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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가 되는 감정, 색안경이 되는 감정
삶은 감정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몰아칠 때도 있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우린 매 순간 생각과 감정과 감각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다만 우리가 특히 주목하게 된 어떤 감정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 기억에 남습니다.
의미 있는 우리 감정 중에는 희락이 있는가 하면 비애가 있지요. 물론 이런 고상한 감정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분노와 불안,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열정과 의욕, 반대로 무기력과 같은 에너지 형태로 다가오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이름 지을 수 있는 무수한 감정들은 다 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시작되고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나타납니다.
이렇게 매일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감정을 혹시 지극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린 감정을 늘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 감정이라 하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느끼고 인식할 때도 있지만, 느껴지기는 하는데도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를 때가 있고, 감정이 있는데도 인식조차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어디서 연유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감정을 없애려 하는데 더 능합니다.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이렇게 흩어져버린 감정들은 통증과 긴장으로 몸에 남아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고, 언제든 불쑥 튀어올라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방법
‘감정에 휘둘린다’, ‘감정적이다’는 말이 있지요. 심리학에서 본다면 감정에 압도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 사태를 판단하거나 슬기로운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하는 경우이겠지요. 그런데 감정 그 자체에 이러한 부정적 속성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결과입니다. 사실 감정은 세상을 좀더 명료하게 다시 바라보고, 스스로의 욕구를 다시 인식하라는 하나의 신호이자 안내자입니다.
감정이 느껴지면 대체로 우리는 억누르거나, 피하거나,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무분별하게 폭발시킬 줄은 알지만, 가만히 쭉 감정을 느끼는 데는 익숙지 않지요. 안내자를 잃은 마음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지요. 감정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이면에 숨겨진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려면 감정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제대로 느낀다 함은 마음을 막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쭉 느끼라는 겁니다. 감정은 몸의 감각을 동반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이 감각과 생각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감정을 허용해주는 것이 ‘쭉 느끼는’ 방법입니다. 고요한 태풍의 눈에 서서 소용돌이를 바라본다고 할까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끄덕끄덕하면서 ‘그렇구나’ 하면서 모든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지켜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는 가라앉고 지혜로운 눈이 하나 생깁니다. 그 눈은 내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고,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그대로 진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감정에 끄덕끄덕해주기란 몹시도 힘든 일입니다. 감정을 중시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 이러한 어려움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리네한이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를 무시하는 환경’이 심리적 역량 발달을 저해한다고 말합니다. 심리적 역량이란 스트레스가 닥칠 때 이에 압도되지 않은 채 감정을 잘 조절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해결해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울고 있으면 ‘남자답지 못하니 뚝 그치라’고 다그칠 때가 많지요. 애정을 얻고자 하는 남아에게 ‘마마보이’라는 굴레를 씌우기도 합니다. 폭력을 경험한 소녀에게 ‘창피한 일’이라고 망각을 지시하는 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는 감정이 용납되지 않는 ‘정서무시환경’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무시당한 채 억눌리기만 하는 십대 아이들이 퉁명스럽고 때로는 과격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정서무시환경’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감정 자체를 탓하게 하고 ‘감정이란 붙들어 매야 할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사람은 점차 자기 감정을 들여다 보지 않게 됩니다. 그럼 어느 새 감정은 보이지 않는 색안경이 되어 우리 본연의 지혜로운 눈을 가리웁니다.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 억눌린 사람들
삶을 파괴한 고통을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감정은 색안경이 됩니다. 1970-1980년대 정권 정당화를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이라 몰고 고문을 자행하며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들이 무수했습니다. 지금 30년이 다 되도록 이 분통함을 해소할 길이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웃은 물론 친지들 마저 무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니야’하고 말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무친 경험은 이제 원통함과 분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유령처럼 떠돌면서 가족에게 표출되기도 했지요. 어떤 분은 가족이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 말에 반대하기만 해도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정당한 분노를 배척한 결과입니다.
