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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달러를 벌어주는 애국자입니다’

“(우리들을 교육할 때) 공무원들이 달러를 이렇게 수입해서 고맙습니다. 더 많이 좀 해주십시오.” (미애/ 50대 여성, 1970년대 동두천)

 
“미국에서 오고 한국주둔군 미군들하고 한국군인하고 합동훈련을 해요. 그러면 여자들이 전라도 광주, 동두천, 좍 포주들이 데리고 오고….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뭐 홀 하나를 얻어서 이런 가정집 같은 것도 뭐 몇 부라고 붙이고 하는 데가 세워진 게 임시 성병진료소라고 해가지고 써 부쳐 놓고 (인근의) 보건소에서 간호사와 의사가 와서 검진을 하는 거예요.” (강자/60대 여성, 1970년대 송탄)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근래에까지 기지촌의 군대성매매에 직접 개입하고 여성들을 관리해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동두천, 의정부, 평택, 군산 등 기지촌에서 활동을 벌여 온 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새움터’는 군대성매매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8명의 여성들과, 1990년대부터 기지촌여성들을 만나온 상담자 3명의 증언을 토대로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이 증언하는 1970~1990년대 기지촌의 실상은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된 한국에서,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위안부”, “정신대”라고 불리며 인적 사항이 한미 양측에 공유되고, 미군의 휴식과 오락을 위한 예절교육을 받으며, 강제성병검진과 강제치료를 당했던 가난한 한국여성들의 현대사가 담겨있다.
 
한국과 미군 양측이 여성들 인적사항 공유, 관리해

  

기지촌 내 미군클럽(2000년대) ©연분홍치마

특히 1970년대 초 미군이 한국정부에 기지촌정화사업을 요구하고 난 후,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여성에 대한 교육프로그램과 관리시스템을 운영하며 이에 부응했다.

 
그 방식은 ‘자치회’를 통해서였다. 자치회는 이름만 ‘자치’를 걸고 있을 뿐이지, 실체는 기지촌여성들의 신원과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서로를 감시하며 성병규제를 하는 목적으로 활용된 국가통제기구였던 것으로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모든 기지촌여성들이 자치회에 등록을 해야 했다는 점이나, 지역 경찰과 공무원들이 자치회 대표를 선정했고 어떤 자치회장은 보건소 말단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증언이나, 시로부터 월급을 받았다는 고백 등이 이를 입증한다.
 
“자치회라는 건 우리 스스로 권리를 찾자고 뭉친 게 아니고, 그 자치회라는 걸 보안과, 사회복지과, 이런 데서 만들어 준거예요.” (강자/1970~1980년대 군산.송탄)
 
“(기지촌여성들의 인적 사항과 사진이) 미군한테도 있고. 부대 안에. (미군) 위생병한테도 있고. 그거를 부대 안에 보고를 안하면은 그 동네에서 그 여자들이 살 수가 없는 거야.” (선영/60대 여성, 1970년대 군자)

 
강제성병검진, 강제수용, “임시 위안소” 동원

 
기지촌여성들이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경험으로 꼽는 것은 성병관리와 그에 따른 강제치료, 그리고 미군범죄다. 여성들이 “토벌”이라고 부르는 성병검진을 위한 정기단속과, 낙검자수용소 강제억류 등의 인권침해 행위에는 한국정부와 미군 측에 공동책임이 있다.
 
“… 평택 보건소 있는 데다가 아주 열악한 시설에다가 잡아다가 가둬놓고 그러기 때문에 담요를 찢어서 탈출을 하고…” (강자/ 1970년대 송탄)
 
“나는 이 남자(미군)를 몰라. 이 남자를 모르는데, 이 남자가 나라면은 내가 (낙검자수용소에) 들어가야 돼. …(수용소에 억류된 다음) 검진에 합격하면 바로 나오는데 안 되면은 5일을 살고, 7일을 살고, 그게 합격될 때까지 있는 거야.” (미애/1970년~1980년대 동두천)

 
성병검진을 통해 강제로 낙검자수용소에 억류된 여성들은 미군에서 제공한 독한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사망한 경우도 있었으며, 억류된 기간 동안 포주에게 진 빚이 불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보건소 관련 직원들의 뇌물수수도 횡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규모 한미군사합동훈련 시 미 군대 인근에 “임시 위안소”가 설치되기도 하는 등 한국정부와 미군은 기지촌여성들을 필요에 따라 관리하고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여성들이 미군으로부터 폭행, 강간, 살해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에는 “지네들끼지 쓱싹해서 보내버리고”, 아무런 안전망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 여성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이런 환경에서 기지촌여성들에 대한 미군범죄사건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여성들의 삶을 위협해왔다.
 
미군의 안락함, 한국의 외화벌이에 희생된 가난한 여성들
 
새움터는 11명의 여성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1970~1990년대 기지촌의 실상을 드러내며 “미군의 건강과 안락함”을 위해, 또한 “한미동행의 강화와 외화획득을 위해” 가난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동원되고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미 양국 정부가 기지촌 군대성매매를 조장하고 관리해온 역사를 “인정”할 것과, 기지촌여성들에게 사죄와 지원조치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공창”이나 다름없는 환경 속에서 국가의 규제를 받으며 여성들의 삶은 기지촌 내에 오랜 기간 머물렀으며, 직업교육이나 재활프로그램과 같은 혜택도 받지 못하였고, 나이 들어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가 많다고 새움터는 전했다.  
[일다]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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