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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일・여행 ‘내 청춘의 찬란함을 믿는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두 번째 백수생활 중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경험을 토대로 ‘일’의 조건과 의미, 가치를 둘러싼 청년여성들의 노동 담론을 만들어가는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삶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전혜린 

 

▲   2014년. 공항에서.    © 연화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전혜린과 그녀의 글들은 사춘기 시절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에 대한 갈구를 불러왔다. 지금 이 순간을 온몸으로 살아있기 위한 투쟁과, 삶이 곧 예술인 사람들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유학시절을 보내고 그리워했던 뮌헨의 풍경은, 독일을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로 만들었다.

 

이후 대학을 진학하여 사회학과 사회복지 분야를 전공하던 나는 독일의 문화와 사상가들의 이론을 접했고, 그 바람은 더 간절해졌다.

 

그리고 20대의 목표를 세웠다. 독일을 다녀오자! 그것이 짧은 여행이어도 좋지만 되도록 오래, 현지의 분위기를 느끼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사회로 나가기 전까지의 유예 기간이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던 내게 해외 여행이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 모두 제주도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도 타 본 적 없는 형편이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비용은 사립대에 비해 저렴했던 지방 국립대 등록금의 이점과 아버지의 지원, 장학 혜택, 주말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며 지냈다.

 

하지만 졸업 후의 경제 생활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그렇고 아버지도 내가 독립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내게 일을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밥벌이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과제였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몇 년 후라도 좋으니 20대에는 독일로!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목표가 생기자 삶에 활기가 돌았다.

 

한 순간에 떠나버린 어머니의 빈자리

 

시골에서 유년을 보낸 내게 일이란, 사람들의 삶과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부모와 이웃들의 삶에 있어서 농사를 짓고, 집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살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아버지가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로, 어머니는 섬유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들의 삶에 묻어나던 땀과 고단함은 낯설고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부모님이 시골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순 노동의 일용직/비정규직 일자리들이었다. 부모 세대에게 삶의 목표란, 일하고 돈을 벌어 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었을까. 가난으로 중학교를 나오지 못했던 부모님은 자식들(오빠와 나)만은 꼭 대학에 가길 원했다. 대학을 나와 좋은 곳에 취업하고, 결혼을 하여 본인들보다는 좀더 편하게 잘 사는 것. 그건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힘들게 일하고 돈을 버는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 어머니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벌어 놓은 돈을 치료비로 써보지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이었다. 어머니, 그녀는 행복했을까? 사는 동안 하고 싶은 것은 얼마나 이루었을까. 나는 그녀가 포기해야 했을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 순간에 떠나버린 사람의 빈자리는 내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꿈꾸고 이루는 삶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  어머니의 빈 자리는 내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 연화 
  

일한다면, 사람냄새 나는 곳에서

 

10대 시절, 암 말기환자들이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당사자와 가족들을 돕는 호스피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내가 살면서 해야 되는 일처럼 다가왔다. 시간이 지나자 잘 죽기 위해 ‘사람답게 잘 사는 일’이라면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나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런 ‘사람냄새’ 나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대학의 사회과학군으로 입학했던 내가, 사회학과 사회복지 분야를 전공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가지고 졸업은 했지만, 막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외부로 에너지를 쓰는 일이 많던 사회복지사로서의 일은 내게 맞지 않았다. 나는 일대 일로 사람을 만나거나 좀더 사무적인 업무를 하길 원했고, 그래서 일반 회사의 사무직 일을 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공단 지역의 회사들에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과정에서 회색 빛 공기와 위압감을 주는 거대한 건물들은 내게 거부감을 주었다.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판다면, 그 곳은 적어도 사람냄새 나는 곳이기를. 그렇게 판단하고 구하게 된 일자리는 지역의 장애인복지관 회계사무원이었다. 국가보조금으로 운영되던 기관의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 일자리였다. 스물다섯에 내가 자리 잡은 곳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복지관에서 일하며 10년 후 나를 떠올려보다

 

일을 시작했던 상반기에는 사업 마감과 평가로 인한 서류 작업으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야근을 했다. 내가 맡은 회계 업무는 앞서 일을 하던 사람이 그만 둔 뒤라 제대로 인수 인계를 받지 못했고, 밤 10시를 넘어 퇴근하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근로복지공단에서 감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전체 직원이 처음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시간 외 근무를 하는 것에 대해 복지관의 특성을 고려하여 동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사회복지 분야의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어느 정도 감수하고 있던 사실이긴 했지만, 문서화되어 있는 계약서를 마주한 순간 실망스러운 마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복지관에서 일하는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직원들 사이에 농담처럼 오갔다. 나 또한 스트레스로 인한 소화불량으로 어느 순간 소화제와 죽을 달고 지냈다. 나의 직장 상사였던 과장의 업무 방식은 관내의 직원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오는 일이 많았다. 재활심리 분야 경력10년의 40대 여성, 과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그녀는 권위적인 업무 태도와 남성 중심적인 관료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10년 뒤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떠올려보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이 매몰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여기,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가짐을 바꾸어야만 했다. 결국 일을 한지 1년이 되어 갈 즈음, 사표를 썼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며 절실하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몸과 정신의 건강함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었다. 새로운 일과 사는 법을 찾아 나서기로 한 스물다섯의 겨울, ‘내 청춘의 찬란함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내 청춘의 찬란함을 믿는다.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을

내 청춘의 찬란함을 믿는다.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청춘이길.