분노는 이분의 건강한 욕구입니다. 결백을 증명 받고 삶이 침해 당했다고 인정받고자 하는 소망은 삶의 의지이자 당연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척하는 환경에서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족을 향해 어긋납니다. 이분에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또 다른 오명이 씌워집니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정서무시환경’이 되는 셈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힘을 되찾는 열쇠는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져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 상처를 씻고자 한다면 공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 공감은 시도하는 자에게도 더 폭넓은 세상을 선사합니다.
코훗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개인의 진실한 내면과 만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죠. 공감 받은 자는 더 진솔하게 마음을 열 수 있고, 공감하는 자는 경험의 폭이 확장됩니다. 서로 진솔해질 수 있다면 단절된 거리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면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투사와는 다르다
그런데 마음 이야기에서는 매번 공감하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한번도 어떻게 공감하는가를 이야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감이란 과연 뭘까요. 공감은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 단지 같이 느낀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잘 듣고, 잘 질문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원래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감정 경험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감정 표현을 볼 때와, 실제로 내가 감정을 느낄 때에는 공통된 신경기전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쳐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가 직접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통증을 느낄 때나 타인의 통증을 보고 있을 때에 같은 뇌의 네트워크가 작동된다는 말이지요. 어찌 보면 공감이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능력이자 인간으로서의 의무라 할 수 있을 란지요.
그렇지만 감각을 같이 느낀다 해서 공감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타인이 되어보고 경험을 떠올려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는 단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공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인을 혼동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동감과는 다릅니다. 타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입각해서 위로를 전달하려 할 수 있겠으나, 실은 내가 가진 내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온다면, 이 감정을 해석할 때 그것이 내 생각에 국한된 문제는 아닌지 잘 변별해야 합니다. 감정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인데도 상대가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서로의 경계를 잘 유지하면서 공감해주기
삶을 파괴당한 경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정당한 욕구로 분노를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이분의 건강한 의지이고, 그러한 와중에 관계에서 미안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분노가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함을 주로 느끼는 분에게 ‘당신에게는 분명 분노가 있다. 미안함은 잘못된 감정이다’고 한다면 이는 자기 안의 분노를 투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안함은 약한 감정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투사는 오히려 이 분의 건강한 의지를 꺾고 자기의 강인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투사는 자기와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한 결과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은 상대에게서 오는 것인지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런데 경계가 섞여 버리면, 내 문제가 곧 상대의 문제가 되어 우리는 상대를 진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고 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오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공감을 잘 하려면 자 나신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인지 잘 변별할 수 있어야 나도 색안경을 걷어내고 세상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잘 알려면 나에게도 공감이 필요하지요. 공감 받아야 내 진솔한 마음을 들여다 볼 힘이 생기니까요.
공감하는 자의 사려 깊은 한 마디는 상대방 마음 안에 메아리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사람이 다시 힘겨워질 때 마다 마음 속에 울려 큰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사람은 상처를 버팁니다. 컨버그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상실을 겪을 때, 마음 안에 자리 잡힌 긍정적 인간관계 상에 의지하면서 자기 힘을 회복해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건강한 애도라고 했습니다.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인간관계 상마저 파괴당했다면 새로운 동반자가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공감은 마음의 힘을 강화해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마음 이야기는 늘 공감을 결론으로 끝맺곤 했습니다. [일다] 최현정
☞ 일다 2009강좌 <변화의 길을 만드는 여성들: 여성저널리스트들의 꿈과 혜안을 듣다>
☞ 강사 소개보기 및 강좌홍보 동영상보기 1편: 카메라를 든 여성저널리스트
삶은 감정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이 몰아칠 때도 있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우린 매 순간 생각과 감정과 감각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단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요. 다만 우리가 특히 주목하게 된 어떤 감정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우리 기억에 남습니다.
