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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책임>이 한국사회에게 던지는 질문

지금 역사교과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초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에서 군사정권과 일제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는 내용을 담은 ‘대안교과서’가 나오고, 얼마 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좌편향’ 교과서 수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화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정부와 뉴라이트 계열 단체들의 행보는 매우 철저하고 기민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교과서 수정을 거부한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교육과학기술부가 나서서 수정을 지시하고, 교육청들은 일선 학교에 직접적으로 변경 압력을 넣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은 3억 원의 예산을 들여 극우 인사들로 구성된 강사진을 학교로 파견해 <한국 현대사 특강>을 진행해 큰 물의를 빚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의도가 의심스러운 ‘한국현대사박물관 건립’ 계획까지 진행 중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화해는 누구의 것인가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 사회에게 “한국 내에서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보다 차분하고 생산적으로 접근하고 대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하며 출간된 책이 있다. <역사와 책임(歴史と責任)>(선인출판사)이다.
 
이 책은 2007년 일본에서 국민기금(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1995년에 발족된 ‘국민기금’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에게 일본국민들이 ‘속죄금’을 모아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금은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보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사자 할머니들과 각국의 시민사회로부터 기만적이라는 반발에 부딪혔다.)의 해산과 정당화 작업을 통해 “역사수정주의적 ‘화해’를 연출하고, ‘위안부’ 문제를 적당히 종결시키려는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해 출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역사와 책임"

올해 6월 일본에서 출판된 <역사와 책임>은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사상사를 전공하는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교수와 한국 한신대학교에서 일본사회문화와 젠더론을 가르치는 김부자(金富子) 교수의 공동편집으로 기획되었으며, 18명의 연구자와 활동가의 논문을 통해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쟁점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007년을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변화의 한 해였다고 지목한다. 변화의 한 축은 국제 사회에서 진행된 ‘위안부’결의의 확산이다.

 
7월 30일 미 의회 하원을 시작으로 11월 8일 네덜란드 의회 하원, 28일 캐나다 의회 하원, 12월 13일 EU의회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의 명확한 형태의 책임인정과 사죄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이 잇따라 채택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2007년 3월, 12년간의 활동을 마친 국민기금이 해산(解散)을 신고했다. 이 책에서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여성네트워크(VAWW-NET JAPAN)’의 공동대표 니시노 루미코씨는 “국민기금 해산 전부터 ‘화해’라는 말이 갑자기 부상”했다며 이 “화해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묻는다.
 
니시노씨는 “‘화해’는 피해여성들의 피해회복 과정에서 피해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화해’를 말하지 않는데 그 누가 ‘화해’를 말한다는 것인지 묻고 있다.

 
한국 지식인여성이 쓴 <화해를 위해서> 논란

 
<역사와 책임>의 공동편집자인 김부자씨는 책에 수록된 논문 “‘위안부’문제와 탈식민지”에서 한국인 여성 박유하(세종대 일문학 교수)씨의 <화해를 위해서>(2005, 뿌리와 이파리)라는 책에 대한 논란을 소개했다. 박유하 교수가 쓴 책 <화해를 위해서>는 2006년 일본어판이 출간되어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받는 등 일본 논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부자씨에 따르면, 한국에 대표적인 일본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는 우에노 치즈코씨가 <화해를 위해서>의 “논의의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며 해설을 썼으며, 진보적인 성향을 표방하는 아사히신문에서도 거론되는 등 “일종의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화해를 위해서>는 “피해자의 내셔널리즘과 가해자의 내셔널리즘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한국에 대해 일본을 계속 규탄하는 ‘강자로서의 피해자’로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해를 위해 피해자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박유하 교수는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본의 우익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을 소개하고, “강제성에 대한 의문은 한국에서도 제기되고 있다”고 썼다. 그 근거는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 포럼’의 핵심멤버이자 ‘대안교과서’ 집필자 중 한 사람인 이영훈 교수(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주장’이다.

 
이영훈 교수는 ‘강제적으로 끌려간 위안부는 없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근거는 “실제로 그것을 입증할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행의 강제성’을 입증하는 ‘공문서’가 없다는 말인데, 김부자씨는 이에 대해 “피해자 증언과 위안소 내에서의 강제성을 입증하는 공문서의 존재만으로 입증이 된다”고 반박한다. 이는 이미 각국의 ‘위안부’ 결의에서 인정된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김부자씨는 이러한 논리가 “군위안소에 구속된 성노예 상태보다 위안소에 가기까지 과정에서 여성의 자발성/강제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여성에게 책임을 귀속시키는 남성중심적인 발상”일뿐만 아니라 “일본우익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우익의 주장을 빼닮은 뉴라이트

 
지난 5일 금요일 저녁 7시 ‘위안부’ 피해여성인 한도순 할머니(87)가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따르면, 올해에만 열다섯 분의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이 우리 곁을 떠났고, 한국정부에 등록된 피해여성들 중 현재 아흔네 분만이 생존해있다.
 
피해자들의 존엄을 회복하고 역사적 과오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정말, 거의 남지 않은 것이다.

 
피해자들이 점점 벼랑 끝으로 밀리고 있는 한편에서, 일본우익의 주장을 빼닮은 뉴라이트의 주장에 근거해 한국 지식인 여성이 ‘화해’를 말했고, 이것이 일본 지식인 사회와 언론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기에 더해 올해 초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과의 ‘화해’를 적극 강조하고 나섰다. 그리고 현재 국내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부정하고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의 유산을 미화하는 역사왜곡작업이 뉴라이트와 정부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다.

 
‘화해’를 말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면서 화해를 종용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지금의 이 역사교과서 전쟁은 일부 언론에서 말하듯이 ‘보혁 갈등’이라고 칭해질 문제가 아니다. 상황을 냉정히 살펴보면 역사해석을 둔 이념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대립을 이용해 제 몫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묻게 된다.

 
이는 곧 한국 사회의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방증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역사왜곡과 역사교과서 논란은 한국사회가 어떻게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고 교육하며 미래로 이어갈 것인가의 문제를 깊이 따져야 할 때임을 웅변하고 있다. [일다] 박희정

일다 2009강좌 <변화의 길을 만드는 여성들: 여성저널리스트들의 꿈과 혜안을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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