조그만 감정에도 가슴 뛰는 청춘이길.

커다란 감정에도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 청춘이길.

 

-헤르만 헤세 『청춘은 아름다워』 중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일 

 

▲  부산의 낮과 밤.    © 연화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뒤 휴가로 내어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가깝고 안전하다고 여겨진 이웃나라, 일본이었다.(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잠시간 일을 멈춘 여행자였지만 내가 찾은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는 여전히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고 나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꽃이 만발하던 봄, 나는 모았던 돈과 퇴직금으로 부산에서 첫 백수생활을 시작했다. 20대에 독일을 다녀오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먼 나라로 떠나기에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차선으로 선택한 길은 독일문화원이 있는 부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마침 부산에 살고 있던 친구가 방이 하나 빈다고 하여 얼마간의 월세를 내며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독일어 기초 강좌로 3개월 코스를 등록했다.

 

평일 낮 시간,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게 된 나는 부산 시내를 기웃거렸고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길과 동네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화원 근처에 있던 인문학 강좌와 독서회가 열리는 북카페 <백년어서원>을 알게 되었다. 차 한 잔에, 책을 읽다 돌아가길 몇 차례 반복했을까. 여름이 시작될 무렵, 카페를 운영하는 원장님의 우연한 제안으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7시까지, 인쇄골목의 끝자락에 위치한 카페는 저녁 강의가 없는 낮 시간에 방문하는 손님은 드물었다. 일을 하는 동안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웠고, 무료로 강의도 들을 수 있었다. 한 달에 받는 월급은 시급제로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 생활비로 쓰기에 부족하지 않게 챙겨 주셨다. 원장님의 집에 방을 얻어 지냈으니 숙식도 제공 받은 셈이다.

 

가장 자신답게, 원하는 삶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년어서원>은 원도심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인문학센터로 지정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문화・예술 창착 공간이 조성되어 작가들이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일했던 6개월간, 시인이던 원장님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이 유혹하는 소비 문화의 길에서 한걸음 빗겨 난 생활을 하며, 돈을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든 삶이 아닌, 당당하게 온몸으로 살아가기. 그리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인문(人紋)학을 접하고 깨달은 삶과 일을 대하는 자세였다.

 

살아가다, 일하고 여행하며…

 

2014년 7월, 스물아홉의 나는 두 번째 백수생활을 6개월 넘게 이어가고 있다. 카페를 그만둔 이후, 2년을 대학의 행정조교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두 달 반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떠난 곳이 독일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 자신도 뜬금없지만 멕시코와 쿠바가 나의 두 번째 해외 여행지였다. <백년어서원> 원장님과 부산에서 알게 된 세 명의 언니들을 비슷한 시기에 쿠바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로 떠난 여행이었다.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멕시코에서 한 달, 그리고 쿠바에서 한 달 반을 지내다 돌아왔다. 

 

▲  한 달 반을 지내다 온 쿠바. 아바나의 풍경.   © 연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손꼽히는 멕시코시티는 미국 자본의 거대한 시장이었다. 반면 미국의 국교 단절로 60년대 이후 저성장을 하고 있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와 주변 도시들. 상반된 두 나라에 머무는 동안 현지인을 비롯하여 여행 중인 많은 한국인과 젊은 아시아인들을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여행은 내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묻게 만드는 기회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부산의 <생각다방산책극장>에서 공동 주거를 하며 살고 있다. 2011년 7월, 부산의 재개발 지역에서 하나의 실험실(백수들의 실험실?)로 시작된 이 장소는 거창한 목적을 내걸고 있는 곳은 아니다. 문을 연 이후로 재미난 이벤트와 놀이의 장이 열렸고, 나는 간간히 그곳을 찾는 손님이자 친구가 되었다. 재개발 문제로 1년 전 장소를 이전하면서는 주거 공간을 작업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지낼 곳을 찾던 나는 생활비를 아끼면서 다음 일을 구하기 전까지 머물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에 인연이 닿았다. 현재 고양이 두 마리와 네 명의 여자가 함께 지내며, 우리 모두는 백수이다. 하지만 집안일은 끊이질 않고, 한 달에 한 번, 월세 마련을 위한 이벤트를 연다. 집의 다락방을 활용한 전시 오픈, 생일파티 공연, 각자의 생활 속에서 예술이 함께 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밥벌이도 고민하며 집 밖으로, 다른 도시로 떠난다. 

 

▲  나는 <생각다방산책극장>에서 공동 주거를 하며 살고 있다.  © 연화 
 

이곳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내게, 중심이란 것이 세상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존재로 보여준다. 도시의 어느 구석에 있어도 각자가 주인이다. 내게 지금 머무는 장소는 자유롭게 살기 위한 마음의 진지(陣地)가 되어, 삶을 즐길 수 있는 힘을 실어 주고 있다.

 

행복한 백수생활 중인 지금,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를 떠올려본다. 나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밥벌이뿐만 아니라 여행을 떠날 돈을 모으는 것. 내게 일을 한다는 건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적어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사람답게 사는 곳이 나의 일터이자 삶터였으면 하고 바란다.

 

지금 이 순간을 온 몸으로 살아내고 싶기에, 일하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살아간다. ▣ 연화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상업광고 없는 언론 일다!  독자들이 말하는 <내가 일다를 좋아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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