의미 있는 우리 감정 중에는 희락이 있는가 하면 비애가 있지요. 물론 이런 고상한 감정만 있는 것도 아니지요. 분노와 불안,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처럼 숨기고 싶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열정과 의욕, 반대로 무기력과 같은 에너지 형태로 다가오는 감정들도 있습니다. 어찌됐건, 이름 지을 수 있는 무수한 감정들은 다 그 만한 이유를 가지고 시작되고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나타납니다.
이렇게 매일의 동반자라 할 수 있는 감정을 혹시 지극히 들여다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린 감정을 늘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 감정이라 하면 익숙합니다. 그런데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감정을 느끼고 인식할 때도 있지만, 느껴지기는 하는데도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를 때가 있고, 감정이 있는데도 인식조차 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어디서 연유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른 채 감정을 없애려 하는데 더 능합니다. 우리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이렇게 흩어져버린 감정들은 통증과 긴장으로 몸에 남아 우리를 괴롭힐 때도 있고, 언제든 불쑥 튀어올라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방법
"성장정원" 일러스트-정은
감정이 느껴지면 대체로 우리는 억누르거나, 피하거나,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무분별하게 폭발시킬 줄은 알지만, 가만히 쭉 감정을 느끼는 데는 익숙지 않지요. 안내자를 잃은 마음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지요. 감정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이면에 숨겨진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려면 감정을 제대로 느껴야 합니다.
제대로 느낀다 함은 마음을 막거나 판단하지 말고 그저 쭉 느끼라는 겁니다. 감정은 몸의 감각을 동반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이 감각과 생각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감정을 허용해주는 것이 ‘쭉 느끼는’ 방법입니다. 고요한 태풍의 눈에 서서 소용돌이를 바라본다고 할까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끄덕끄덕하면서 ‘그렇구나’ 하면서 모든 감각을 느끼고 생각을 지켜보는 경험은 아주 소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는 가라앉고 지혜로운 눈이 하나 생깁니다. 그 눈은 내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고, 세상의 진실된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 그대로 진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감정에 끄덕끄덕해주기란 몹시도 힘든 일입니다. 감정을 중시 여기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 이러한 어려움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리네한이라는 심리학자는 ‘정서를 무시하는 환경’이 심리적 역량 발달을 저해한다고 말합니다. 심리적 역량이란 스트레스가 닥칠 때 이에 압도되지 않은 채 감정을 잘 조절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해결해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울고 있으면 ‘남자답지 못하니 뚝 그치라’고 다그칠 때가 많지요. 애정을 얻고자 하는 남아에게 ‘마마보이’라는 굴레를 씌우기도 합니다. 폭력을 경험한 소녀에게 ‘창피한 일’이라고 망각을 지시하는 일도 너무 흔합니다. 이는 감정이 용납되지 않는 ‘정서무시환경’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무시당한 채 억눌리기만 하는 십대 아이들이 퉁명스럽고 때로는 과격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도 ‘정서무시환경’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감정 자체를 탓하게 하고 ‘감정이란 붙들어 매야 할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사람은 점차 자기 감정을 들여다 보지 않게 됩니다. 그럼 어느 새 감정은 보이지 않는 색안경이 되어 우리 본연의 지혜로운 눈을 가리웁니다.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 억눌린 사람들
삶을 파괴한 고통을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감정은 색안경이 됩니다. 1970-1980년대 정권 정당화를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간첩이라 몰고 고문을 자행하며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들이 무수했습니다. 지금 30년이 다 되도록 이 분통함을 해소할 길이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웃은 물론 친지들 마저 무죄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고 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니야’하고 말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사무친 경험은 이제 원통함과 분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유령처럼 떠돌면서 가족에게 표출되기도 했지요. 어떤 분은 가족이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 말에 반대하기만 해도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정당한 분노를 배척한 결과입니다.
