ‘성희롱’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동료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까지.

나는 그냥 침묵해야만 했다. 문제제기를 했다간 나만 창피를 당하고 불이익을 볼 거라는 게 뻔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는 한, 실장과 동료들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실장이 부를 때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것, 실장이 자기 얘기를 할 때 웃지 않고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일만 하는 것, 나를 더듬으려는 그 손을 피하거나 내 손으로 잡아서 다시 그에게 돌려주는 것, 그리고 내 자리를 최대한 비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맘 고생을 한 것이 1년이 지났다. 칼자루는 오로지 실장의 손에 있었고, 나는 늘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뻔뻔했다. 내가 불쾌해하고 저항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능글맞게 웃거나 헛기침을 하고선 넘어가버렸다. 동료들과의 관계는 갈수록 어색해졌다. 대체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 역시 동료들 보기가 민망했다. 실장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내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지금은 그 때로부터 또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들은 내게 큰 상흔을 남겼다. 나는 달라졌다. 성격은 소심해지고, 일은 너무나 재미가 없어졌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밉고, 그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실장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의 생활은, 그리고 직장에서의 나의 위치와 내 인생은 달랐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해왔다는 사실이 나를 창피하게 한다.

지금 나는 회사를 벗어날 방도만 찾고 있다. 3년 전부터 그래왔다. 어떻게 하면 그만 두고 딴 일을 할 수 있을까. 길이 없어서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내가 정말 많이 변했다는 걸 깨달을 때는 ‘결혼’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다. 어느 샌가 나는 “돈 많은 남자가 나타나 결혼하자고 했으면 좋겠다”는, 이전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관련기사] 성희롱 피해, 의학적으로 검토돼야

직장 내 성희롱. 예전의 나는 성희롱 예방교육이란 것에 대해서도 “꼭 해야 하나? 괜히 분위기만 더 안 좋아지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 때의 ‘성희롱’이란 단어는 영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젠, 그 말만 들어도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괴롭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누가 고소를 했다는 얘길 들으면,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또 다시 괴로워진다.

어디에선가 나 같은 일을 겪고 있을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은 나를 더 갑갑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직장 내 성희롱이 여성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그리고 성희롱을 문제 제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성희롱 피해자들을 나 몰라라 하고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들에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일다] 민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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