분노는 이분의 건강한 욕구입니다. 결백을 증명 받고 삶이 침해 당했다고 인정받고자 하는 소망은 삶의 의지이자 당연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척하는 환경에서 분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족을 향해 어긋납니다. 이분에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또 다른 오명이 씌워집니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정서무시환경’이 되는 셈입니다.
정서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힘을 되찾는 열쇠는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져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 상처를 씻고자 한다면 공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 공감은 시도하는 자에게도 더 폭넓은 세상을 선사합니다.
코훗이라는 심리학자는 한 개인의 진실한 내면과 만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적이라고 말했죠. 공감 받은 자는 더 진솔하게 마음을 열 수 있고, 공감하는 자는 경험의 폭이 확장됩니다. 서로 진솔해질 수 있다면 단절된 거리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꺼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었다면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투사와는 다르다
그런데 마음 이야기에서는 매번 공감하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한번도 어떻게 공감하는가를 이야기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감이란 과연 뭘까요. 공감은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저 단지 같이 느낀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대한 온전히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잘 듣고, 잘 질문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원래 사람에게는 상대방의 감정 경험을 마치 내 것처럼 느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감정 표현을 볼 때와, 실제로 내가 감정을 느낄 때에는 공통된 신경기전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쳐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가 직접 다쳤을 때 통증을 느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통증을 느낄 때나 타인의 통증을 보고 있을 때에 같은 뇌의 네트워크가 작동된다는 말이지요. 어찌 보면 공감이란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능력이자 인간으로서의 의무라 할 수 있을 란지요.
그렇지만 감각을 같이 느낀다 해서 공감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타인이 되어보고 경험을 떠올려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는 단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공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인을 혼동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감정이입이나 동감과는 다릅니다. 타인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입각해서 위로를 전달하려 할 수 있겠으나, 실은 내가 가진 내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두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감정이 전해져 온다면, 이 감정을 해석할 때 그것이 내 생각에 국한된 문제는 아닌지 잘 변별해야 합니다. 감정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인데도 상대가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를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서로의 경계를 잘 유지하면서 공감해주기
삶을 파괴당한 경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정당한 욕구로 분노를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주로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 원래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이분의 건강한 의지이고, 그러한 와중에 관계에서 미안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분노가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함을 주로 느끼는 분에게 ‘당신에게는 분명 분노가 있다. 미안함은 잘못된 감정이다’고 한다면 이는 자기 안의 분노를 투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안함은 약한 감정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투사는 오히려 이 분의 건강한 의지를 꺾고 자기의 강인함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투사는 자기와 타인을 구분 짓지 못한 결과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은 상대에게서 오는 것인지 잘 구별할 줄 압니다. 그런데 경계가 섞여 버리면, 내 문제가 곧 상대의 문제가 되어 우리는 상대를 진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고 내 감정에 휩싸여 상대를 오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공감을 잘 하려면 자 나신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인지 잘 변별할 수 있어야 나도 색안경을 걷어내고 세상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잘 알려면 나에게도 공감이 필요하지요. 공감 받아야 내 진솔한 마음을 들여다 볼 힘이 생기니까요.
공감하는 자의 사려 깊은 한 마디는 상대방 마음 안에 메아리가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사람이 다시 힘겨워질 때 마다 마음 속에 울려 큰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사람은 상처를 버팁니다. 컨버그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상실을 겪을 때, 마음 안에 자리 잡힌 긍정적 인간관계 상에 의지하면서 자기 힘을 회복해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곧 건강한 애도라고 했습니다. 상실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공감하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인간관계 상마저 파괴당했다면 새로운 동반자가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공감은 마음의 힘을 강화해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입니다. 그래서 마음 이야기는 늘 공감을 결론으로 끝맺곤 했습니다. [일다] 최현정
☞ 일다 2009강좌 <변화의 길을 만드는 여성들: 여성저널리스트들의 꿈과 혜안을 듣다>
☞ 강사 소개보기 및 강좌홍보 동영상보기 1편: 카메라를 든 여성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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